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나는 한국인, 남편 훈은 튀르키예인. 우리는 반반, 다른 문화에 섞여 사는 까닭에 나는 불가피 자주 한국과 튀르키예를 비교하곤 한다. 가끔은 비교가 나쁘다. 하지만 대부분 유용하다.
뇌가 그것을 원하는 듯하다. 뇌는 비교를 통해 두 국가를 이해한다. 한국은 이런데 튀르키예는 이렇군, 하며 둘 사이 생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이런저런 ‘왜’와 ‘이유’를 살핀다. 문화차를 받아들여 오해 여지를 줄여 나가는데, 그러다 보면 하나씩 나만의 통찰이 생긴다. 국제부부가 아니었다면 깨치기 힘들었을.
그리고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할까 한다.
연애결혼과 중매결혼,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그 간극에 관하여.
- 연애결혼 : 연애에서 출발하여 이루어진 결혼
- 연애 :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
- 중매결혼 : 중매로 이루어진 혼인
- 중매 :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중간에서 소개하는 일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2023년, 한국은 연애결혼이 압도적이다. 가까운 예로 내 주변 커플 열의 열은 연애결혼을 했다. 우연한 남녀 둘이 만나 호감을 시작으로 사귄다. 대개 2-3년 연애하다 결혼을 한다. 언젠가 식자자리에서 만났던 그 오빠(남자친구)랑 결혼한단다. 중매결혼 한 커플은 없다. 결혼 정보회사를 통한 결혼이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자연스러운 만남에서 시작한 연애 그리고 결혼이 대다수다.
반면 2023년 튀르키예는, 물론 연애결혼이 느는 추세지만, 여전히 중매결혼이 많다. 혼기에 든 남녀가 중매로 만난다. 다섯 번쯤 데이트한다. 서로 결혼상대로 적합한 가, 짧고 진하게 판단한 후 결혼을 한다. 사실 튀르키예 문화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종교에서 비롯한 문화 이유로 여성은 성스러움을 강조 받는다. 특히 보수적 집단에서는 연애를 하지 않는다. 교육 받아 그런 셈. 여성에게 평생 남자는 남편 하나, 남편 이전 남자친구는 쉽게 용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 튀르키예에선 대부분 중매로 결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헉 했다. 역시나 한국과 비교 되어서였다. 연애결혼만이 내 상식, 사랑과 시간 없는 결혼이 가당키나 한 것입니까? 아무렴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결혼이자 할 수 없는 결혼이고, 그러느니 빛이 나는 솔로로 살겠다! 속으로 외쳤더랬다. 그러나 ‘이해’는 할 수 없어서라기보다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그렇게 한국의 결혼(연애결혼)과 튀르키예의 결혼(중매결혼)에 대해 몰두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는 알게 된다.
둘은 결혼하는 목적 그 자체가 달랐을 뿐이다. 옳고 그름도, 놀랄 것도 없었다.
- 둘의 ‘결혼 성립 과정’은 표면적 차이에 불과하다. 진짜 다른 점은 ‘결혼하는 목적’이었다
(목표가 아니다. 결혼에 목표가 있을까? 애 셋 낳기?)
그래서 목적을 살피면, 연애결혼 목적은 사랑의 레벨업이다. 주로.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가정을 이루고하 자는 목적보다 다음 레벨로 넘어가기 위한 사랑의 레벨업. 둘 관계를 연인에서 가족으로 진급시키고 싶어 정한 결혼. 이제는 애인이 아닌 가족으로서 삶을 개척해 가자고 그들은 결혼을 택한다. 이만하면 연애는 됐다 마, 이쯤 결혼하자, 하는 느낌도 있고 어쩐지 연애도 좋지만 결혼이 하고 싶어져 한다고 할까. 그렇게 둘은 인생에 새 국면을 맞이한다. 그러곤 다음 레벨을 두드리며 아이를 낳는다.
중매결혼 목적은 가정의 꾸림이다. 이들은 가정을 이루고 싶다는 이유로 결혼 상대를 찾는다. 결혼이 하고 싶으니 마땅한 배우자를 구해야지, 하는 느낌이며 그러다 만난 이만하면 좋은 상대와 결혼이다. 이들에게 결혼은 본능이라 그렇다. 번식에서 비롯한 본능이자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결혼을 하면 번식을 법으로 보호 받는다. 생존에 있어 집단생활은 유리하다. 혼자 있을 때와 여럿이 있을 때, 어느 상황이 외부에 대응하기 좋겠는가.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곧 번식본능, 아이를 낳아 기르며 생존을 유지한다.
다만, 생존 우선이라 이 결혼에서 절절한 사랑은 순위에 밀린다. 애초에 가정을 이루고자 함이 결혼 목적이었다. 그것은 가정이라는 나의 울타리이자 집단을 형성하게 했다. 이것만으로 결혼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다.
- 연애결혼의 주된 목적 : 사랑의 레벨업
- 중매결혼의 주된 목적 : 가정의 꾸림
이쯤 떠올렸을 때, 나는 중매결혼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내 상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폄하해서는 안 됐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보았을 때, 결혼 성립보다 중요한 것은 행복한 결혼 생활 유지. 그런 면에서 연애결혼이라고 중매결혼이라고 무엇이 더 우월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매결혼 유지가 더 높아도 보였기 때문이다. 결속 차원에서 말이다.
갈수록 결혼을 브레이크 하는 커플이 늘며 오래 산 어른은 말한다. ‘요즘 사람은 참을성이 없어.’ 그러나 이를 단순한 인내력 문제로 볼 수 있을까. 인내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다. 인내의 조건도 저마다 다르다. 때문에 참을성(또는 인내)만으로 약화된 결속을 근거 할 순 없다.
다만, 생존에 있어 배우자 역할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연애결혼은 생존보다는 사랑의 레벨업 차원에서 이뤄졌다. 반대로 중매결혼은 사랑의 레벨업이 아니라, 생존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생존은 가정을 ‘필요’로 하게 만들었다.
‘필요’보다 강한 결속은 없다. 생존은 거센 필요를 끌어당긴다.
생존이란 곧 생명 존속의 문제. 생존을 높이기 위해 남자는 아내를 필요로 하고 여자는 남편을 필요로 한다. 그런 필요는 결속을 유지한다. 마침내 아이가 탄생하면서부터 둘의 필요는 극대화 된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 둘 모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생존을 위하여 존재를 끌어당긴다. 이러니 존재 간 결속이 강할 수밖에. 반대로 필요가 덜한 존재는 결속이 약하다. 요즘 사람 참을성이 없는 게 아니라, 서로 필요한 이유가 줄어든 것뿐이다.
결국 결속은 끊임없는 ‘필요’겠다. 내게는 네가 필요하고 네게는 내가 필요하다. 네가 내게 있어 몹시 필요한 존재임을, 나는 잊지 않는다.
이것이 지금껏 내가 내린 잠정 결론이다. 지금에 이른 결론은 연애결혼도 중매결혼도 뭐가 더 우월한 방식이고 더 우아한 방식이고란 없다는 것. 보다 중요한 일은 행복한 결혼 생활의 유지. 이는 곧 결속력인데, 결속은 서로의 필요를 원동력으로 한다는 것. 생존을 위한 필요라면 더욱 강력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어쨌거나 ‘필요’.
존재의 필요, 사랑하고 사랑 할 존재의 필요.
그리하여 훈은 내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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