제21화
미세먼지의 시즌이 오며 훈의 투정이 거세지고 있다. 뿌옇게 휘날리는 먼지를 보다 한국에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러다 생각에 잠긴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창 앞에 서 먼지 낀 도시를 응시한다. 몇 주째 봄볕 아까운 날이 이어지고 있다. 참, 그나저나 소개가 늦었다. 여기 훈은 튀르키예에서 온 외국인이자 나의 남편이다. 참고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는 올해로 결혼 3년차 국제부부고(만남부터 결혼 그리고 현실까지 이어지는 스토리는 네이버 썸 게시판에 올려 있으니 읽어주시면 몹시 감사할 것입니다) 한국과 튀르키예를 잇고 있다. 형제의 나라에서 내게 인연을 하사하셨다.
벌써 3년 전일이다. 우리가 혼인을 결심할 적에 하나의 옵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디 살 것인가였다. 국제커플에겐 거주 할 ‘국가’가 화두가 된다. 우리 역시 한국과 튀르키예 중 어느 나라에 살 것인가를 두고 고민해야 했고 둘 중 하나는 삶의 터라는 환경 전부를 바꾸어야 하는 일이었므로, 이는 매우 거대한 문제였다.
그렇게 결정지는 이곳 한국이었다. 훈이 바리바리 짐을 싸 한국에 와주었다. 한국 살이의 서막이 올랐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그때로 쭈욱 나의 본국인 이곳에 거주 중인데….
그러나 앞은 알 수 없다. 한국에 오랫동안은 살고 싶지는 않다는 훈의 저항이 생겼다. 살다 보니 한국의 장점 못지 않은 단점을 발견한 듯했다. 그가 추구하는 라이프 스타일과 한국은 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일상에서 발견한 단점이었으므로 훈은 순간순간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한국에 오랫동안은 살고 싶지 않아요. 어떤 날은 미세먼지 때문이었고 다른 날은 그래서였다. 그래서 무엇 때문이었냐면 바로.
1. 미세먼지 나빠
미세먼지는 나쁘다가 매우 나쁘다가 나쁘다가 매우 나쁘다가를 거듭한다. 봄철 미세먼지 농도 좋아지기는 보통 어려운 일 아니라 미스터트롯 콘서트 티켓 끊는 것과도 같은 수준이다. 안개 낀 듯 가시거리 확보도 힘든 이 시국에 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런 환경에 살 수 없다며. 지중해에서 온 그라 시뿌연 공기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겠지만, 실은 이건 좀 남다른 일이긴 하다. 지구 한 바퀴 둘러 보아도 모든 나라가 미세먼지로 앓지는 않으니 말이다. 미세먼지로 창은 활짝 열지 않고, 외출은 삼가고 있다. 봄을 만끽할 수 없음은 명백한 삶의 질 저하다.
감염 예방을 위한 마스크 의무화 조치는 해제 되었으나 미세먼지를 견딜 수 없어 마스크 쓰고 나가는 날의 연속이다. 목구멍이 후추 가루로 덥힌 듯한 느낌은 나로서도 반가운 일은 아니다.
2. 사람들이 무뚝뚝해
언젠가 어학원을 다녀 온 날, 그가 이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무뚝뚝해. 얼핏 ‘무뚱뚱해’ 라고도 들리던 그의 발음. ‘무뚱뚱하다’는 단어는 한국에 없다며 다시 말해 보라고, 몇 번을 전해 듣다가 마침내 “아아, 무뚝뚝하다고?” 하던 기억이 나면서. 그래서 그 단어의 의미를 아냐고 물었더니 안단다. 그렇기에 한국 사람들은 무뚝뚝하단다. 그래서 재미도 없고 친밀감도 없다고 했다. 해석하건대 인간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교감이 비어있다는 눈치였다. 덜 친절하다는 뜻 같기도 했다. 외국인 훈은 어쩌다 그리 생각하게 됐는지 궁금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해?”
외국인 훈 눈엔 내가 볼 수 없는 어떤 얼굴이 비춰지나 보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한국사람들이 삶에 만족이 없는 것 같아요. 만족을 안 하는 거나 못하는 게 아니라 만족하기 힘든 (생활인)것 같아요. 그래서 피쓰풀(Peaceful, 평화로워) 보이지 않아요.”
어째서인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한 듯 훈은 느낀 그대로를 말해주었고, 그것은 다소 결과론적인 답이었으나 어쨌거나 그는 볼 수 있던 것이다. 만족스럽지 않은 생활에 사람들은 무뚝뚝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관계의 축소, 끝없는 경쟁, 고독의 심화 등. 우리가 처한 다양한 정서적 결핍에 관해 훈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느낀 그것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무뚝뚝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 테지.
3. 야채 값이 너무 비싸
우리 둘은 채식을 지향한다. 고로 야채에 쏟는 비용이 식비 상당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야채를 사게도 된다. 지루한 건 참을 수 없어 컬러풀한 장보기를 한다. 그래서겠지. 야채 종류나 가격에 민감한 편이다. 생활 밀착형 식재료이기 때문이다.
주말 하루는 일주일치 장을 보러 간다. 처음 들리는 곳은 야채 코너. 거기 가면 컬러풀한 야채로 눈이 호강을 한다.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먹고 싶은 바람에 다소간 기분은 격상한다. 그러다 급 힘 빠지는 순간이 있으니. 덜컥 집을 수가 없다. 작은 토마토 5개에 6천원을 호가하고, 그 옆에 있던 애호박 하나엔 3천원을, 가지 3봉에 7천원이라는 말인지 방구인지 말방구인 가격이 떡 하니 붙어있다.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진다.
야채 위주로 먹고 싶으나 마음껏 구매할 수 없는 이들의 심정은 결코 유쾌할 수 없다. 클린하게 먹고 싶어 정한 채식 라이프인데 가격이 돕지 않는다. 건강하고자 하는 욕구를 박탈당한 기분이다. 나 뿐 아니라 훈도.
“너무 비싸! 튀르키예 가면 이 가격에 3배는 더 살 수 있어요. 우리 튀르키예 갈까?”
집었던 야채를 살까 말까, 집었다 내려놓았다. 여긴 야채가 자랄 마땅한 영토는 아닌 건가. 물가상승을 고려해도 한국은 야채와 과일이 비싼 편이기는 하다. 그래서 자취할 때 야채나 과일은 내가 사 먹는 거 아니라는 선배의 조언도 있었다. 꾹 참았다 휴가 때 엄마 집에서 먹는 거라고 했다. 그러나 같은 돈이면 라면 몇 봉을 더 사 먹을 수 있다는, 자취생의 심정은 결혼한 후에도 느낄 수 있다. 부담스러움은 혼인 여부를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훈은 한국에 오랫동안은 살고 싶지 않단다. 적어도 은퇴하고는, 결코. 그렇다면 그의 Better life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미세먼지가 적고 다정다감한 사람들이 많으며 야채값이 저렴한 그 나라에 가면 훈은 better life를 실현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훈의 말에 설득되는 건 뭐지. 미세먼지로 외출을 삼가고, 불가피 다소 짜증 섞인 투의 한국인을 자주 만나게 되며, 집중과 선택을 통해 야채를 먹을 수 있던 내게도 거부할 수 없는 한국의 피로감이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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