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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은경 Sep 24. 2020

머리가 자란다.


5년 이상을 긴 생머리로 살았다.

조금 자라면 다시 조금 자르고, 조금 더 자라면 그래도 조금 자르고. 5년을 반복하던 나는, 헤어 스타일에 있어선 보수였다.


"머리 좀 잘라! 치렁치렁 지저분해 보이잖아."

"아 알겠어. 함 보고."


엄마는 보는 날마다 제안했다. 돈 쥐어 줄테니 가서 머리를 자르고 오너라. 깔끔하니 얼마나 예쁘겠니. 우리 딸 예쁜 얼굴 머리카락이 다 가리고 있네. 아님 가서 염색이라도 해 와라. 착하지 우리 딸. 엄마와의 실랑이도 5년을 이어갔다.


긴 생머리는 어쩐지 아쉬운 외모에 뿌리는 한 방울 췜기름이었다. 왼쪽 귀 뒤로 살짝 넘긴 머리 반면 자연스레 흘러내리는 오른 긴 머리. 이따금 쓸어 올리는 머리 한 번이 나의 풍미를 돋구워 주었다. 긴 머리가 좋았던 건 한껏 높이 올려 묶기도 쉬워서였다. 양 손 이용해 두어번의 손질이면 짜잔 포니테일이 완성 되는데, 머리끈으로 돌돌 쫑가맸을 때 드러나는 훤한 목선이 그렇게 시원해 보일 수 없다. 비 오는 날, 마음 뿐 아니라 머리까지 축축 늘어지면 올려 묶은 머리가 기분마저 환하게 만든다. 엄마도 묶음 머리는 좋아해 질끈 묶어멘 날이면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머리를 잘랐다.

어림잡아 20cm는 되지 않았을까.


"원장님!이렇게 잘라 주세요. 펌이랑 염색도 같이요!"


원장에게 제공한 사진


어느 거울 앞의 날. 쌔카만 긴 머리의 나는 우중충 그 자체였다. 요리조리 들쳐 보아도 나아질 기미는 없었다. 긴 생머리빨도 연식을 다 한거다. 그때로 크나 큰 결심을 하게 된다. 헤어 스타일에 변화를 줘야겠구나. 엄마의 소원에도 수년을 버텼던 건 충동적 커트로 다음 날 회사 가기 싫어질까 겁이 나 그랬다. 후회 한들 지금의 복구까지 인내해야 할 몇 년도 아찔했다. 모든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르기로 한 날. 어쩌면 단발이 더 잘 어울릴지 모른다고, 시도해 보지 않아 몰랐을 뿐이라는 생각에 단발머리 연예인 사진을 들고 미용실에 갔다. 그리고 싹둑. 가위질은 아주 심플했고, 대번에 분신 절반이 잘려 나갔. 황망하다. 단발이 이렇게 쉬운 거 였어?


밀과 보리가 자라듯 머리도 자란다.

속옷 라인을 스치던 그때만큼 기르기엔 더 많은 야한 생각과 시간이 필요하지만,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깨 밑으로 자란 머리에 새로운 놀라움이다. 그 사이 5cm는 자랐나 보다. 마의 구간, 잘 견뎠구나 싶다. 허나 모르는 일이다. 짧은 머리도 썩 나쁘지 않다는 것과 머리 감기 훨씬 수월하다는 이점으로 불쑥 "원장님! 다시 잘라주세요." 할지.


농부가 씨를 뿌려 흙으로 덮은 후 발로 밟고 손뼉 치고 사방 둘러보는 새 밀과 보리가 자라듯

신경 못 써준 사이 너도 열심히도 자랐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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