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은경 Nov 08. 2023

만난 지 2주 된 외국인과 결혼 했다(2/2)

제30화

- 지난 글 : 만난 지 2주 된 외국인과 결혼했다(1/2)



예전에 티비 나온 한 커플을 보고 혀를 끌끌 차며 아연실색하던 나를, 나는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말이냐 방구냐 라는 논쟁으로 시작하여 ‘나는 불가능’이라는 단호박으로 마무리 지었던 것도. 소파에 나란히 앉아 팔짱낀 채 인터뷰하는 둘을 보며 저들은 무모하다고, 그게 아니라면 무언가에 홀린 것이 분명하다며 옆에 있던 X에게 중얼대던 나였다. X는 나의 전전전(?) 남친, 그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거짓이라고도 생각했다. 티비에 나온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만나고 5일 만에 결혼을 결심했어요. 바로 청혼했어요. 그리고 다음 달에 양가 부모님 뵙고 식장 예약하고…. 일사 천리였죠.”     



옛날 옛적 MBC에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이 살았다. 프로그램은 마치 단편 소설집처럼 각각의 단편을 품고 있었는데, <진실 혹은 거짓>도 그 중 하나였다. 미스터리한 몇 스토리를 공개하며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거짓인지 맞추는 코너였다. 꽤나 그럴싸해 전부 진실 같다가도 한편 거짓 같아, 한 순간에 추리력을 붕괴시키던 진실 혹은 거짓. 그리고 나는 ‘만남 5일 만에 결혼을 결심한’ 둘을 보며 이것이야 말로 <진실 혹은 거짓>에 ‘거짓’쪽 스토리로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모르고, 오만방자했던 나였음을 이제 와 고백한다.     





인생사, 인간사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이곳에 존재하는 모두는 잠재 가능성으로서 현존한다. 가능성이란 언제 어디에서 어디로 튀어나갈지 모르는 변수, 그렇기에 결코 미래를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인생 한 방이라는 격언도, 인생이란 본질적으로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생겨났다. 그리고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어제 욕하던 걔가 오늘 내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능성이 나에게로 튀었을 때 나는 영락없이 함락당하고 만다. 과거에 단호박 같던 나-나는 절대 안 그런데!-를 보며 부끄러워하고, 그를 향해 부르짖던 비난을 스윽 주머니에 숨기며 심심한 사과를 고한다. 외국인과 만난 지 2주 만에 결혼을 결심한 내 이야기겠다.     





우리는 만난 지 2주 만에 결혼을 결심했다. 정확히는 오프라인 데이트 2주, 코로나용 온라인 데이트 5개월 만에 한 결혼이다. 사귄 날은 거의 6개월이지만 그 중 볼 부비고 침 튀겨가며 만난 날은 고작 2주라고나 할까. 튀르키예인 남편 훈이 본국에 돌아가기 전인 2주간 굉장히 촘촘하게 시간 써 가며 데이트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2주였고, 2주로 평생 동반자로 찜하기 까진 둘에게 참담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던 것이다. 2주면 14일이다. 14일이면 14번을 만날 수 있다. 14번이면 14개의 그를 알 수 있을 뿐이다. 14개의 면만 보고 결혼을 감행하기란, 화투에서 ‘못 먹어도 고!’를 외치는 격과 무엇이 다를까.     



그러나 결혼에는 의심이 없었다. 의심이 없기에 결혼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훈은 튀르키예 나는 한국에 지내며, 코로나로 5개월간 만나지 못할 때, 남북 이산가족의 심정을 절절히 느끼며 우리가 결심-결혼 할래? 당연하지!-하기 까지는 2주로도 충분했다는 말이다. 의심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코로나를 핑계로 헤어졌을 수도. 그러나 2주로 충분할 만큼 훈은 내게 커다란 사람이었는데….     



하여 지금에 와 생각해 본다. 도대체 무엇이 2주밖에 만나지 않았던, 심지어 외국인과 결혼을 결심하게 한 것일까. 심지어 나는 그의 나라에 가 그가 어떻게 사는지, 본국에서의 평판은 어떠한지, 그의 오리지날리티를 볼 기회가 없었음에도. 결혼 상대로서 외국인이라는 페널티가 붙는 그임에도 대체 어쩌다 그와 결혼을 결심한 것일까. 어쨌거나 우리 둘은 결혼에 목말랐던 사람은 아니었고, 허기짐에 연애를 고파했던 때도 아니었다.     



아하! 생각해 보니 아마 이게 가장 클 것이다.     





나는 훈에게서 역대 X에게서 볼 수 없던 마음을 느꼈다. 이것은 만남 당일부터 쭉, 그에게서 보여졌던 것이다. 훈은 자기 자신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늘’ 앞에 두었다. 훈은 우리 같이 무얼 하던 “너 먼저”라고 했다. “베이비 먼저 먹어야지” 하고 음식을 건네고, “네가 먼저 해봐”라며 좋은 것은 다 내게로 미루었다. 그 다음이 자신이었다. 그런데 그게 있지, 가식이 아니라 전부 진심이라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달까.     



언젠가 늑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남자는 늑대’라는 표현이 꽤나 저속하게 사용된 시절이 있었다. 약간 변태, 약간 음흉한, 약간 호색 짙은 느낌? 그런데 진짜 늑대는 그렇지 않다고 그랬다. 오히려 자기 여자만 지키려 드는 진짜 의리파라고. 나는 훈과 만나며 인간이 늑대라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튀르크 전사 마인드가 그의 피에도 녹아 있는 건가 했던 것도.      



그런 그는 나의 자부심이었다. 어디서나 한 치의 의심 없이 그를 자부할 수 있다면, 그 마음만으로 나는 많은 것을 함의한다고 믿는다. 단전에서 우러난 확신은 아무에게서나 발견되지 않는다.     



또, 훈은 재력으로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결코. 당시 학생신분이기에 재력을 과시할 능력이 없었음도 물론 사실이지만, 애초에 물질로 나를 기쁘게 하려하지 않았다. ‘물질은 인간을 진정으로 기쁘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물질로 나를 기쁘게 하려 하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기보다, 물질보다 마음으로 나를 기쁘게 하려는 점이 좋았다는 게 맞겠다. 그는 물질이 채울 수 없는 면면을 알고 있었다.     



나는 이를 자라온 환경의 문제라 이해했다. 사랑하는 방식의 문제이자 사랑을 받아 본 경험의 문제라고도, 결국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교육의 세습이라고도 생각했다. 시댁이 있는 튀르키예에 지내던 어느 날, 비로소 한국의 물질주의를 받아들이며 얻은 깨달음이다.     



이제 한국은 감정 대부분을 물질로 치환하는 모습이다.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 대신 용돈으로 마음을 전하고, ‘더 좋은 거 해줄 게요. 조금만 기다려요!’라며 다시 오지 않을 현재를 미루며, 좋은 학용품과 좋은 옷을 사주기 위해, 그것이 내 아이의 자존을 높이는 길이라는 생각에 몸 값 높이는데 시간을 쓴다. 나라고 자유로울 수는 없는 토픽이지만 여하튼. 사랑의 대상도 물질을 원하는 편이며, 때문인지 물질을 채워줄 때 뿌듯해 하는 나가 존재한다. 반면 튀르키예에 있을 땐 단 한 번도 바쁨과 벌이에 내가 밀린 적이 없다. 때로 그들 마음 씀에 감동해 눈물이 나오기도 할 만큼, 언제나 존재로서 대접받았다.     



그래서 훈과 결혼한 초기,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낙낙했다. 시간이 갈수록 물질은 개선되고, 정신의 풍요는 지금도 여전하다. 이것은 실컷 사랑하고 한껏 사랑받는 기분이다. 그걸 나는 바이브로 안다. 내가 울면 훈은 너무 마음 아프다며 자신도 운다. 쌍커풀 짙은 그 큰 두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데 그럼 떨어지던 내 눈물이 쏙 들어간다. 내 슬픔을 그가 다 가져가기라도 하는 듯, 그의 사랑은 깊다. 그가 튀르키예에서 자라며 받아 본 사랑의 경험, 사랑하는 방법, 그대로를 나에게 실천하고 있었으리라.     



두 번째는 그가 품은 꿈의 크기가 마음에 들었다. 세 번째는 그의 지적인 모습이었고, 네 번째는 그를 이성으로서 호감 갖게 한 그의 외모였는데 이것은 사귀기 시작한 후로 한참 뒤로 밀렸다.     



반면 훈은 나의 솔직한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숨김이 없다는 말이었다. 마음 들키면 달아날까, 내 가치를 낮게 보지는 않을까하는 여자들과는 달랐다나. 좋으면 좋은 거 싫으면 싫은 게 좋았단다. 종종 나더러 ‘tomboy’라고도 하는 걸 보니 중성적인 모습에 끌렸던가 보다. 그 다음으로 순수라는데…(믿지 못함). 그 다음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만하면 괜찮았다고 한다(흠).     



그렇게 만난 지 2주 된 외국인과 결혼을 한다. 우리가 세운 나름의 조건이 맞았기에 고작 2주 만에도 국제결혼을 감행할 수 있던 거겠지. 아주 가볍게, 아주 클린하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우리가 성립시킨 결혼의 조건은 모두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으며, 어느 커플은 또 다른 조건의 성립으로 결혼에 이룩할 것임을. 모두에게 통하는 조건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그러나 어떤 조건, 어떤 결혼에 혀를 끌끌 찬 적이 있더라면 가능한 그 혀를 묶어두심이 나을 것임을. 다시 말하지만 인생이란 잠재적 가능성의 바다이기 때문에.     



당신도 국제결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위는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947032&memberNo=38753951&navigationType=push




매거진의 이전글 만난 지 2주 된 외국인과 결혼했다(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