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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Feb 17. 2024

외국인이 본 한국 : '참아'의 민족

제38화

나의 남편은 외국인, 이제 막 한국살이 5년차 된 그가 느낀 한국은 이러했으니.




바로 ‘참아’의 민족.

배달의 민족이 아닌 ‘참아’의 민족이라 하신다. 하며 이렇게 말하더란다.     




“한국인은 많이 참는 거 같아요.”     




나는 곧잘 참지 않는다고, 하고 싶은 것 반드시 하고 하기 싫은 것 죽어도 못한다며 나를 설명하고 다녔거늘, 어쩐지 그가 뱉은 한 마디에 배꼽 아래 뜨끈해 지는 이유 무엇인지. 그래서 한국인 무엇 그토록 참는 것 같냐 물으니 이렇게 말한다.     




- Study : 취업하려고 하기 싫은(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도 참아요

- Dream : 꿈이 있어도 (취업이 안전하다며) 참아요

- Order : 교수 지시, 선배 지시가 말이 안 되도 참아요(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아요)     




취업 쉽게 하려 적성에 맞지 않는 공학을 전공했고, 애초에 꿈이라 해봐야 조기 취업해 남보다 월급 많이 받는 거였고, 하라니 토 달지 않고 해야 하는 거였고. 생각해 보니 모두 과거 나잖아? 본성이나 본말을 마음에 품고도 발산하지 않는 모습이 그의 눈엔 ‘참아’로 보였으리.     




다시 말해 견디는 듯해 보였다는 것이겠다. ‘나’라는 존재가 빠지고 ‘업’이나 ‘기준’ 들어찼으니 그렇게 보일 수밖에.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해서 하는, 억지스러운 일로 하루 꽉 채워 사는 모습. 이것을 외국인인 그에게 들켰다. 삶이 원래 이런 것 아니냐고, 한국 군상에 섞여 있던 한국인 나도 인지하지 못했던 그것이 외국인인 남편 눈에 여실히 비취었나 보다. 여하튼 참는 게 많은 한국인이란다. 맞아맞아, 긍정의 끄덕임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어쩌다 한국은 ‘참아’의 민족이 된 걸까.     






나조차 난생 처음 화두에 올리는 질문. 도대체 그 이유가 뭘까. 생각의 끝에 이르러, 나는 ‘참아의 민족’이 된 원인을 두 가지라고 잠정 지을 수 있었는데, 하나는 강한 집단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가 정답과 오답을 정하고 이를 가르친 탓이었다.     




1) 강한 집단의식

2) 사회가 정한 인생 정답과 오답 중 정답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     




첫째, 강한 집단의식이다. 한국은 집단의식이 강하다. 역사상 개인보다 집단이 생존에 유리했고 때문에 살기 위해서라도 소속되고자 했다. <총균쇠>를 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를 지리적 이유로 해석한다. 오랫동안 쌀을 재배한 아시아와 밀을 재배한 유럽과 미국. 쌀과 밀이라는 작물은 재배 요건 각기 다르고, 이 행동 방식은 사회적 관습이 되어 사람들을 가르쳐 왔단다. 밀농사는 비를 통해 충분한 물을 얻을 수 있다. 따로 물을 댈 필요가 없어 혼자도 재배 가능하다. 즉, 이웃의 도움 없이 혼자 재배 가능한 개인주의적 농업이다.    



 

반대로 벼 농사를 지으려면 물을 잘 대야 하는데, 논에 물을 대는 건 혼자 할 수 없다. 온 마을이 협력해 관개 시설을 마련해 물을 대고, 씨를 뿌리고 모를 심고 수확할 수 있다. 지속해 협동해야 하므로 공동체 구성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협조를 거부하고 개인 행동하면 배척당하고 굶어 죽는다. 이 두 농업 방식이 관습으로까지 영향을 미쳤다. (EBS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중)     



EBS 위대한 수업



게다가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은 경제부흥을 위해 산업적 힘을 키우고자 했다. 거대 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고, 기업에서 일 할 ‘기업 맞춤형’ 인재 양성 교육을 했다. 개인적 특성에 집중하기보다 기업에 딱 맞는 존재로서 너나 내가 크게 다르지 않게. 그 덕에 한국 경제 강국에 드는 성과를 거두었다. 허나 지금에 와 남은 건 ‘참아.’ 집단에서 튀면 바로 아웃! 이는 “왜 나대”의 탄생 설화이기도 하다. 집단에 맞지 않는다며 나를 밀어 낼까봐 ‘나대지 않는다.’ 천연색 내 본연을 숨기고 집단이 만든 색깔에 애써 나를 맞춘다.      




둘째, 한국사회는 정답과 오답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몹시 이분법적으로. 다양한 답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이렇게 살면 옳은 삶 저렇게 살면 그른 삶이라 하는 눈치다. 그렇다면 정과 오의 기준은 어디서 왔는가. 바로 사회다. ‘정답’이 아닌 것은 전부 오답이라 한다. 그렇기에 오답이 되지 않으려 온 국민 기어코 정답에 놓이려 하는데. 그럼 정답은 무엇일까.     





공부 잘 해 좋은 대학에 가, 안정적이며 높은 연봉을 받는 그곳에 취업하는 것. 때문에 공부 잘 하면 칭찬을 받고 좋은 대학가면 엄친아, 엄친딸 소리를 듣고, 대기업 취업하면 선 보라는 연락이 끊이지 않는 것. 진짜 문제는 본인이 그것을 원한(했)다고 착각하는 것. 그러다 마흔이 넘은 나중에야 ‘이건 아닌데…’ 하고 격하게 앓기 시작한다는 것. 이제 막 자라는 아이들조차 사회가 정한 정답 과정을 그대로 보내고 있다는 것.     




작가인 나는 초등 저학년 대상으로 글쓰기도 가르치고 있으므로 아이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기는데, 때마다 돌아오는 답에 놀라곤 한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아이들에게 “너희는 공부 잘 해야 된다고 생각해?” 하면 95%의 아이 “네!”라고 우렁차게 대답하는 것과, “그래? 그럼 왜 그래야 하는 거 같아?”라고 되물었을 때 “그래야 좋은 대학교 가고 대기업 취업하잖아요!”라고 한 틈의 고민 없이 또박또박 말하는 것. 이제 초등 2학년, 3학년인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리 명랑하게 말 하는지 아주 놀라울 다름. 사회와 어른에 의해 상정된 동일한 미래-좋은 대학과 대기업 취업-를 두고 초등 시절을 보낸다는 호러 무비보다 더한 소름이다. 지금은 2023년이라고!     




'정(해진)답이라며 가르침 받는 아이, 여기 벗어나면 오(저런저런)답처리 하는 사회'




그래서 이 뭐가 문제인고, 집단의식을 갖고 정답에 맞춰 살면 안 되는 겁니까, 하고 묻는다면 ‘참으니까요’ 하고 말하련다. 당신은 참아서 행복하신가요, 하고 이어서 물으련다. 인생에 정말 정답이 있다고 믿느냐고도 스리슬쩍 물어보련다. 답이 정해진 사회에서는 ‘참는 게’ 유일한 방법. 그러니 한 번만 의심해 보자고. 과연 고유한 자신에게도 정답인가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정답이라 정한 그것에 나를 맞추기 위해 참을 일 무엇 있겠느냐고.     




‘참아’의 민족이 아닌, ‘행복’의 민족이 되기를 바라며 나부터 오늘은 참지 않기로 한다. 앞으로 남편 입에서 ‘참지 마세요’ 대신 ‘잘 했어요’ 소리 나올 때까지. 대신 정말 참아야 할 때를 위해 이 ‘참아’를 아껴두겠다.





위는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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