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은경 Nov 22. 2023

외국인과 결혼을 절감하는 3가지 때

제32화

솔직히 말하면, 외국인인 남편 훈(국적 튀르키예)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수더분하니 이만큼 타국에 적응하기 쉬운 성격도 없겠다.'



이런저런 까닭에 훈과 결혼해 사는 동안 나는 그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거의 눈치챌 수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외국인등록증(*한국인의 주민등록증처럼 외국인에게 부여 되는 ID card. 발급 받은 비자 타입에 따라 기간마다 갱신을 해야 하기도 한다) 갱신을 위해 출입국사무소에 가야하는 것 빼고는, 정말이지 글쎄.



그가 외국인이었나?     



식당가면 이모들 종종 “어디서 왔댜? 잘 생겼네~” 하고 훈을 빤히 바라볼 때가 아니고야 글쎄. 아무래도 이모들 굵직굵직한 이목구비 가진 남자를 잘생겼다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는 것 말고는, 흠. 글쎄. 외국인과 결혼을 절감하는 건 아마 다음 순간이 유일하지 않을까. 오늘은 외국인과 결혼해 사는 모멘트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외국인과 결혼했음을 절감하는 때는요?”     




1. 다툴 때마저 설명해야 할 때


훈과 다툼이 생겼다. 이런 일로 다툴 줄은 몰랐는데 서로 오해가 있던 모양이다.     



한국은 진작 개인주의 사회로 접어들었다. 이웃과 연대해 사는, 온정 문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처럼 동네 누구 아줌마에게 가 밥 얻어먹고, 고마움에 다음 날 우리 집으로 그 댁 아이를 초대해 밥 먹이는 일은 없다. 우리 집 대소사에 이웃주민 참여하는 일은 더욱이 없다. 작고 큰 도움을 요청할 이웃은 없고 대신 차가운 기기로 해결한다. 그리고 빨간 재생 버튼을 눌러 분리수거는 어떻게 하는 지, 잡채는 어떻게 만드는 지, 아이 열날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따위를 묻는다.     



언젠가부터 스스로 처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에 묻지 않고, 하여 답변 기다릴 필요 없이 즉각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제법 생겼다.     



나 뿐은 아닌듯하다. 이제 한국인 대부분은 타인에게 묻지 않는다. 묻지 않고 검색으로 해결한다. 영상 재생과 정지를 반복하며 화면에 나온 그를 따라한다. 자연스레 소통이 줄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조차 영상으로 해결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라고 피할 수 없었을 뿐이다.     



이를 또렷이 자각한 것은 훈과 다툰 그 날이다. 우리는 다투었고, 이유는 훈은 번번이 내게 ‘묻고 부탁’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게 은근히 불편했던 듯하다. 도둑 방구처럼 공기 타고 은밀히 번지는 짜증에 훈도 단단히 마음이 상했던 거다.     


개삐짐


나는 훈에게 잘,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영상을 찾거나 블로그 포스팅 먼저 살핀다. 여느 한국인처럼 굳이 인간에게 먼저 묻고 부탁하는 일은 잘 없어졌다. 때문에 나나 내 주변인이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훈도 스스로 알아서 (영상을 찾던 뭘 하던)해결하길 바랐다. 웬만하면 스스로 해결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 아무렴 모든 일은 제 알아서 해결하는 버릇이 베어버린 탓이었다.     



반면 튀르키예에서는 여전히 인간 중심 네트워크 문화가 강하다. 문제가 생기면 이웃이나 친척에 전화를 건다. 그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라면, 해당 이웃이나 친척이 알고 있는 다른 이에게 사안을 넘긴다. 또 다시 전화를 걸어. 그렇게 1차에서 2차로, 어떤 때는 3차, 4차로 넘어갈 때까지 그들은 인간 바통을 넘기며 어떻게든 ‘내 사람’의 문제를 돕는다.     



그리고 이 다름에서 온 다툼을 하나하나 설명해야 했을 때, ‘내가 더 서운해!’ 하고 소리치기 대신 그와 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다툼의 배경부터’ 차근차근 말해야줘야 했을 때. 요즘 한국 사회는 이러하고 저러한 반면 튀르키예는 그러하지.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생활양식을 기반으로 살아 왔기 때문이야, 하고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을 때. 굉장히 외국인과 사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감정 대신 설명, 문화적 차이 설명.     




2. 섹시한 옷을 향한 태도


튀르키예라는 나라를 봤을 때, 종교 이유로 보수적인 이들은 굉장히 닫혀있다. 반대로 종교가 없고 개방적인 이들은 괴괴-굉장히 열려있다. 이스탄불에 여행 가본 이라면 알 것이다. ‘여기 국민 다수가 이슬람을 믿는다는, 튀르키예 맞아?’ 하고 한 번쯤 눈을 껌뻑였을 거니까.     




하여 튀르키예인 전부가 성에 개방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남편인 훈은 성(性)에 열린 젊은 튀르키예인 중 하나, 그와 결혼 후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른다. 개중에서도 성과 직접 관련은 아니지만 섹시한 옷차림에 대하여. 훈 덕에 나는 삼십년간 지녔던 어딘가 엉성한 가치관을 송두리째 제자리로 돌릴 수 있었다.     



여기 다 담긴 좁아 사례 하나만 이야기하겠다. 훈은 나더러 시원시원 속살이 다 보일만큼 개방적인 옷을 입으라 한다. 훈은 나의 남편이다. 그런 그가 나더러 감추지 말고 드러내라 한다. 여태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 남자만 만나봤으므로, 처음엔 그런 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되물었다. 괜찮겠냐고 기분 나쁘지 않겠느냐고. 지금 생각하면 애초에 내가 내 옷을 입으며 내 의사가 아닌, 상대방 허락을 구하는 이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음을 알지만 그때는 그랬다.     



그러니 훈에게 돌아온 대답.     



“난 그저 예쁘게 입으라는 거예요. 우리아내 예쁘면 좋지. 그리고 내 생각에 이런 옷(시원하게 파인 옷)이 예뻐 보여요. 남자가 이상하게(섹슈얼하게) 쳐다보면 그건 그 사람 잘못이야. 다른 사람 때문에 안 예쁘게(꽁꽁 싸맨 옷) 입지는 마세요. 베이비 입고 싶은 옷 입으세요.”     



훈의 말에 나는 그동안 내가 ‘왜’ 애써 목 끝까지 차오른 티셔츠만 찾아 입었는지 펑퍼짐한 바지만 사재꼈는지 알 수 있었다. 훈연 조리한 것처럼, 성에 대한 보수성과 부정성이 삶에 배어 있던 것이다. 이렇게 입으면 나를 야하다고 보겠지 내게 음흉한 시선을 보내겠지. 하고 말이다.   


  

여전히 한국은 보수에 치우친 성(性)향을 갖는다. 서양 언냐들처럼 젖가슴을 시원하게 드러내거나 드러내기 위해 입지 않는다. 타이트하고 짧은 옷 입기를 보통 꺼린다. 왜일까. 생각하면, 내 몸의 아름다움을 흘기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런 것 아닐까. 나아가 옷차림으로 드러난 여성성을 아름다움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야스럽다며 수군대기도 하기 때문 아닐까. 그 자체로 아직 한국은 성에 한참 보수적이다. 여성의 여성성을 아름답게 드러내고자 하는 본능을 낮춰 바라보기 때문. 문란하다거나 야하다는 표현 자체가 아이러니다.     




3. 모국어로 유창하게 대화 할 때


매주 하루는 튀르키예 가족과 영상통화 한다. 그때면 훈은 평소와 쌩판 다른 사람이 된다. 마치 흰색 난닝구에 엉덩이 벅벅 긁던 주말 백수가, 블랙 수트 쫙 빼입고 출근하는 평일을 맞이한 것처럼. 어설픈 한국어는 저리가고 섹시한 튀르키예어가 들어찬다. 허나 어떤 날은 그가 그저 튀르키예어 잘 하는 한국인 같아, 어디서 배웠냐고 묻고 싶기도 하다.     



“튀르키예어 왜 이렇게 잘해? 어디 학원 출신이야? 나도 소개 시켜주라!”          





위는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4947032&memberNo=38753951&navigationType=push





매거진의 이전글 연애결혼과 중매결혼, 이 둘에 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