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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Aug 28. 2023

유튜브 자꾸 미루게 되는 이유 외

최근에 한 단상



1.

유튜브 자꾸 미루게 되는 이유     



가볍게 하려고 했다.

친구와 대화하듯 편하게 찍어, 자를 거 자르고 넣을 거 넣어

딱 5분짜리 영상부터 만들어 보자 다짐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편 내지 두 편 올리면 되겠구나 싶었다.

개껌, 꽤 할 만하겠는 걸?

속으로 ‘이지피지’를 외치던 나는 결론적으로     


오만했다.     


영상 업로드가 말처럼 쉽지 않다.

- 컨텐츠 기획, 대본 작성, 영상 녹화, 편집 …

영상 하나를 위해 이 모두를 나 혼자 처리해야 하는데,

한숨 푹 내쉬다 투자 시간을 계산해 본다.  

   

이쯤 말해야겠다.

내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둘째는 사람이오 첫째는 시간이라 하겠다.

(둘의 순위가 아등바등 비슷하긴 함)

나는 시간을 제일 귀하게 여긴다.     


그러다 보니 투자한들, 구독자 몇이나 끌 수 있으려나.

이따위 생각이 든다.

자꾸만 시간대비 결과가 떠오른다.


애초에 유튜브를 ‘잘’ 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투입 시간이 많기를 바라지도 않았던 거다(그러면서 구독자는 늘기를 바라는 아이러니).

때문에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비즈니스 연구를 하는 편이 나한테 득이지 않을까.

수십 번 자문하고 있다.     


이는 글을 쓸 때와는 전혀 다른 나다.     


글은 독자 한 명 있고 없고완 무관히 내가 재미있어, 잘 하고 싶어, 탁월하고 싶어 시간을 때려 붓는다.

반면 유튜브 영상 작업은 그렇지 않다.

글이 자발이라면 유튜브는 비자발이다.

여기서 하나 깨달은 바를 정리하자면 ‘해야 하여 하는 일’은 도통 흥미가 돋워지지 않는다는 것.

확실한 대가가 없으면 곧 죽어도 안하게 되는 일이 바로 비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다.     


‘뭬이야? 억지로 하는데 대가까지 불확실 하다고?’     


비자발적으로 직장생활만 12년 할 수 있던 동력은 오로지 월급이었고 대출 안정성 때문이지, 그렇고말고.    

 

그렇다면 왜 유튜브 하고자 하였는가.


하면, 나와 내 비즈니스를 널리 알려야겠다는 간절함에 유튜브‘도’ 해야겠다 결심한 것에 불과하다.

유튜브 안 해도 나의 글과 나의 강의가 입에서 입으로, 전 세계에 설파 된다면 나는 아마 유튜브를 안 할 것이다.     


그러나 유튜브는 어쨌건 아무튼 좌우당간 해야만 한다.

아직 마땅한 답을 강구한 것은 아니라,

시작와 끝이 같은 결론에 이른다.          








2.

성장통



자신의 그릇보다 큰 고난이 쿵 하고 떨어지면

그 무게와 크기를 감당하지 못 하고

그릇은 도리 없이 깨지게 되어 있다.     


깨질 때, 졸라 아프다.

아파 신음한다.     


허나 고난이란 본래 벗어나려 발버둥 쳐봐야 소용없는 것.

수용만이 절대 답.


고난을 품기 위해 그릇은 필연적으로 제 크기와 경도를 키우게 된다.

고난의 사이즈만큼 딱 그만큼 그릇은 커진다.     


그릇엔 고난의 사이즈가 여실히 남는다.     


그릇이 큰 사람

그릇이 큰 사람

그릇이 큰 사람.     


나는야 멋진 사람.     







3.

결혼은 과정이어야지     



완성된 큐브는 큐브로서 의미가 없다.


큐브는 뒤틀어가며

같은 색의 9가지 조각을 6면에 다 맞추는 ‘과정’에 

놀이로서 의미가 생긴다.     


결혼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 드디어 결혼했어!’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라 생각하면 그 사랑은 의미를 잃는다.

어디까지나 과정이어야 한다.


과정임을 알 때, 결혼은 소꿉놀이가 되고

완성이라 착각할 때, 결혼은 족쇄가 된다.     







4.

그게 과연 착한 걸까     



통상 ‘착하다’고 수식받는 이들은

착해서 착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게 아니라,

쉽사리 죄를 의식하는 편이라

자신을 저지하는 능력이 유독 발달해 있는 거라고     


우연히 읽은 한 구절을 통해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착함은

어떤 면에 있어 사회엔 유익할 수 있으나(조신한 대중이 되는 길)

착한 개인에겐 위험하다(개성을 묵살하는 일).     


생각해 보라.     


수시로 죄의식을 느낀다면

하여 ‘죄’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억누르는 일을 반복해 오고 있다면

이 얼마나 짠한 일인가.     


실은 그 죄라는 놈이

허상일수도

부모가, 사회가, 집단이 바라는 그를 투영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 모르는데.     


하면 착하다는 칭찬일 수 없다.

안 쓰게 되는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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