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32, 33, 34회 포함
미친년, 열등감 덩어리, 애정결핍, 자존감 바닥, 정신병자,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나의 편. 엄마 친구의 딸. 아는 언니. 선생님.
그곳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여느 봄비 같은 포근하고 산뜻한 느낌의 비가 아닌 왠지 후줄근하고 축축한 기분이 드는 비였다. 차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을 보면서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읍내로 나가는 길에서 엄마는 그저 묵묵히 핸들만 잡고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어둑해지는 흐린 날의 바깥 풍경을 보며 나 역시 엄마와의 어색한 대화보다는 조용한 침묵을 택했다. 서울에서 도망쳐 내려온 후 엄마는 내게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당연했다. 당연히 우린 괜찮지 않을 것이었다. 단지 그 순간 곁에 무사히 있는 것만으로, 서로의 아픔을 침묵한 채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엄마와 나는 그저 슬픔을 대면할 뿐이었다.
그런 내가 다시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실 그건 꽤나 용기 내야 하는 일이었다. 이미 무기력해진 엄마에게 내 희망을 전한들 엄마가 받아들일 수나 있을까. 무시당하는 건 아닐까. 혹여나 핀잔이라도 듣지는 않을까. 하지만, 아빠를 잃은 절망에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했던 엄마는 언뜻 내게 무심한 듯도 보였지만, 공부를 해야겠노라는 내 말에는 의외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문득 눈을 떠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부스스 일어나 어딘가로 전화해 평소의 그 밝고 씩씩한 목소리로 휴대폰 너머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고 약속을 잡는 것이다.
방에서 앓고만 있던 사람 같지 않게 그날 엄마는 평소 즐겨 입던 명품 옷을 차려입고 오랜만에 화장도 예쁘게 했다. 그런 엄마를 보며, 곧 만나게 될 사람이 누구일지 무척이나 궁금해 어쩐지 설레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게 공부를 가르쳐 줄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일 텐데, 엄마가 저렇게 단장하고 만나는 사람이라면 분명 서울에서 수업했던 선생님처럼 똑똑하고 교양 있는 멋진 사람일 테지.
차는 읍내로 진입해 곧 주택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들어섰다. 서로 옆으로 비키면 차 2대가 넉넉히 지나갈 골목 양측으로 단층집과 이층집, 오래됐지만 아늑해 보이는 기와집, 옥상에 매달아 놓은 빨랫줄이 비바람에 출렁이던 양옥집, 반들반들하게 코팅된 빨간 벽돌로 담을 올린 멋진 집, 베이지색과 연녹색 페인트를 칠한 아담한 집 등 갖가지 모양을 이룬 집들이 차창 밖으로 연이어 지나갔다. 이따금 길 한쪽에 주차된 차들을 비껴가느라 잠시 속도가 느려질 때면 담 너머 불 켜진 집안 풍경이 흘깃 보이기도 했다.
이윽고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좁은 골목을 지나자 곧 어느 세련돼 보이는 2층짜리 주택 앞 공터에 멈춰 섰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린 엄마가 우산을 펼쳐 들고 뒷자리 문을 열어줬다. 우산에 의지해 흐리멍덩하게 내리는 빗속에 선 엄마와 나는 곧 초인종을 눌렀다.
때깔 좋은 빨간 벽돌로 외벽을 올린 그 집은, 좁은 골목 끝에 자리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고운 잔디가 예쁘게 깔린 제법 넓은 마당이 철제 대문 사이로 엿보였고, 공들여 조각한 듯 보이는 화강암 장식이 계단과 난간을 화려하게 이루고 있었다.
곧 담 위로 세워놓은 뾰족한 살들 사이로 누군가가 받쳐 든 우산 끄트머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잠시 뒤, 웬 천박하게 예쁜 어느 아주머니가 활짝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아줬다.
“갑자기 시간 내 줘서 고마워, 언니”
이모가 내어 오신 원두커피를 한 모금 마신 엄마가 탁자에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유, 오랜만에 우리 정미가 보자 카는데 가게가 문제가! 오늘은 쫌 늦게 출근하지 뭐, 헤헤헤”
이모가 움직일 때마다 원두커피보다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주로 밤에 일하는 화류계라는 직업군이 있다는 걸 초등학생이 알 턱이 있었을까. 그럼에도 그 이모의 출근이라는 게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 수 있었던 건, 다들 퇴근하기 바쁜 저녁 시간에 출근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엄마의 차림과는 판이한, 파란색과 빨간색을 진하게 칠한 짙은 화장은 어째 부담스러워 보이기까지 했고, 속옷이 보이진 않을까 우려될 정도로 짧은 검은색 원피스는 촘촘히 붙어있는 반짝이들이 그 어두운 바탕 위에서 더욱 빛나며 지나치게 화려해 보였다. 엄마보다 1~2살 정도 많아 보이는 그 이모는 분명 늘씬하고 예뻤다. 그런데 그 예쁨이라는 게 어린 내가 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천박하고 이질적인, 거부감마저 드는 예쁨이었다.
“언니 요즘 잘 지낸다고 은경 언니한테서 들었어, 사업도 잘되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고향 사람들과 얘기할 땐 익숙한 사투리로 말하던 엄마는 어째선지 그 이모와 얘기할 때는 굳이 서울말을 썼다.
“어머! 하하하, 가아가 그래 말하드나? 하이고 그 가시나! 몬 하는 말이 없노, 일 때메 만나는 기다, 일 때메, 헤헤헤”
이상하게도 이모는 아까부터 조금 표정과 언성이 과장돼 보이는 것 같았다.
“좋아 보인다, 언니”
엄마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이모는 손사래 치며,
“아이라, 내 요즘, 그냥 소소하게 돈 벌면서 산다, 헤헤, 니는 잘 지냈나? 요새 어찌 지냈노?”
“다 알면서 뭘 물어 언니, 후후, 언니도 다 들었을 거 아냐, 나 왜 내려왔는지”
그러니 조금 당황했는지 이모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아, 아아! 그.. 그렇제, 요새 많이 힘들제? 갑자기 그래 되가 우짜겠노”
“이주, 나중에 대학은 보낼 거지?”
엄마가 이모의 말을 끊은 듯 보였다.
“어? 대학? 갑자기 그기 무슨 말이고?”
별안간 뜬금없는 질문에 이모는 영문을 몰라 당황한 것 같았다.
“지금 중학생이지? 몇 학년이야? 언니도 공부는 참 잘했는데, 피는 못 속여 정말, 후후후”
그런 이모의 반응은 아랑곳 않고 자기 할 말만 이어가는 엄마는 그 순간 조금 능글맞아 보이기도 했다.
“흥, 고년 대학은 뭐, 지가 알아서 가든지 해야지 내가 돈을 와 대 주노? 근데 그건 와 묻는데에?”
엄마는 후훗하며 코웃음치고는 거실 한쪽으로 이어진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위를 올려다봤다.
“이주야! 마침 있었네? 다리 다 보여어, 후후, 내려와서 이모한테 인사해야지?”
이 상황이 조금 재미있어진 나는 얼른 엄마를 따라 계단 위로 시선을 올렸다.
곧, 교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어느 이쁘장한 언니가 수줍은 듯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내가 저년 저거 키운다꼬 돈을 을매나 많이 썼는지 모른다, 좋은 거만 해서 멕여, 비싼 옷만 사 입혀, 집도 이레 좋은 데서 살게 해주제, 그라니까네 쟈아가 그래 공부를 잘하는 기다 아이가”
2층에 있는 언니 방까지 들으라는 듯 이모는 굳이 큰 소리로 떠드는 것 같았다.
‘씨발년’
내가 들을 거라 생각 못 했는지 아니면 듣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혼잣말로 작게 읊조리는 언니의 욕설은 책상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내게 들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언니는 아무 일 없었던 듯 나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몇 학년이니?”
“열두 살이에요”
내게 공부를 가르쳐 줄 사람이 아니었다면 5학년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학년이 교과의 진행 정도를 말하는 거라면 솔직히 나는 몇 학년인지 모르겠다.
“열두 살이면, 오 학년이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오 학년이면 흠... 혼합계산 할 땐가? 그럼 이 문제 한번 풀어볼래?”
라며 언니는 볼펜으로 연습장 한쪽에 수학 문제 하나를 끄적였다.
언니는 나에 관한 얘기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언니가 내준 문제는 요즘 반 애들이 배우는, 내게는 한참 낮은 수준의 문제였다.
대충 암산으로 답을 적었다. 그러니 언니는 조금 놀란 듯,
“와아, 잘하네, 암산으로 푼 거니?”
그제야 뭔가 언니의 말투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골에 내려온 지 일주일을 조금 넘긴 그날, 그동안 사람들에게서 사투리만 들어온 나는 그 낯선 억양도 어느 정도는 익숙해진 터였다. 그런데 언니의 말투는 그 억양이 왜인지 사투리와 서울말이 섞인 것 같았다. 마치 사투리만 써왔던 사람이 억지로 서울말을 흉내 내는 것 같은.
“저, 국어 수학은 중학교 일 학년까지 마쳤어요”
그러니 놀란 듯 언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어? 진짜가?”
놀라니 자기도 모르게 사투리가 튀어나온 듯했다.
“아, 아.. 정말이니?”
다시 그 어색한 말투로 고쳐 묻는 것이다. 왜 저러는 걸까.
나는 별로 시답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나를 보던 언니의 눈빛이 일순간 변했다. 처음에는 무언가 흥미로운 것을 보는 듯 호기심 어린 표정이었다가, 이내 그윽하고 깊어진 눈빛으로 나를 뚫어질 듯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는 그 눈빛의 의미를 몰랐다. 그저 공부 잘하는 어린 천재를 마주한 시골 사람의 조금 유별난 반응일 뿐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그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나를 보던 언니는 이내 고개를 돌려 책상 책꽂이에 꽂혀있는 문제집들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왠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것이다.
“혹시, 오렌지 주스 안 좋아하니?”
갑자기 무슨 말이지?
“네? 음... 오렌지 주스, 싫어하진 않는데요”
그러니 뒤적거리던 문제집 중 하나를 뽑아 책상에 내려놓은 언니가 어째선지 조금 격앙된 듯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겠지, 서울에서 고급 주스만 먹다가 시골 싸구려 주스 먹으려니 입맛에 맞을까”
뭐지? 혹시 아까 이모가 내어주신 주스를 안 먹고 있던 것 때문에 그러는 건가? 아니, 그렇다고 비아냥댈 건 뭐야.
“배불러서 안 먹은 건데”
음식을 먹기가 힘들다는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언니는 흠칫 나를 돌아보더니, 어색한 표정으로 얼른 웃어 보였다.
“아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고, 서울에는 진짜 오렌지즙으로만 짜낸 주스가 있다고 들었거든, 헤헤, 너는 서울에서 살았으니까 그런 것만 먹었을 것 같아서, 헤헤헤”
자기도 모르게 비아냥댔던 걸 허술한 변명으로 무마하려는 모습이 조금 비굴해 보이기도 했다.
빗줄기가 조금 옅어져 있었다. 차창으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아까보다 작지만 더 촘촘하게 맺혀 흘렀다. 밤이 깊을수록 더욱 반짝이는 거리의 네온사인 불빛이, 아까 뵈었던 이모의 짙은 화장처럼 파란색과 빨간색 그리고 이따금 어색한 초록색 불빛들로 창에 맺힌 빗방울들을 심란하게도 물들였다.
“그 이모 어땠어?”
묵묵히 운전만 하던 엄마가 별안간 묻는 것이다. 어땠냐니. 뭐가 어땠냐고 묻는 걸까. 지나치게 화려해서 거북스럽기까지 한 그 천박한 차림새를 묻는 걸까, 아니면 얼마나 인정이 없으면 자기 자식마저 업신여기는 각박하고 매정한 성질머리를 묻는 걸까.
그런데, 오늘 읍내로 나오면서도 엄마와 나는 서로 말 한마디 하지 않았건만, 그 무언의 합의를 깨고 갑자기 엄마가 말을 건넬 줄은 몰랐다. 아니 그것보다, 엄마와 대화를 하는 게 얼마 만인지, 그 일이 있은 후 지금까지 엄마와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었던 나는 왠지 이 상황이 낯설기까지 했다.
뭐라고 답할지 몰라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박했어”
이렇게 쉽게 그 방에서 나올 수 있었으면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넬 수도 있었으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무력하게 앓고만 있었던 건지. 엄마가 조금은 밉고 원망스러워 그만 심술궂게 대답해 버렸다.
그런데 엄마는,
“푸흡, 하하...”
어째선지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우리 딸, 역시 똑똑하네...”
의외의 반응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다. 조금 아쉬웠던 나는 운전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앓기 시작했다.
31. 불쌍한 언니의 단점
TV에서만 보던 서울 여자. 단아하지만 품격 있는 차림새와 세련된 화장, 여유롭고 교양 있는 말솜씨, 그리고 웃을 때 더욱 빛나는 그 자애로운 눈빛. 좋은 직장에 다니는 성공한 서울 여성. 예전에 봤던 모습 그대로 그 여자는 변함없이 근사하고 기품 있었다. 그를 이모라고 부를 수 있는 거야말로 보잘것없는 내 인생에 어쩌면 그나마 가치 있는 일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엄마에게서 태어난 네가, 다듬어진 꽃처럼 머릿결부터 손가락 끝까지도 우아스럽기 그지없는 네가, 더구나 머리까지 좋은 천재라니. 유복한 환경에서 충만한 사랑 받으며 좋은 교육 받았으니 당연한 거겠지. 그런데 나도 너처럼 태어났으면 너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예뻤을 거야.
정말 자기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이주 언니는 과외는커녕 학원 한번 다닌 적 없으면서도 학년에서 1, 2등을 다툴 만큼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돈 버는 것만을 세상 제일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모로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학업에 관한 어떠한 지원도 받을 수 없을 거란 걸 언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날 우리 엄마를 맞이하기 위해 굳이 차려입은 단정한 교복은 언니의 절박함이었을 것이다.
그런 언니에게 엄마의 제안은 꿈 같은 일이었을 테지.
여성의 사회 진출이 결코 순탄치 않았던 시절,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일찍이 사회로 뛰어들어 그 불공정한 경쟁에서도 버텨내 대기업의 과장 자리에까지 오른 엄마는, 그간 질리도록 겪었던 온갖 인간군상의 수만큼이나 사람을 꿰뚫어 보는 눈이 제법 있었다. 그러니 이주 언니의 그 뒤틀린 성격도 엄마가 아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언니에게 실낱같은 여지라도 남겨주고 싶었던 걸까.
수업료는 전부 이모가 가져갔다. 이쁘고 똑똑한 딸을 가졌으면서도 귀하게 여길 줄 모르는 이모가 그동안 키워준 값이라며 언니가 받은 돈을 전부 뺏어간 것이다. 하지만 이모가 그럴 줄을 이미 예상했던 엄마는, 일반적인 과외 수업료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금액을 수업료로 지불하는 대신 언니에게 제안했다. 언니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면 학교 등록금을 지원해 주겠다는. 단, 그만큼 내 학업에도 성과가 있어야겠지.
언니는 필사적이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친모 밑에서 그야말로 세상 혼자인 언니는 유일하게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무기를 필사적으로 갈았다. 그런 면에서 언니와 나는 꽤 닮은 면이 있었다. 시골을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하는 언니와 그런 언니로부터 필사적으로 습득하려는 나는, 그 닮은 면 덕분에 학업에 있어서는 꽤 궁합이 잘 맞았다.
하지만, 공부를 잘했던 이모의 장점을 닮은 것만큼 이주 언니는 이모의 치명적인 단점 또한 물려받았다.
“야, 씨발년들아! 조용히 좀 해, 수업하잖아!”
벌컥 방문을 연 이주 언니가 1층으로 버럭 소리치니 시시덕거리던 소리가 잠시 멈췄다.
‘야, 김이주 화났다 ㅋㅋ’
‘벨로 안 시끄러운데 지랄이고’
‘지 공부 잘 한다꼬 유난 떠는 거다 아이가 ㅋㅋ’
문을 닫고 다시 의자에 앉은 언니가 내게 싱긋 웃어 보였다.
“미안, 시끄러웠지? 저 썅년들 또 떠들면 내가 조용히 시킬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 헤헤”
그리곤 문제집을 한 번 고쳐 펴고는 다시 수업을 이어갔다.
이모가 출근하고 나면 가끔 언니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저녁이 되기 전에 일찍 출근하시는 이모는 처음 언니를 보러 간 날 이후 거의 뵌 적이 없지만, 이주 언니의 친구라는 언니들과 오빠들은 종종 보곤 했다. 그들에게선 코를 찌르는 무스 냄새와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고, 그 사이를 비집고 꼬질꼬질한 담배 냄새가 찔끔씩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 언니는 담배 냄새를 덮으려 코가 얼얼할 정도로 향수를 잔뜩 뿌린 것 같았다.
나는 딱히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1층에서 떠들더라도 공부에 방해가 될 정도도 아니었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시끄러울 것 같으면 굳이 나서서 욕지거리까지 해대는 언니가 더 성가실 정도였다. 담배 냄새가 나면 이모가 알아챌 것이기에 그들은 집안에서는 담배를 피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저 거실 소파에 앉거나 누운 채로 시답잖게 시시덕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도대체, 그렇게 실없이 노닥거리는 게 뭐가 좋아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나는 수업이 끝나고 그 집을 나갈 때만 힐끔 볼 뿐이라 그들과 대면할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내게 인사라도 할라치면 이주 언니는 어째선지 지나칠 정도로 그들과 나 사이를 막아서곤 했는데, 어떨 때는 마치 미친년이 발광하듯 펄펄 뛰기도 하는 것이다.
“아! 씨발! 애한테 말 걸지 말라고!”
이주 언니가 현관으로 향하던 내 옆을 막아서며 매서운 기세로 쏘았다.
“아 ㅋㅋㅋ, 저년 저거 또 발광한다”
“미친년, 니 딸래미라도 되나? ㅋㅋ”
다른 언니 오빠들이 이주 언니를 놀리며 한마디씩 거드는 사이, 소파 팔걸이에 걸 터 엎드린 채 내게 말을 걸었던 언니가 억울한 듯 대꾸했다.
“아 진짜 봤다고오! 야아 남자친구랑 같이 손 잡고 가더라니까!”
그러니 이주 언니는 어째 조금 섬뜩해 보이는 표정으로 잠깐 나를 돌아보더니, 다시 그 언니를 보며 아주 어이가 없다는 듯,
“지랄하지 마 씨발년아! 얘는 그런 애 아이라! 어디서 잘못 봐가지고 아아한테 이상한 소리 하고 있노”
“야야, 쟤 또 사투리 나왔다 ㅋㅋㅋ”
“니가 서울말 쓴다고 서울 사람 되는 줄 아나 미친년아! ㅋㅋ”
횟수로 10년을 살아오며 접했던 욕보다, 아마 언니와 공부하기 시작한 그해에 언니와 그 친구들을 통해 들은 욕이 제일 많았을 것이다. 그게 이모로부터 물려받은 이주 언니의 단점 중 하나였다. 아무리 겉모습이 이쁘다 한들, 아무리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한다 한들 그 천박한 행태는 어린애가 보기에도 그저 한심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언니는 왜 그런 친구들과 사귀었던 걸까. 아니, 그건 전제부터가 잘못됐다. 언니가 바로 그런 인간이기에 비슷한 친구들과 사귀었던 것이다. 언니는 참, 그 싫어하는 자기 엄마와 너무나도 닮은 구석이 많았다.
“안녕하세요 이모, 오늘도 수업 잘했어요, 이모를 닮아서 그런지 어쩜 이리 똑똑한지 몰라요, 헤헤헤”
꽤 길어진 해가 아직 저 멀리 산언저리에 걸 터 있을 때, 대문 밖까지 나를 배웅한 언니가 운전석에서 내린 엄마에게 꾸벅 인사했다.
엄마가 언니 집까지 나를 태워주면 언니는 내가 도착할 시간보다 항상 먼저 나와 나를 마중했고, 수업이 끝날 때도 항상 대문 밖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런데 언니는 이상하리만치 인사성이 밝았다. 누군가를 만나면 당연히 인사하는 거겠지만 보통은 2시간 뒤에 다시 만날 사람에게까지 굳이 안녕히가세요라고 작별 인사를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나를 데리러 온 엄마에게 마치 그날 처음 만난 것처럼 매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그게 엄마에게만 그러는 건지 확실치는 않지만, 분명한 건 이주 언니의 그런 모습은 아무래도 일반적이지는 않은 것이었다.
“친구들 집에 와 있나 보네? 우리 애 공부하는 데 시끄럽진 않았는지 모르겠구나”
예정보다 조금 일찍 와서 기다리던 엄마가 집안에서 언니와 언니의 친구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은 거겠지.
언니는 얼른, 전혀 그렇지 않다며 양손을 크게 흔들었다.
“아! 아니에요 이모, 쟤들은 그냥...........”
무척 당황해하는 언니를 보니 또 성가신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 시끄러웠어 엄마, 언니 친구들 되게 착해”
언니를 거들었지만, 딱히 편을 든 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엄마에게 허둥대며 부정하는 언니가 그냥 짠해 보이기도 했고, 저번에 엄마에게 조금 꾸지람 들은 언니가 잔뜩 풀 죽어있던 모습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다음 수업 때 또 내 눈치를 보며, 혹시 엄마가 자기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엄마가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은지 등을 물어보다가, 끝내는 엄마에게 얘기 좀 잘해 달라는 쓸데없는 부탁을 하며 공부를 방해할지도 몰랐다.
엄마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곧 이주 언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무 늦게까진 놀지 말고 이주야, 이모 전화번호 알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해”
그러니 잠시 당황하던 언니가 이내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모, 감사합니다”
차가 골목을 나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언니는 대문 앞에 서서 우리를 지켜봤다. 나는 가끔, 멀어지는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서 있는 언니를 뒤돌아보곤 했다. 그런데 그때마다, 엄마에게 인사할 때의 밝은 표정과는 너무나 다른, 어쩌면 섬뜩하게마저 느껴지는 언니의 무표정을 보게 되곤 했던 것이다.
“어떤 거 같아?”
그날도 언니의 그 무표정한 얼굴을 멀찍이서 지켜보다가, 문득 엄마의 물음에 고개를 돌렸다.
“술병 있었어, 오늘도 술 마실 건가 봐”
그러니 엄마는 한숨을 푸욱 쉬고는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는 내게 언니의 친구들이 오면 알려달라고 했다. 언니가 이모의 인격을 물려받았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건지는 모르지만 엄마는 언니가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고 어떤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는 엄마의 말은 언니를 걱정해서라기보다는 언니가 뭘 하고 다니는지 다 알고 있다는 압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선생님 바꾸고 싶음, 얘기해”
룸미러를 통해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어떤 게 잘 못 된 일이고 어떤 게 옳은 일인지 알 만큼 충분히 조숙했던 나를 엄마는 신뢰했다. 그렇기에 언니에게 계속 수업받겠다는 내 선택을 존중했던 것이다.
나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쌍하다 이주 언니는. 앞으로 내가 살면서 볼 것인 인간군 중 언니는 가장 불쌍한 축에 속한다. 다만 그 불쌍하다는 게 언니가 태어나면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던, 한 줌의 사랑조차 주지 않는 엄마라든가, 아이를 가지게 된 연약한 여인을 무책임하게 버려두고 떠난 아빠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얼마나 근사한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얼마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은 얼마나 허무한가. 그게 바로 언니가 이모로부터 물려받은 최악의 단점이었다. 예쁘고 똑똑한 언니는 분명 현명한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32. 그 애는 나 싫어해
그 애를 곁에 붙잡아 둘 수 없었던 나는 당연히 그 애와 같이 다닐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애를 피할 용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애 반에 가까워지자 걸음이 느려졌다. 발걸음이 점차 처지다가 그 애 교실 앞에 다다랐을 때 결국 멈춰 섰다.
내 키 높이만큼 교실 창문을 가린 가림막 위를 힐끔 보니 1반 선생님의 얼굴이 빼꼼히 올라와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열렬히 설명하고 있었다. 오늘도 1반은 종례를 늦게 마치겠지.
이대로 지나갈까, 아니면 뻔뻔하게 기다려 볼까.
우두커니 서 있다가 괜히 발끝을 내려다봤다. 실내화 속 발가락들이 부질없이 꿈틀거렸다.
곧 2반 아이들이 방금 종례를 끝냈는지 문을 열고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이미 복도를 지나고 있는 우리 반 아이들과 부딪히며 더욱 어수선해졌다.
복도 한쪽에 서 있으려니 더 많아진 아이들이 곁을 부딪치며 지나갔다. 부딪힐 때마다 몸이 조금씩 앞으로 떠밀렸다. 조금 버텨볼까 싶다가, 이내 휩쓸려 걸었다.
복도로 나왔을 때 내가 보이지 않으면 그 애는 무슨 생각을 할까. 처음엔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그러다 이내 홀가분해할 테지 분명. 사실은 나약하고 쓸모없는 주제에 그동안 귀찮게만 굴었던 내가 없어졌으니 얼마나 편할까.
학교 건물을 나와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어느 연약한 손길이 살며시 팔을 붙잡았다.
“오늘은 왜 혼자 가는데?”
매일 그 애와 같이 집에 가는 걸 알고 있던 지혜가 왜 오늘은 같이 가지 않냐고 물은 것이다.
서로 먼저 나가겠다며 앞다투는 아이들과 부딪히는 게 싫다던 지혜는 항상 반 애들이 교실을 다 나가고 나면 주섬주섬 가방을 둘러매곤 했다. 그래서 매번 뒤늦게 학교를 나오던 지혜가, 어째선지 그날은 아이들 사이를 힘겹게 비집고 내게 닿았던 것이다.
지혜의 뒤에는 같이 뛰어오느라 찬 숨을 고르고 있는 영미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린 채 서 있었다. 요즘 학교를 마치면 거의 맨날 둘이서 노는 모양이던데, 오늘도 영미 집에서 놀 건가 보다.
“아아,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먼저 가기로 했어, 히히”
라며, 지혜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인데에? 중요한 일 아니면, 오늘 우리랑 놀면 안되나아?”
이상했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걸까. 나는 애써 웃은 거였지만, 나름 어색하지 않게 표정 지은 거였다. 그런데도 지혜는 어째선지 걱정 가득한 표정을 한 채 내 팔을 슬며시 잡아당기는 것이다. 뭔가를 바라는 듯 날 똑바로 보는 지혜의 눈빛에서 왠지 모를 애절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뒤에서 잠자코 있던 영미가 문득 헛기침하더니 끼어들었다.
“큼.. 큼, 니도 갈라믄 가든지, 니 가면 우리 엄마가 사과랑 배 엄청 많이 깎아 줄지도 모르는데”
깜찍한 기집애. 사과와 배로 나를 꼬시려 한다. 영미 집에 처음 간 날 아주머니가 깎아주신 과일을 꽤 맛있게 먹었던 걸 기억하는 걸까. 그래봤자 고작 2조각 먹은 거였지만.
“아니야, 오늘은 정말 일찍 가봐야 해, 다음에, 꼭 같이 놀자”
“치...”
자기 딴에는 나름 먹힐 거라 생각했던 건지, 영미는 못마땅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터미날까지만 같이 가자”
지혜는 체념한 듯 말했지만, 걱정스럽다는 표정은 여전한 채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한동안 우리는 조용히 걷기만 했다. 내 손을 꼭 잡고 제 몸을 내게 가까이 붙인 채 걷는 지혜는 이따금 나를 올려다보며 눈치를 살피는 듯도 했다. 조용히 따라오는 영미가 문득 궁금해 뒤돌아보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전히 어색한지 녀석은 또다시 고개를 돌렸다.
셋이서 같이 가는 건 이번이 세 번째인가. 이전 두 번은 영미 집에 가는 거였고, 이번엔 둘이서 나를 터미널까지 데려다주는 모양새인듯해 기분이 묘했다.
문득, 간간이 나를 올려다보던 지혜와 눈이 마주쳤다. 지혜는 여전히 뭔가를 바라는 듯 조금은 애타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왜 자꾸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는 걸까. 왠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께, 뭐 했어?”
책상 책꽂이에서 참고서를 꺼내던 언니가 문득 물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를 빼던 나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언니를 돌아봤다.
그저께는 월요일이었지만 어린이날 전이라 수업을 안 했다.
종종 수업 중 잠깐 쉴 때나 수업을 마친 후 언니는 주말에 뭐 했는지 안부처럼 묻기도 했지만, 웬일인지 그날은 만나자마자 별안간 묻는 것이다. 마치 정말로 그날 뭘 했는지 알아야겠다는 것처럼.
“그저께 너 봤어, 터미날로 가고 있더라?”
문득 그저께 시장에 갔던 일이 떠올랐다. 공황발작이라는 거겠지. 책에서만 봤던 트라우마를 내가 갖게 될 줄은 몰랐다. 하긴, 나 같이 나약한 꼬마는 그러고도 남을 테지.
“그냥, 친구랑 놀았어”
그러니 언니는 작게 숨을 가다듬더니,
“친구 누구?”
어째선지 떠보는 듯한 말투로 다그치듯 하는 것이다.
필기구를 꺼내던 나는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언니를 돌아봤다. 언니는 뭔가 변명이라도 하라는 듯 야릇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냥 친구, 왜?”
그러니 언니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냥 친구? 하하... 솔직히 말해, 언니 정말 다 봤어”
뭘 봤다는 거지? 나를 바라보는 언니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는 듯했다.
“뭘 봤는데?”
여전히 언니는 미묘하게 웃는 표정으로,
“걔, 누구야? 같이 가던 애”
봤다는 게 그 애를 말하는 거였구나. 그렇다면 손 잡고 가는 걸 봤다고 말하려는 건가.
나는 태연히 대답했다.
“친구”
“남자애던데?”
“그런데?”
“너는 친구랑 손 잡고 가니?”
“그럼 안돼?”
태연한 내 반응에 언니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윽고 조심스러운 듯 물었다.
“남자친구니?”
남자친구냐니. 12살짜리에게 자신의 잣대를 들이미는 언니의 그 한심함은 지금이나 그때나 참 여전하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퍼뜩 이해되지 않았던 나는 그저 언니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사귀냐고, 걔랑”
답답한 듯 재차 묻는 언니는 그 순간 조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흥,”
나는 코웃음 쳤다.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알량한 명분으로 그 아이를 내 상처를 가리는 데 이용하고 있었다는 걸. 그러다 초라하고 못생긴 상처가 드러나자 더 이상 그 아이를 잡을 수가 없게 된 거지. 그러니 그 불쌍한 소녀가 과연 그 아이의 뭐라도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 같아? 그저 코웃음 치며 언니를 비웃을 수밖에.
“뭐야?”
황당한 내 반응에 언니는 조금 얼이 빠진 듯했다.
그 얼빠진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났다.
“하하...”
그러니 언니의 표정이 이내 구겨졌다.
“왜 웃어?”
언니를 똑바로 마주 봤다.
언니, 언니가 감히 알아? 내가 왜 어른이 되려 했는지, 내가 어떻게 그 애를 붙잡고 있었는지. 그 애가 나를 어떻게 치유하고 있었는지 언니가 감히 아냐고.
파르르 입술이 떨리다가, 마음속에 감춰놓고 외면하던 진실을 그만 내뱉고 말았다.
“걘 나 싫어해, 언니”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울까 말까 싶다가, 그냥 울기로 했다. 이젠 어른이 될 필요가 없어졌으니 울어도 되겠지.
눈물이 앞을 가려 언니의 표정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실수였을까.
와락, 날 껴안은 언니의 품에서 흐느껴 울었다, 아이처럼.
33. 개나리 돌담길에서
2년 뒤, 우리가 중학생이 되면서 지혜는 그동안 크지 않았던 키가 한꺼번에 큰다. 매번 날 올려다보던 녀석은 어느새 나를 조금 내려다볼 정도로 커지고, 뚱뚱하던 몸매는 길어진 키에 반비례하듯 날씬해져, 숨겨져 있던 미모가 드러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은 지혜는 정말 귀엽고 이뻤다. 살에 가려져 좌우로 가늘게만 보였던 눈은 크고 둥근 눈망울로 또렷이 빛났고, 가려져 있던 턱선이 선명해져 갸름하고 고운 모양을 이뤘다. 무엇보다 지혜가 웃을 때 그 포근한 눈빛은 보는 이에게 왠지 안심되는 기분마저 들게 했다.
지혜는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름 열심히 했다. 사실 녀석은 공부보다는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주로 만화책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처음에는 서투르게 따라만 그렸지만 나중에는 혼자서도 꽤 잘 그리게 된다. 하지만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던 지혜의 집은 그림 공부를 시켜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녀석은 애니메이터 쪽으로 진로를 잡지 않고, 열심히 나를 따라다니며 학교 공부를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 일에 대해서 나는 끝끝내 지혜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참 바보 같았지, 그게 뭐 어렵다고. 하지만 지능만 높았지 속내는 12살짜리밖에 안 됐던 내게, 누군가에게 사과하기 전의 그 어색하고 불안한 감정은 정말 낯설고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지혜는 수없이 감사하고 또 사과했건만.
“너 왜 자꾸 밥 안 먹는다 그래? 나 때문에 그래?”
날카롭고 싸늘한 말투에 지혜가 움찔 떨었다.
“내가 밥을 먹든 안 먹든 상관 말라고 했지! 넌 네 일이나 신경 써! 왜 내 일에 네가 나서서 그래!”
내 앞에서 고개 숙이고 움츠려있던 지혜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이윽고 그 가는 눈매에서 물기가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나는 더 화가 났다.
“너 혹시 내가 불쌍하니? 내가 그것밖에 안 돼 보여!”
“야! 이 못된 가시나야! 고만 안 하나!”
옆에서 영미가 매섭게 쏘았다.
“다 니가 걱정되가 그란 기다 아이가! 니는 마음도 없나!”
나도 영미를 쏘아 보았다.
“내가 언제 걱정해 달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주제넘게 참견하지 말란 말이야!”
그러니 영미는 더 큰소리로 악을 썼다.
“니 같은 거 걱정 안 해! 이 지밖에 모르는 싸가지야!”
이윽고 지혜는 작게 훌쩍이며 울기 시작했다.
“가자! 저 못된 가시나랑은 상종도 하지 마라!”
영미는 곧 지혜의 손을 잡아 교실 밖으로 이끌었다.
“지혜한테 거짓말 시킬 때부터 알아봤다, 이 못돼 쳐먹은 가시나야!”
성깔 센 기집애는 교실을 나갈 때까지도 내게 뒤돌아 쏘아붙였다.
반 아이들 모두 급식소로 간 뒤 혼자 남은 교실에서 나는 주먹 쥔 양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혜나 영미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무언가에 화가 났다. 그게 뭔지는 도통 모르겠지만.
시장에서의 그 일이 있은 후 2주가량이 지났다. 2주라는 시간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던 내 몸과 마음을 고단하던 때로 다시 되돌려 놓기에 충분했다. 몸은 점점 야위어 갔고 신경은 날 서 갔다. 저번 주부터는 과외도 안 나가는 중이다.
엄마는 다시 밤마다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예전처럼 방에서 앓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제 엄마가 나를 보살펴주기에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나는 지혜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견딜 수 없었다. 녀석의 선의가 나를 더 약해 보이게 할까 봐 겁이 났다. 내 나약한 모습을 들키는 건 그 애 하나로도 벅찼으니까. 그러니 야위어 가는 나를 보며 자기도 선뜻 밥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그 다정하고 여린 기집애를 매정한 말들로 할퀴었던 것이다.
책상에 엎드려 멍하니 있으려니, 얼마 뒤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치는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축구 하러 안 갈 끼가?”
별 기대는 하지 않는 것 같지만 혹시 몰라 물어봤을 영곤이가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엎드렸다.
이제 그만 물을 때도 됐겠건만 영곤이는 일주일도 넘게 내게 축구하러 가지 않을 거냐고 묻고 있다. 바보 같은 놈.
그날 아침 엄마는 국을 올린 쟁반을 가져오다 아침뉴스의 한 장면을 보고 돌연 주저앉아 버렸다. 국이 쏟아져 바닥을 적셨고 그릇들이 나뒹굴었다. 그런데도 할머니 할아버지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비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북태평양 어딘가에서 고기 잡던 배의 선원이 사고로 바다에 떨어져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욕실에서 세수하고 나오던 나는 엄마의 겁먹은 눈동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통 아빠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다정한 아빠의 얼굴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고, 아빠가 떠나기 전 내 가슴에 박혔던 그 슬픈 눈동자가 응어리처럼 아려왔다. 그러면, 끝끝내 놓쳐버린 아빠의 손목을 한처럼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조금만 더 꽉 잡을걸.
힘을 줘서 잡고 있었어야 했어.
그걸 왜 놔버렸을까, 바보같이.
못 가게 매달렸어야지 이 멍청한 꼬맹아!
“이리 나와”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선생님이 날 부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 있었고 서늘한 정적이 교실을 휘감았다.
나는 죄인처럼 걸어 나갔다. 책상 사이에 걸려있는 가방들을 피해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이 힘없이 비척거렸다.
“평소엔 잘하던 아아가 요샌 와 이리 정신을 몬 차리노, 잘 하라꼬 때리는 기다이”
말은 다정한 듯했지만, 선생님의 손바닥은 자비라곤 없이 내 볼에 부딪쳐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나는 비참함도 느끼지 못하고 덤덤히 자리로 돌아왔다.
여태껏 영재 소리 들으며 한 번도 맞아 본 적 없던 나는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얼굴이 땃땃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선생님의 손바닥과 내 볼이 세게 맞닿으면서 일으킨 마찰열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들 보는 데서 뺨을 맞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라는 걸 처음 알게 된 어느 나약한 소녀의 수치심 때문이었다.
문득 나를 뒤돌아보는 지혜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더 수치심이 들었다.
날 동정하지 마.
날 우습게 보지 마.
날 불쌍하게 보지 마.
나를 그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지 말란 말이야 이 돼지 같은 기집애야!
딩동댕동!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점심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홀가분한 듯 떠들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지혜는 선뜻 일어나지도 않고 뒤돌아 내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나를 뒤돌아보며 우물쭈물하고 있는 지혜에게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아아, 밥 먹기 귀찮아, 히히, 너희들끼리 먹고 와, 나는 좀 잘게”
그리고는 내게 뭐라 말하려는 지혜를 무시하고 얼른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우리끼리 가자, 야아는 또 밥 안 먹을란 갑다”
어느새 다가온 영미가 지혜를 재촉했다.
반 아이들은 우르르 교실을 나가고 있었다.
“나... 나도 그냥 안 먹을래, 입맛이 없어...”
“니까지 와 카노, 니 어제도 밥 안 먹드만 나중에 배고프다고 난리 지깄다 아이가!”
“아니라, 나 진짜 오늘은 입맛이 없어, 진짜라! 배도 조금 아픈 거 같고... 나도 그냥 교실에 있을래”
지혜의 말을 엿듣던 나는 순간 짜증이 났다.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지혜를 노려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지혜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너 왜 자꾸 밥 안 먹는다 그래? 나 때문에 그래?”
날카롭고 쌀쌀한 말투에 그 다정하고 연약한 기집애가 움찔 떨었다.
그날은 혼자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그 애를 기다리지 않게 되면서부터는 지혜와 영미가 터미널까지 같이 가 주었었지만, 그날은 그러지 않았다. 나를 위하는 줄 알면서도 착한 애를 그렇게나 쏘아댔으니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날만큼은 정말 혼자서 집에 가긴 싫었다. 그래서 그날은 터미널까지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최대한 천천히 터미널로 가다 보면 혹시라도 그 애가 날 따라잡아 주지 않을까 싶었다. 천천히 가다가 버스를 놓치게 된다면 뒤늦게 온 그 애와 같이 버스를 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4번 승차장 앞 벤치에 다다라 털썩 주저앉았다. 가방을 벗어 앞으로 껴안았다.
그 애는 오지 않았다. 느리게 걷는 날 따라잡아 주지 않았고, 출발 5분 전 버스 시동이 걸릴 때까지도 그 애는 터미널에 도착해주지 않았다.
버스에 시동을 걸어놓고 나오는 기사 아저씨가 나를 힐끔 쳐다보고 지나갔다. 나는 왠지 그대로 앉아 있고만 싶었다. 잠시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아저씨가 버스를 타기 전 다시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야야, 인자 출발 할 낀데, 안 탈 끼가?”
운전대에서 출발할 준비하던 아저씨가 문득 창문을 열고 내게 물었다.
나는 잠시 아저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아... 친구가 오기로 해서요, 다음 버스 타기 전에 올 거예요, 히히”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새삼 깨달았다. 나는 지금 그 애를 기다리고 있는 거구나.
곧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다시 멍하니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봤다.
다음 버스가 떠나기 전에는 그 애가 올까. 아니, 만약 현우집에 놀러 간 거라면 꽤 늦게 올지도 모른다. 나는 이대로 막연히 기다릴 수 있을까. 만약 오후 늦게서야 그 애가 버스를 타러 온다면 아직도 터미널에 앉아 있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혹시 귀찮아할까. 아니면 꺼림칙해 할까.
생각에 빠져있자니, 곧 다음 버스에 시동이 걸렸다.
탈까 말까 하다가 결국 그 버스도 떠나보내고 말았다.
이제는 그냥, 마냥 기다리기로 했다.
그 애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렇게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가도 이따금 초조해지기도 했다. 시간이 빨리 가길 바라면서도 느리게 가길 바라기도 했다. 이번 버스가 떠나기 전에 그 애가 오길 바라면서도 그냥 다음 버스에 오길 바라기도 했다.
문득 아래를 내려다봤다. 꽤 높은 벤치에서 바닥에 닿지 않는 발끝이 대롱대롱 흔들렸다.
그때 옆에서 익숙한 인기척이 들렸다.
나는 애써 웃으며 그 인기척을 맞이했다.
“지금 가니?”
그런데 그 애는 왠지 경직된 표정으로 나를 살피더니 곧 내 옆에 앉는 것이다.
우린 한동안 말없이 있었다. 조금은 떨어져 앉을 거라 생각했던 그 애가 왠지 내게 꼭 붙어 앉아서 그 순간 나는 우리가 함께 있다는 느낌이 충분히 들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나는 이유 모를 변명을 굳이 했다.
“지혜랑 영미랑 놀다가, 방금 왔어...”
그러니 그 애는 나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안 타나?”
고개 숙인 채 말하는 그 애 모습이 왠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으응, 지금 타려고, 타자!”
오후 몇 시나 됐을까. 그날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밭에서 일하는 마을 어른들이 꽤 많이 보였다. 이젠 그 모습도 제법 눈에 익었다. 발목까지 오는 새싹을 허리 숙여 돌보던 어른들이 이따금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 때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고개 숙여 인사하면, 챙 넓은 그늘막 모자를 눌러쓴 어른들은 멀리서도 환히 웃으며 손 흔들어 줬다.
버스에서 내리면 마을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집에 왔다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이 좋았다. 밭에서 작물이 자라나는 쌉싸름한 냄새도, 이따금 거무잡잡한 퇴비가 뿌려지면 맡게 되는 비릿한 냄새도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다.
크게 굽은 길을 돌아 마을이 보이기 시작하면 곧 돌담 위로 줄지어 피어난 개나리들이 나타났다. 저학년 때 배운 동요나 동시에서나 들어봤던 개나리라는 꽃을 나는 그곳에서 처음 봤다. 수수하고도 예쁘게 피어난 그 꽃의 샛노람은 아늑하고 포근한 나의 마을과 꽤 닮았다. 그래서 나는 개나리꽃 너머 마을이 보이는 그 길 그 풍경이 좋았다.
개나리 돌담 옆을 한창 지나고 있을 때 그 애가 문득 이쪽을 돌아봤다.
“할머니 일 도와드리러 가야 될 거 같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곤 괜히 발끝을 내려다봤다. 곧 그 애는 먼저 달려가겠지. 오늘 마을 어귀까지라도 같이 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조금은 허전한 느낌이 들 테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애의 인기척이 여전히 곁에 머무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의아해 옆을 돌아봤다. 할머니를 도와드리러 간다던 애가 왜인지 가지 않고 옆에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이다.
내 시선을 느낀 건지 그 애도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그날 그 길의 풍경을 함께 걸어가던 그 애가 처음으로 내게,
“토요일에 놀러 올래?”
나는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퍼뜩 이해되지 않아, 잠시 그 애를 바보처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문뜩 알아채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그러니 그 애는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곧 부리나케 달려가는 것이다.
저만치 달려가는 그 애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다. 그날따라 나의 마을이 조금 더 따듯하게 느껴졌다.
34. 언니의 의도
불쌍한 언니. 초라한 열등감 때문에 결국 나를 사랑하게 된 저열한 인간.
그나마 현우는 그 애보다 낯가림은 덜 한 편이었다.
지혜와 함께 정훈이의 우유 당번을 도와주러 갔던 날, 지혜가 내 손목을 잡아끄는 모습을 본 현우는 그동안 날 경계하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리고 처음엔 나를 어색해하며 피하기 바빴던 녀석과 어느새 인사 정도는 자연스레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물론 처음부터 막 친해질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네가 제일 믿을만한 친구라던데?”
그러니 현우는 머쓱한 듯 헛기침하더니,
“크흠, 뭐, 내가 좀 많이 챙기 주긴 하지”
나는 얼른 덧붙였다.
“되게 똑똑하다고 했던 것도 같고...”
“아아, 그 정도까진 아니고, 내가 많이 갈카주긴 하지, 하하”
녀석의 표정이 조금 편해진 듯 보였다.
“난 옆집에 사는 데도 너만큼 친하게 대해주진 않더라, 네가 너무 부럽다, 나도 너처럼 똑똑하고 믿을만하면 좋을 텐데”
녀석은 표정이 더욱 밝아져 히죽거렸다.
현우와 친해지게 된 건 단순히 내 변덕이었지만 결국 그 사건을 맞이하는 발단이 돼버렸다.
“한진규가 니 욕하믄서 즈그 형들 불러가 니 손 봐줄끼라 했는데, 그래가 가아가 한진규 밀치고 때릴라 했다 아이가”
웬일로 우리 반으로 찾아온 현우가 문득 나를 불러내더니 어제 있었던 일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현우의 말을 전부 믿지는 않았다. 한진규가 내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됐지만, 그 애가 한진규를 밀치고 때리려고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얘는 한진규 얘기만 내게 일러주면 될걸, 굳이 왜 그런 못 믿을 얘기까지 하는 걸까.
그것은 단순히 그 애가 나를 싫어한다거나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보아온 그 애는 누군가에게 힘을 행사하고 윽박지를 만한 성격은 못 된다. 그렇게 가녀리고 순진한 애가, 그것도 나를 위해서 그랬다고?
“근데, 한진규 형 진짜 무서워, 막, 담배도 피고, 애들 돈도 뺏고... 걔 형한테 진짜 맞은 애도 있데”
어쨌든 나는 현우의 말을 새겨들었다. 그렇다고 그 뻥쟁이 한진규가 정말로 자기 형을 데려와서 내 손을 봐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한 번 확인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일주일 만에 본 이주 언니는 내게 매우 서운한 듯 보였다. 날 보며 좀처럼 웃지 않았고, 잘 지냈는지, 몸은 괜찮은지, 저번 주에는 뭐하며 보냈는지 등을 묻지 않았다. 그저 책상에 앉자마자 딱딱한 태도로 수업을 시작하려 했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언니는 펴진 문제집에 연필을 가져간 자세로 잠시 있다가, 이내 내키지 않았는지 팔을 내리고는 화난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다.
“잘 지냈어, 언니?”
그러자 언니는 나를 흘깃 흘겨보고는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해, 나 그동안 몸이 안 좋아서 쉬었어, 엄마가 전화했지?”
여전히 저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언니는 시위라도 하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슬쩍 언니의 팔을 잡아당겼다.
“언니, 나 좀 봐봐, 나 언니 보고 싶어서 온 거야”
그러니 언니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마지못한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치... 전화 한번 안 했으면서, 진짜 내가 보고 싶긴 했어?”
가끔 언니가 나를 필요 이상으로 생각해준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나는 그것이 정상적인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내가 야위어 가자 언니는 마치 내 고통을 자기가 대신 겪기라도 하는 듯 괴로워했다. 그러한 낌새를 수업 내내 내비친 언니 때문에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저번 주 월요일에는 꺼림칙하게도 내 두 손을 마주 잡고 울먹이기까지 하는 바람에 당분간 수업에 나오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언니와 나는 아직 그 정도로 깊은 사이는 아닌데 말이지.
“으응, 당연하지, 정말 너무 아파서 전화도 못 했어, 그래서 이렇게 언니 보러 왔잖아, 그러니깐 화 풀어 언니, 헤헤”
그러자 언니는 못 이긴 척 표정을 풀었다.
이주 언니는 공부는 잘하지만 분명 모범 학생은 아닐 것이다. 언니는 담배 냄새가 나지는 않았지만 담배를 피우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언니도 술을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니의 친구들은 미성년자임에도 자주 술을 먹고 놀았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니는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도 그 불량한 친구들을 곁에서 놓지 못했다. 혹시 그들이 사랑받고 크지 못한 언니의 자존감 같은 것일까.
어쨌든 지금 나는 언니의 그 불량하고도 위험한 인맥이 필요하다.
“한진규? 걔가 누군데? 걔가 너 때리려고 한다고?”
“걔 형이 중학생인데, 초등학생도 때린 적이 있데, 날 손봐준다나 뭐라나”
순간 언니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그 새끼 이름이 뭔데? 몇 학년이래?”
일단은 언니를 진정시켰다.
“아니야 언니, 이름은 모르는데, 설마 정말로 그러겠어? 그냥 걔가 나랑 사이가 안 좋으니까 해본 말이겠지, 그래도 나한텐 언니가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히히”
어깨에 기대어 아양을 떠는 나를 보며 언니는 기분이 좋아진 듯 우쭐하면서도 곧 진지한 표정으로 한진규의 이름을 되새겼다.
“한진규라는 애 형이라고? 언니만 믿어, 그 정도는 금방 알아낼 수 있어”
한진규는 입만 열면 상스러운 말들과 얄팍한 허풍을 쏟아 내는 한심한 애였지만, 그런 만큼 누군가를 해코지할만한 위인은 또 못 됐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놈은 그 잘난 자기 형에게 한마디도 일러바치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누군가가 부추기지만 않았다면. 결론적으로, 그날 나는 언니에게 그 얘기를 하면 안 됐다. 한진규를 부추긴 그 누군가는 바로 한진규의 형 한상규였고, 한상규를 부추긴 게 바로 김이주 언니였으니까.
“그런데 너, 남자친구랑은 완전히 끝난 거지?”
별안간 언니가 뜬금없는 소리를 하니 나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남자친구가 아닌데 자꾸 남자친구라고 언급하는 것도, 우리 사이를 고작 끝나고 말고의 단순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도, 언니로서는 도저히 친구라는 관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제멋대로 정의하고 결론지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주 언니같이 꺼림칙한 사람이 그 애 얘기를 묻는 것은 못마땅했다.
“남자친구 아니고 그냥 친구, 헤헤, 지금도 잘 지내고 있어, 그리고 걔 그렇게 나쁜 애 아니야 언니”
나는 애써 맞춰주며 묻지도 않은 것까지 주절거렸다.
그런데 언니의 표정이 이상했다. 친구와 잘 지낸다는데 왜 껄끄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리고, 언니를 처음 봤던 날 나를 보며 지었던 그 깊고 그윽한 눈빛으로 언니는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를 보는 게 아닌, 내 안의, 혹은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보는 듯. 나중에야 알게 된다. 그것은 언니가 누군가를 질투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는 걸.
언니는 나를 사랑했다. 기분 나쁘고 부담스러운 사랑이었지만 어쨌든 그 절대적인 감정만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나에게 상처 주었다고 생각한 그 애와 여전히 잘 지낸다는 말을 듣고 질투와 증오를 느꼈던 거겠지. 언니는 내가 아파서 수업에 나오지 못한 이유가 그 애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 내가 또 상처받게 된다면 나를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불안했던 것이다. 그래서 언니는 한상규를 시켜 그 애를 내게서 떼어놓으려 했다.
아아, 어리석은 언니. 정말이지 아둔하고 간악하고 보잘것없는 사람.
“내일 먼저 집에 가 있을래? 엄마 선물만 사고 금방 갈게”
처음으로 그 애가 내게 놀자고 한 토요일에 엄마 생일선물을 사러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나를 먼저 집에 보내려는 걸까. 잠깐 같이 갔다 오자고 하면 가줄 텐데. 놀자고 했으면서 혹시 나랑 같이 다니기는 싫은 걸까.
어쨌든 나는 그 애가 읍에 혼자 돌아다니는 게 불안했다. 특히 일주일 중 유일하게 중학교가 조금 더 일찍 마치는 토요일은 더욱 그랬다.
언니는 내게 한상규에 대해 얘기해줬다, 양아치가 따로 없는 놈이라면서.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의 어떤 여자애를 건드리면 죽여버리겠다고 을러놓았다고도 했다.
그런데 언니의 다음 질문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너, 걔랑 계속 같이 다닐 거니?”
또 무슨 참견을 하려나 싶었지만, 애써 덤덤한 척 언니를 돌아봤다.
대답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언니가 재차 물었다.
“요즘도 손 잡고 다녀?”
손은 잡지 않지만, 괜히 언니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니 언니는 푸욱 한숨을 쉬더니,
“이모도 아셔?”
같잖은 언니, 우리 엄마가 제일 잘 알아.
“엄마도 알지 당연히”
언니의 눈썹 끝이 찔끔 꿈틀거렸다.
“난 모르겠다, 흐음, 상규 그 새끼가 니 친구 벼르고 있는 거 같던데”
나는 덜컥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이야?”
언니는 무심한 척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글쎄... 잘은 모르겠는데, 어쨌든 니 친구 조심해야겠더라”
나는 언니의 태연함에 화가 났다.
“찾아와서 때리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언니는 조금 놀란 듯 나를 돌아보더니,
“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니? 왜 나한테 화를 내? 내가 뭘 어쨌다고”
언니는 분명 그 애를 싫어한다. 그리고 나를 양아치가 따로 없다는 놈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면서도 그 애를 벼르고 있다는 건 모른 체 한다. 곧 그 애와 같이 다니지 말라고 하려는 거겠지.
“솔직히 니 친구, 걔도 문제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그딴 양아치랑 엮이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 너도 조심해, 그런 애랑 같이 다녀봤자 너한테 좋을 거 없어”
역시. 16살이나 돼서는 눈꼴사납게도 고작 초등학생 하나 겁주려고 그딴 알량한 궤변이나 늘어놓다니.
“언니가 뭘 알아? 언니 주제에 뭘 안다고 함부로 말해? 언니야말로 날라리들이랑 노는 주제에!”
언니의 눈썹이 구겨졌다.
“뭐, 뭐라고? 너...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어? 어떻게 니가...”
이내 언니는 아주 상처라도 받았다는 듯 몹시 서운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도대체 자기가 나한테 어떤 존재라고 믿길래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
나는 책과 필기구를 거둬 가방에 넣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언니랑 못 있겠어, 집에 갈 거야”
가방을 챙겨 방을 나섰다.
언니는 따라붙으며 연신 따지듯 말했다.
“잠깐만 있어 봐! 언니 말 좀 들어보라고! 다 너 걱정돼서 하는 말이잖아! 언니는 맨날 니 걱정밖에 안 해, 거기 서 봐!”
계단을 내려왔을 때 언니가 어깨를 잡았고, 나는 뿌리치며 선반 위의 전화기를 들었다.
언니가 수화기를 뺏었다.
“야! 너 정말 이럴 거야? 언니가 그동안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너한테 그것밖에 안 돼? 그 티미하게 생긴 놈이랑은 어울리믄서, 내 말은 듣지도 않겠단 거가!”
전화기를 뺏긴 황당함에 그저 언니를 노려보던 나는 이윽고 진절머리가 나 그냥 그곳을 나가기로 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을 때 언니가 붙잡았다.
나는 뿌리치려 붙잡힌 팔을 버둥거렸다.
“놔! 놔아!”
“알겠어! 알겠다고!”
언니의 다급한 외침에 나는 몸부림을 멈췄다.
화를 억누르는 듯 씩씩거리며 잠시 나를 노려보던 언니가 이윽고 말했다.
“이모한테 전화할게, 걸어가지 말고 차 타고 가”
엄마한테 전화한 후 언니는 나를 한번 흘겨보고는 이내 위층으로 쿵쾅거리며 올라갔다.
다음날, 토요일. 1교시가 시작되기 전 현우를 찾아갔다.
내가 자기 반으로 찾아간 건 한 번도 없던 일이라 교실 창문에 빼꼼히 올라온 내 눈과 마주치자 현우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내게 고개를 돌렸다. 이내 내 눈짓이 자기를 향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곧 뒷문으로 나왔다.
“쟤 지금 돈 많이 들고 있나 봐, 혹시 모르니 네가 같이 좀 다녀 줘, 위험한 데는 가지 말고”
그러니 내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현우가 물었다.
“와? 와 그라는데? 뭔 일 있나?”
자기 집에는 초대하면서, 선물 사러 같이 가기는 싫은가 봐.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내 삼켜 넘겼다.
“어제 내 친구가, 학교 근처에서 어떤 애가 중학생한테 돈 뺏기는 걸 봤데”
“어어? 진짜가?”
놀란 현우를 보며 나는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그람 우짜노? 흐아아... 어짜노, 어짜노오...”
소심하고 겁 많은 현우에게 한상규라는 중학생이 그 애를 벼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간 정말 졸도라도 할지 모르니까.
일단은 잔뜩 걱정하며 울먹이는 현우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애들이랑 섞여서 가면 별일 없을 거야, 어디 외진 데만 가지 마”
“어!”
현우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와 놀기로 한 토요일의 이른 오후, 그날도 어김없이 학교 앞 골목은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든 아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한적한 시골 거리가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그런데 하굣길의 시끌시끌한 골목을 걸어가다가 문득 저 앞에 이주 언니가 보였고,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우뚝 멈춰 섰다.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언니를 한심하게 생각하고 꺼림칙하게 여기긴 했지만 그렇다고 언니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언니를 필요로 했다. 서울의 박학다식한 명문대 출신 과외선생님들은 분명 품위 있고 똑똑했지만, 언니는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진정성이 있었다. 내가 진도를 잘 따라가고 실력이 늘 때마다 서울의 선생님들은 자기가 받은 보수의 가치를 증명해낸 것 같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언니는 나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고 마치 내가 자기 분신이라도 되는 양 감격해 마지않았다. 당연히 나는 언니의 그런 모습이 부담스러웠지만 어쨌든 그 유별난 교육열은 필요했다.
하지만 언니가 나를 보는 그 각별한 눈빛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싫었다. 누가 뭐래도 언니는 어리석고 한심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이나 친한 친구들을 마주칠 수도 있는 학교 앞에서 언니를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언니와 함께 온 그 날라리 친구들 그리고 얼핏 정체가 짐작 가는 중학생 남자 둘이 같이 있는 것을 보게 되자, 곧 뒤이어 올 그 애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서 뭐 해? 어쩐 일이야?”
멀찍이서부터 나를 지켜보며 여유롭게 서 있던 언니에게 다가서자마자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언니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왜? 후후, 나는 여기 오면 안 돼?”
나도 지지 않고 대꾸했다.
“안되는 건 아니지, 근데 어쩐 일로 왔는지 물어보면 안 돼?”
콤팩트 파우더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시시덕거리던 언니의 친구들이 당돌하게 대꾸하는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 킥킥 웃었다.
“그냥 볼 일 있어서 왔는데? 내가 그런 것까지 너한테 말해야 돼?”
“꼭 말해야 될 필요는 없지, 근데 나도 궁금해서 묻는 거야, 무슨 볼일인데?”
언니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말해주기 싫은데?”
“왜 말해주기 싫은데? 말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거야?”
언니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그냥 말해주기 싫은 건데? 어제 날 그렇게 버려두고 간 애한테 내가 왜 말해줘야 돼?”
옆에서 키득거리기만 하던 언니의 친구들이 이제 노골적으로 웃기 시작했다.
“유치하게 논다 진짜, ㅋㅋㅋ”
“지 놔두고 갔다고 삐진 기가, ㅋㅋ”
“조용히 안 하나 가시나들아!”
잔뜩 짜증 난 표정으로 그들을 쏘아붙인 언니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그냥 갈 길 가”
“정말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왜 상관있는 거 같지?”
그러니 인상을 구기던 언니가 이제 비릿하게 웃는 것이다.
“왜? 왜 너랑 상관있는 거 같은데? 혹시 그 티미하게 생긴 니 남자친구 때문에 그래?”
속셈을 드러내며 기어코 내 속을 긁고야 마는 언니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가만 안 있는다고 했지!”
아마도 그때 언니를 노려보는 내 표정이 가히 충격적이었나보다.
“어머, 쟤 좀 봐”
“이빠이 화났는갑다, 무시라, ㅋㅋ”
언니 역시 조금 놀라더니, 이내 잔뜩 언짢다는 표정으로 받아쳤다.
“그러게, 처음부터 언니 말 들었으면 됐잖아? 언니는 진짜 니가 걱정돼서 그런 건데, 이렇게 말을 안 듣는다면 이젠 언니도 어쩔 수 없어”
기가 차서 말문마저 막혀 노려보는 나를 향해 이윽고 언니는 얼굴까지 들이밀며, 결국 언니를 증오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고야 만다.
“이제라도 언니 말 들어, 안 그럼 그 새끼 학교 못 다니게 만들 수도 있어”
“헉!”
별안간 들려오는 나지막한 비명에 뒤돌아보니 현우가 몹시 놀라고 겁먹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와 언니를 번갈아 쳐다보는 현우의 두려움 어린 눈빛에 그 순간 나는 창피함이 일었다. 못난 사람과 같이 있는 모습을 친구에게 들켜 버린 것 같았으니까.
나는 언니를 한 번 흘겨본 후 현우에게 다가갔다.
“혼자 나온 거야? 걔 아직 학교 안에 있지?”
그러나 무섭게 노려보는 언니의 눈빛에 몸이 굳어버린 건지 현우는 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듯했다.
그때 현우의 뒤쪽에서 문득 한진규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한진규는 내 눈치를 보며 우리를 지나쳐 곧 언니의 뒤쪽 중학생 남자 둘에게로 갔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뭐라고 수군대더니 이윽고 남자 중학생 둘이 학교 앞 골목을 가로지르는 큰길로 향하는 것이다.
나는 섬뜩한 기분이 들어 현우를 다그쳤다.
“야 이현우! 걔 어디 있냐고! 이현우!”
그러니 퍼뜩 정신을 차린 현우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골목, 골목으로 갔어!”
“무슨 골목?”
“또래분식 앞 골목”
중학생들이 향한 곳이 그 골목 반대쪽인 걸까. 나는 생각할 겨를 없이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순간 언니가 나를 붙잡았다.
“가지 마, 지금이라도 언니한테 오면, 걔한텐 아무 일도 없을 거라”
자기한테 오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안 돼 언니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나를 잡은 손길을 뿌리치고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