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지금에야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사실 하나. 사실 국제부부인 우리는 결혼하지 못할 빤했다. 그랬더라면 이 글을 쓰지 못 했을 것이고, 솔로였을 나는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문득 궁금).
여하튼 튀르키예 출신 훈과 한국 출신 나는 국제결혼에 이르지 못할 빤도 하였는데, 이는 부모의 반대 때문이었다. 이유는 역시나 다른 문화적 배경. 자라온 문화가 다른데 어찌 잘 맞추어 살겠느냐가 이유였으나, 결론은? 반대를 이기고 결혼해 잘만 사는 중.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국제결혼 말리던 부모를 뚫고 나갈 수 있던 것인가. 이를 말하기 위해 불가피 연애의 시작부터 이야기하는 수밖에.
X4배속
때는 20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월 초 어느 밤이었다. 서울 왕십리 소재 대학교 유학생 신분이던 훈과 나는 이태원 소재 모 펍에서 만나게 된다. 취한 나를 부축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이를 계기로 사귀기 시작. 그렇게 갓 구운 신선한 여친남친이 되는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리에게 남은 시간 약 2주. 훈이 본국으로 귀국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우리는 사귀게 되었기 때문이다. 쥐꼬리 같은 2주 남짓이었다. 결국 훈이 떠나야 하는 날이 온다. 울고 불다 콧물까지 질질 난다. 그런 나를 달래려는 훈 때문에 울다 웃어 덩구멍에 헤어가 나게도 된다.
울다 웃다, 그렇게 ‘내가 곧 튀르키예에 갈게!’ 하고는 인천공항에서 훈을 비행기 태워 보낸다. 집에 가려다 공항 모니터에 ‘중국에 심상치 않은 바이러스가 돌기 시작했다’라는 뉴스가 뜬 것을 발견한다. 아, 그런가 보네. 무심하게 집에 돌아와 훈을 만나러 갈 날만 꼽으며 매일 들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가 터졌다. 중국 우한에서 발발한 그것이 한국으로도 전파, 전 세계를 덮침. 전 세계는 외부의 출입을 막기 시작했다. 덕분에 튀르키예 가려던 계획 전부 무산, 그때 공항 모니터를 부수지 못한 나를 원망. 불가피 영상통화로 사랑을 연장하는 시간을 장장 6개월에 걸쳐 행한다. 만날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시간이 이어진다.
한국시간 새벽 3시, 튀르키예 시간 밤 9시까지 영상통화하며 매일 그곳과 이곳의 바이러스 상황을 보고한다. 감소세라는 뉴스에 희망을 갖다가 다시 증가세라는 기사에 풀이 죽다, 신약 개발에 박차 가하는 중이라는 뉴스에 기운을 냈다가 개발까지 1년은 더 걸릴 거라는 기사에 바이러스를 박살내고 싶다가. 그런 날이 켜켜이 쌓여 어느 날은 <사랑의 불시착> 북한군 현빈과 사랑에 빠진 손예진(하필 나도 ‘손’씨임) 심정을 절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다 일어나 가슴을 퍽퍽 치는 일마저 생긴다. 그러다 이 상태론 도저히 1년 내 훈과 만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선 순간, 당시 유일하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할 수 있던 자격 하나를 쟁취하기로 한다.
F-6 결혼 비자 취득
그러나 우리 둘 결심에 태클이라도 걸 듯, 커다란 복병 하나가 튀어나왔으니. 다름 아닌 시아빠 반대. 문화 차이가 그 이유였다. 외모부터 내면까지 뼛속 깊이 다른 두 사람이 한 집 생활 하면, 불화가 끊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다행인지 종교 없음을 이유로 반대하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튀르키예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다. 시아빠 또한 무슬림이지만 쩔게 신실한 종교인은 아니라 그러지 않았나 싶다. 종교는 결혼 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아니라 판단하신 듯하다).
그럼 시아빠 반대에 우리 둘은 어떻게 반응했느냐?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부모 말 잘 따르는 부류와 아닌 것은 강하게 거스르는 부류. 그리고 훈과 나는 후자형 인간. 고분고분 “네”하지 않는다. 엄마아빠 판단이 항상 옳다 생각하지 않고, 그것은 엄마아빠도 자신이 해본 한정적 경험과 학습에 기댈 수밖에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결론적으로 나는 ‘나’임을 천명하며 살아 온 둘이라. 부모에겐 답답한 일 일 수 있지만 우리는 저항으로 밀고 나갔다. 결국엔 행복하게 사는 우리가 부모의 행복이 되어줄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
게다가 영리한 자식은 부모가 언젠가 져줄 것을 안다. ‘내가 어쩌겠니’ 하며 응원해 줄 것을 너무도 잘 안다. 부모의 반대 또한 그저 내 자식 행복을 바라며 했던 거였으니까. 둘이 행복하다면 얼마든 오케이인 것이다.
그렇게 훈은 “네”하지 않고 아빠 설득에 목청을 높였단다. 이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결혼은 문화 차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 본질의 문제라고. 그러니 시아빠, 쉽사리 “그러렴” 할쏘냐. 결론적으로 말하면 훈의 설득에 시아빠 완전히 납득한 채로 결혼할 수 있지는 않았다. 우리의 완고한 사랑이 그를 무력화한 것. 그뿐이었다. 후에 훈은 시아빠 있는 자리에서 회상하듯 말했다.
“그때 아빠랑 나랑 얼마나 다퉜는지 알아요? 하마처럼 싸웠어요."
"아빠가 소리 지르면 나도 큰 소리로 따졌어요. 자기야가 옆에 있었으면 무서워서 눈물 났을 걸?”
“하하하(뻘쭘한 시아빠).”
껄껄. 지금에 와 시아빠까지 우리 셋 모두 웃으며 말할 수 있어 다행일 뿐이다. 시간과, 며느리로서 나에 대한 체험이 과거를 웃어넘길 스토리로 만들었다. 지금은 이런 상황마저 연출되고 있다.
훈의 형이자 나의 시아주버님은 ‘나는 솔로’. 튀르키예는 한국보다 혼기가 이른 편(남자는 20대 후반 전엔 거의 다 결혼에 이른 편이고 여자는 20대 초반에도 꽤 많이 결혼한다. 예로 훈은 한국나이 28살인데 친한 친구 모두 결혼 했고 심지어 부모가 되기도 했다. 이스탄불이나 앙카라 등 도심에 살수록 혼기가 늦어지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에 비하면 훨씬 빠르다. 그리고 거의 대다수가 결혼을 한다. 비혼 주의는 극히 드물어 보인다)임에도 서른이 된 그는 여전히 솔로. 궁둥이를 팡팡 내리 때려서라도 출가시키고 싶은 시아빠인지, 때로 시아주버님에게 말하곤 한다.
“아들, 한국 여자랑 결혼은 어떠냐. 난 대찬성이다.”
솔직히 ‘대찬성’은 내가 지어낸 말이긴 하지만. 하하. 여하튼 국제결혼 문화 차에 대한 편견을 깨고, 게다가 한국 여성에 대한 아름다운 선입견까지 만들었으니.
우리가 이룩한 국제적 결혼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을쏘냐.
*슬로건 : 결혼은 문화 차이가 아닌, 사람 ‘본질’의 문제입니다
위는 네이버 연재 중인 글로, 원본에 해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