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국제 결혼한 부부 중 우리 집만 이랬던 것인가.
결혼 초기, 나의 외국인 남편 ‘훈’은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다. 불안으로 식은 땀 뻘뻘 흘리며 몸을 부르르 떨던 훈. 그를 볼 때, 나는 불안이 인간의 온 정신을 덮쳤을 때 내는 몸의 소리를 볼 수 있었다. 뭐가 그리 매섭고 추운지, 파르르 떨다 진정 잠시 멈추고 다시 파르르르 떨기를. 정신은 몸을 지배하고 지배받은 몸은 정신을 그대로 표출한다. 생(生)의 한파를 홀로 다 맞고 있던 훈이었다. 그 옆에 누워 ‘이곳은 안전하다’고, ‘무엇보다 네 옆엔 내가 있다’고, 가슴으로 전해지길 바라며 그를 꼬옥 끌어안은 채 밤을 지키던 날이 있었다. 언감생심. 감히 그의 불안은 헤아리지 못한 채. 아니, 헤아렸더라면 둘 다 부르부르 떨다 변을 맞이했으려나.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해 집에 가니 훈이 가슴 통증을 호소한다. 투명한 손이 자기 가슴을 쥐어짜는 듯 하다며, 그 손을 거두고 싶던지 뭉개듯 자기 오른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며 한참을 쓸어내린다.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쾅쾅 치다가 다시 매만지다가 가슴이 너무 아프다 말한다. 우왕좌왕 날 뛰는 내 옆에 다 쓰러져가는 훈이 있다. 응급실에 가지 않고는 내가 더 해줄 일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진다. 불규칙한 들숨과 날숨, ‘흐-히-흐-히-’ 하며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던 훈은 이내 쓰려지기 일보 직전까지 온다.
(그 순간에도 건강보험 등록 안 되어 있는-그만큼 결혼 극초기-상황에, 외국인에게 물릴 병원비를 빠르게 계산도 했다. 결론적으로 병원 응급실에선 온갖 검사 비용 포함 100만원을 청구했다. 하하)
“맞아요. 그때 그랬죠? 정말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에 와 다 추억이 되었지만요(웃음).”
그렇다. 훈은 낯설고 이질적인 한국 (심지어 결혼)생활에 극도의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마음의 질병이라고 하지. 드문드문 “혼자인 듯하다”라는 말을 했던 훈. 외로운 타지생활에 마음 한편 병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자국에서 타국으로 생 전체를 옮겨 온다는 것은 그런 일이다. 낯섦, 미지, 모르므로 통제할 수 없음, 통제할 수 없음에 따르는 무력감. 극한의 불안. 그러나 생존하기.
훈은 6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한국 모 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이 좋아서라거나 한국에 살 목적을 뜻하진 않았다. 한국 생활, 어떤 계획도 없이 오직 결혼을 위해 다시 온 것. 하물며 아시는 분은 아실 테지만, 우리는 급진적으로 결혼한 케이스. 바이러스로 인해 어제까지 영상통화로 사랑을 연명하던 우리가 만날 유일한 방법은 F-6비자였다. 이것은 자국민과 결혼한 상대국 배우자에게 내어주는 결혼 비자다. 그렇게 졸지에, 어제까지 남자친구 신분이던 그가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 가장이 되었다. 하물며 직업도, 앞으로 미래도, 코로나에 가려져 알 수 없던 상황에. 여러모로 불안이 찾아올 수밖에는 없었다. 지금에야 우리 가족 역사로 자리 잡은 하나의 웃프닝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3년이 흘러 다시 한 번 훈은 한국에서의 작은 언덕을 지나고 있다.
대학원 졸업 앞두고 훈은 취업 준비에 바쁘다. 개중엔 한국 회사도 취업 대상에 있다. 물론 우리는 국제 부부라, 한국을 유일한 거처로 삼지는 않는다. 다양한 나라에서 다양한 삶을 경험하며 살 준비가 언제든 되어 있지만 허나 그의 장모인 나의 엄마 애원-“그래도 한국에서 살아야지(살았으면 좋겠어 제발!)”-에 부단히 한국 회사도 지원 중.
그러나 환대받지 못하는 외국인. 이력서 넣고 회신만 기다리며, 훈은 여실히 느낀다 말한다. 한국은 자신에 기회주지 않는단다. 십중 십이 봤을 때, 그의 스펙 면면은 서류전형쯤 눈 가리고 통과인 것을. 학점 4.5/4.5, 연구 및 쓴 논문 이력, 빵빵한 개인 프로젝트 포트폴리오, 900점 가가까운 토익에/토플 점수, 영어로 대화 쌉가능, 높은 한국어 수준, 우수 학생으로 선정되어 받은 장학금 수료 이력, … (고슴도치맘 같아 이만).
그러나 번번이 인터뷰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까닭에 저 나름 상심하는 중. 아무리 봐도 자신은 외국인이라는 것과 그 중에도 튀르키예에서 왔다는 두 잘못 밖에는 없다 한다. 해서, 때로 자신이 미국이나 유럽에서 왔더라면 어땠을까를 잠시 생각해 보기도 한다. 능력으로 검증 받기도 전, 선입견에 의한 평가부터 하는 한국 사회와 현실. 선입견으로 걸러진 우리 집 외국인. 기껏 적응했더니 다시 맞이한 한국 생활 고비시겠다.
그러나 한껏 풀 죽은 훈에게, 그의 어깨 주무르며 나는 말한다.
“괜찮아, 그까짓 거. 한국 아니면 어때! 여기가 유일한 답도 아니고.
유능한 외국인 인재를 놓친 거야. 나는 알아. 나는 네 능력을 매일 보고 느끼고 있으니까.”
축 내려갔던 훈의 어깨가 기운을 차려 봉긋 올라간다. 그렇게 털고 다시 취업을 향해 나아간다.
이 또한 지나가 줄 것을 안다. 3년도 훨씬 전, 훈이 그의 온 정신에 침투한 불안에 파르르 떨 때. 가시지 않을 것만 같은 불안, 한국이라는 낯선 땅에 어디서부터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그도, 하물며 한국인인 나조차 외국인 남편에게 길을 안내할 수 없을 때. 나는 두 팔 감아 훈을 꼭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취업 고비를 넘을 때도. 그의 넓은 어깨를 나의 작은 두 손으로 쪼몰랑 대며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국제 부부라 겪는 스페셜 한 상황, 모두 지나갈 거야. 순간에 불과하지.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그러니 불안해 할 거 없어. 너에겐 내가 있잖아. 우리 둘이잖아. 네가 어떤 언덕에 있든 나는 너를 떠나지 않아. 가족이니까.’
둘 뿐인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비록 우리는 딩크, 아이 없이도 우리 둘 행복하게 잘만 사세 족에 속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2인 가족으로 연대한다. 그리고 가족이란 역사를 공유한 사람 집단. 역사에 함께 쓰여 길이길이 기록 될 사람들.
우리가 결혼 한 2020년 6월부터, 나는 훈과 역사를 함께 쓰고 있다. 그 과정에는 너의 파르르한 너의 떨림과 불안, 취업이라는 한 고비, 나에 의해 벌어진 수없는 변기 막힘, 그리고 그걸 묵묵히 뚫어주는 너. 너의 청룡 불꽃 쇼 같은 트림, 나의 뽁뽁이 같은 방구 소리.
그래서 가족은 위대해. 비록 둘이라도, 연대할 국제적 당신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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