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우리는 다음 쉬는 시간에 정훈이와 함께 우유 당번하러 급식소로 향했다.
자기 우유 당번에 둘이나 와서 도와주겠다고 하니 정훈이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지혜야, 나 어제 숙제하느라 손가락이 아파서 손 잡기는 좀 그런데, 네가 내 손목 잡아주면 안 돼?”
그렇게 지혜가 내 손목을 잡아끄는 모양새로, 우리는 현우 앞에 섰다.
시골 땅값이 싸서 그런지 그곳 초등학교들은 하나같이 운동장이 넓었다. 못해도 서울 초등학교의 1.5배는 됐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학교에는 축구 골대가 2쌍이나 있었는데, 여느 학교가 그렇듯 운동장 가운데에 큰 축구 골대가 한 쌍 있었고 다른 한 쌍은 조그만 풋살장 크기의 작은 골대가 체육관 옆에 있었다. 점심시간이면 한창 뛰어놀기 좋아할 활발한 남자애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운동장으로 공을 차러 나갔다. 큰 골대는 주로 6학년이 썼었고, 작은 골대는 4학년과 함께 우리 5학년이 썼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보통은 큰 골대를 두 개 학년이 쓰고 작은 골대를 한 학년이 쓰는 게 공평할 텐데. 왜 6학년이 큰 골대를 독차지하는 걸까. 제일 나이가 많은 이유로?
사실, 축구를 잘한다는 남자애들끼리만 모여 나 같은 여자애는 낄 자리도 없는 그런 일들이야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와 사이가 껄끄러웠던 영곤이로부터 점심시간에 축구 하러 나가자는 얘기를 들은 후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된 것이다.
영곤이의 말에 따르면 작년까지만 해도 큰 골대를 5학년과 6학년이 함께 썼었고, 작은 골대를 3학년과 함께 우리 학년이 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가 지나고 6학년이 졸업하자, 기존 5학년이었던 지금의 6학년이 큰 골대를 독차지하고는 우리보고 원래 하던 데로 작은 골대를 4학년과 같이 쓰라고 했다는 것이다.
제일 억울한 건 3학년일 터였다. 너무 어려서 낄 수 없었던 운동장 공놀이에 이제야 좀 발을 들이려나 했는데, 웬 고학년의 어처구니없는 폭정에 스탠드에서 손가락이나 빠는 신세가 된 것이다. 분별없는 어린애들끼리의 일이야 나이를 앞세운 힘의 논리로 굴러가는 게 당연하겠지만, 속으로 불만이 곯을 대로 곯은 3학년과 우리 학년이 힘을 합치게 되자 6학년과의 축구 내기에서 결국 이기게 됐다.
축구는 5학년 중에서 승재가 제일 잘한다고 하니, 아마 승재의 공로가 제일 컸던 듯싶다. 그러니, 웬일인지 승재가 점심시간 축구에 나를 데려가자고 했을 때 영곤이를 비롯한 5학년 축구팀 애들이 별로 내키지 않았음에도 따를 수밖에 없었나 보다. 그래서인지 내게 축구를 할 거냐고 묻는 영곤이의 표정은 아주 띠껍기 그지없었다. 무슨 선심이라도 쓰듯 내가 그 초대에 당연히 응할 거라 생각하는 오만함에 비위가 상했지만, 일단 나로선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 이틀째 점심시간마다 축구를 하는 중이다.
공을 몰고 오는 6학년 공격수와 부딪쳤다. 아니, 나를 들이받았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6학년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인 그 오빠는 어제도 웬 가시나를 데려왔냐며 비아냥거리더니 심술궂게도 내 쪽으로만 공을 몰고 왔다. 내가 여자라 공을 못 찰 줄 알았겠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는지 이젠 치사하게 덩치로 밀어붙이는 중이다. 반칙 아니냐고 항의했지만 정당한 몸싸움이라고 우겨대니 억울해도 별수 없었다. 수비에 나보다 덩치 작은 애들이 여럿 있는데도 내게만 그러는 걸 보면 여자라고 무시하는 걸 테지. 그래도 이번에는 나도 힘껏 들이받아, 넘어지긴 했지만 공을 놓치게 만들었다. 계속해보라지 한 골도 못 넣게 만들어 줄 테니.
나 때문에 자꾸 골대 앞에서 공을 놓치니 약이 올랐는지, 나중엔 아예 대놓고 공은 제쳐두고 몸으로만 돌진해 왔다. 나도 질세라 같이 들이받았지만, 자꾸 넘어지는 바람에 온몸에 모래먼지가 묻어 지저분해졌다. 팔꿈치와 허리 쪽이 시큰한 걸 보니 아마 멍도 든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치는 두 번의 종 중, 수업 시간까지 10분 남았음을 알리는 첫 번째 종이 울렸다. 결국 그 오빠의 민폐 플레이 덕분에 우리가 이기게 됐고, 그 오빠는 다른 오빠들에게 핀잔을 들어야 했다. 분했는지 교실로 들어가면서 나를 힐끗 째려보는 모습에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 영곤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교실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내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주겠다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더니 이윽고 물도 마시라며 자기들끼리만 먹던 물통을 내게도 건넸다. 다른 애들도 나를 인정하는 눈치였다.
3층으로 올라섰을 때, 계단을 오르면 바로 보이는 1반 안을 힐끗 돌아봤다. 저쪽에 그 애와 현우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축구도 이겼겠다 애들도 나를 인정하니 우쭐한 마음에 냅다 인사를 건넸다.
그 애를 부르며 크게 손을 흔들었다.
“으휴, 이 먼지! 야야, 여어서 털먼 우야노, 나가서 털고 와라, 얼런!”
돌아보니 1반 선생님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 있었다.
옆에서 내 옷을 털어주던 영곤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나가자고 손짓했다.
다시 1층까지 내려가기 귀찮아 선생님이 안 보이는 계단 밑에서 대충 털었다. 영곤이는 꽤 열심히 내 등과 어깨에 손바닥질을 해댔다.
“어차피 옷 갈아입을 거야, 어쨌든 고마워 영곤아, 선생님 교실에 있을 때 살짝 들어가자”
영곤이와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지금 선생님 안 보셔, 빨리 들어가”
뒤돌아보니 계단 위에서 현우가 자기 반과 우리 쪽을 번갈아 보며 살피고 있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도 그 애는 현우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우는 뭔가 더 하려는 말이 있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얼른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녀석이 하고 싶었던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나도 안다. 나랑 같이 집에 가기 싫어 요즘 부쩍 현우 집으로 피한다는 걸. 벌써부터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 엄마가 니도 델꼬 오래”
교실 청소를 끝내고 선생님이 종례하러 오기 전, 가방을 챙기던 중 문득 영미가 다가왔다.
“오려면 오던지, 안 와도 상관없는데, 일단 우리 엄마가 오라고 했으니까, 오려면 오고 오기 싫음 안 오고, 나는 뭐 딱히 상관은 없어, 와도 되고 안 와도 되고, 근데 우리 엄마가 오라고는 했으니까...”
자기 생일파티에 초대하려나 본데, 주저리주저리 쓸데없이 말이 길더니 이내 새침한 표정으로 쌩하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지혜가 배시시 웃으며 뒤돌아봤다.
“나도 가기로 했어”
“쟤 생일 지난 거 아니었어? 그래서 엄마가 그 흰색 원피스 사 주신 거고”
지혜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영미, 어제부터 니한테도 오라고 하고 싶어 했는데, 이제야 말하네, 헤헤”
그날 이후 나는 딱히 영미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다. 앞으로 내 일에 간섭하거나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원만히 지낼 의향은 있다. 어쨌든 영미도 지혜와 친구긴 하니까.
어차피 내일 시간도 많으니 초대에 응하기로 했다.
토요일 수업을 마친 후 나와 지혜는 영미를 따라 녀석의 집으로 향했다. 지난번과는 다른 목적으로 가는 터라 그런지, 조금은 설레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사실 영미의 진짜 생일은 일요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일요일엔 친구들이 모이기 어려우니 토요일에 파티를 하기로 한 것이다. 친구라고 해봤자 나와 지혜뿐이지만 어쨌든 일요일엔 나도 읍으로 나오기 어려웠고 지혜도 부모님께 따로 허락받는 것보다 토요일 수업을 마친 후 모이는 게 더 편했다.
당연하게도, 전교생이 4교시만 하고 마치는 토요일은 학교에서 급식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일찍 마치기도 하고 학교에서 점심도 먹지 않는 토요일은 누군가의 생일파티를 하기에 딱 좋은 날인 것이다. 심지어 토요일은 수업을 일찍 시작해 평일 4교시보다 20분이나 일찍 마쳤다.
영미 집에 도착하니 지난번에 뵀던 영미의 어머니와 처음 보는 영미의 이모와 삼촌이라는 분들이 무척 반가운 얼굴로 우리를 맞아줬다.
안방 옆에 있는 영미 방으로 들어가니, 아마도 딸기 맛으로 추정되는 분홍색의 예쁜 케이크와 그 당시 읍에 처음 문을 열었다는 프랜차이즈 통닭 2마리, 그리고 꽤 고급 음식이었던 콤비네이션 피자 큰 사이즈 1판이 메인메뉴로 올라와 있었고, 초코파이와 오예스, 초코틴틴, 사브레 등 여러 가지 맛깔스러운 과자가 접시에 차려져 있었다.
영미는 통닭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았다. 여리여리하고 얌전하게 생긴 것답지 않게 녀석은 양손에 통닭을 하나씩 쥐고 참 맛있게도 먹었다. 지혜는 입가에 소스나 기름기가 묻지 않게 피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얌전하게 조금씩 베어 먹었다.
파티에 초대되어 왔지만 차려진 음식을 먹으려니 막상 내키지 않았다. 조금만 먹어볼까 고민하다가 그냥 둘이 먹는 걸 가만히 구경하고 있으니, 이제 겨우 피자를 한입 베어먹고 앙증맞게 입을 오물거리던 지혜가 문득 돌아봤다.
“와 안 묵노? 이거 벨로 안 좋아하나?”
한쪽 손의 통닭을 다 먹고 다른 조각을 집으러 손을 뻗던 영미도 잔뜩 부푼 양 볼을 우물거리며 돌아봤다.
먹음직스럽게 노릇노릇 튀겨진 닭고기에서 고소한 기름 냄새가 풍겨왔다.
식판에 남겨진 음식을 버리고 식수대에서 물을 마신 뒤였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오던 지혜가 문득,
“와 밥을 다 남기노?”
걱정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걸까. 내가 밥을 남길 때마다 보게 되는 할머니의 속상한 표정과는 사뭇 다른 지혜의 얼굴이 문득 성가시게 느껴졌다. 날 걱정하는 건 우리 가족만으로 족해.
“입맛이 없어서, 히히, 난 집에서 잘 먹으니까, 점심땐 한두 숟갈만 먹어도 충분해”
지혜의 손을 잡고 급식소를 나왔다.
언젠가부터 음식을 먹으면 속이 메스꺼워져 구역질이 난다. 배가 든든히 찬다는 느낌이 이렇게나 거북스러운 감각이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금은 배가 차는 느낌이 거의 없는 밥 두 숟갈까진 먹을 수 있으니, 거의 일주일간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던 처음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상태다.
초대된 파티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마지못해 후라이드 한 조각을 집어 들어 한입 베었다. 한두 조각까지는 괜찮겠지.
그러니 둘은 다시 음식으로 고개를 돌려 마저 오물거렸다.
한 조각을 조금씩 깨작거리고 있으니, 잠시 뒤 한참 통닭을 뜯던 영미가 여전히 양 볼이 가득 부푼 채로 물었다.
“니으, 아 그이 바으 앙 뭉느? 하끄에스드 그이 낭기다애”
왠지 지혜가 내 눈치를 살피듯 돌아봤다.
음식은 좀 삼키고 말할 것이지. 터질 듯한 양 볼을 우물거리는 것도 힘겨워하면서 뭉개진 발음으로 굳이 그러니 잘 알아듣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에 안 먹냐는 말은 얼핏 알아들어 대충 이해는 했다.
“오늘은 속이 좀 불편해서 잘 안 넘어가네, 하하, 그래도 맛있다야, 초대해 줘서 고마워”
그러니 녀석은 왠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더니, 이내 방금 집어 든 통닭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배고프지 않냐고?
그럼, 당연히 밥을 안 먹으면 배가 고프지. 그런데 그렇게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다. 이제는 속이 빈 느낌도 어쩔 땐 달콤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다. 음식을 삼킬 때 올라오는 거북함과 구역질 보단 훨씬 상쾌하니까.
그날 영미의 생일파티에서 결국 나는 통닭 한 조각도 다 먹지 못했다. 재밌게도 내가 먹고 남긴 통닭 조각은 영미가 먹었었지. 새침하고 예쁘게 생겨서는 참 의외인 면도 있었다.
기분이 내키지 않아 조금 일찍 영미의 집을 나섰다. 지혜는 영미와 좀 더 놀다 가기로 했다.
터미널로 향하는 길, 뱃속이 꼬르륵거리며 꿈틀댔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먹었으면 나았으련만. 그나저나 집에 가면 뭐 하지. 숙제하고 복습하고 흠... 오늘은 과외도 없는데. 서울에 두고 온 대백과사전이라도 있었다면 그걸 보며 시간이라도 죽일 텐데. 저녁에는 또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걱정 어린 표정을 보게 될 테지. 지겹다, 모두 다. 오늘 밤에도 엄마는 울까.
어느새 터미널 대합실로 들어섰다. 오늘이 장날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왠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버스 승차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갔다. 교복 입은 한 무리 오빠들을 비켜 돌았다. 시장에서 장 봤을 묵직한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들고 조금 불편한 다리를 뒤뚱거리며 의자로 향하는 어느 할머니가 앞을 지나갈 때까지 잠깐 멈춰 기다렸다. 대합실에 배치해 놓은 두 줄 남짓한 기다란 나무의자에는 읍에서 볼일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로 이미 차 있었다. 자리를 양보하고 일어선 어느 젊은 삼촌이 빠른 걸음으로 앞을 지나쳤다. 나무의자 앞 선반에 올려진 TV에서 뉴스 소리가 흘러나왔다. 표를 끊으려 줄 서 있는 중학생 교복의 언니들이 시시덕대며 웃었다. 문득 매표소 위 시계를 보니 출발시간까지 조금 남아 있었다. 줄 서 있는 사람들 뒤를 돌아 매표소를 지났다.
그리고 곧 4번 승차장 앞 벤치에 앉아 있는 그 애가 보였다.
이건 뭘로 만든 걸까.
조그만 직사각형 모양으로 반듯이 잘린 하얀 그것을 하나 집어 들었다. 자세히 보니 바삭해 보이는 길죽한 알갱이들을 물엿같이 끈적한 무언가로 버무려 만든 것 같았다. 버무릴 때 같이 넣었는지 띄엄띄엄 박혀있는 땅콩 알갱이도 하나씩 보였다.
한입 베어 물었다.
누군가와 이렇게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게 얼마 만인지, 원래가 낯을 가리는 성격은 아닌지라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항상 쉽게 친해졌지만, 그날은 왠지 더 들떴던 것 같다.
할머니가 내오신 그것은 과자처럼 바삭했고 살짝 달달하기도 했고 그 가운데 뜨문뜨문 씹히는 땅콩에서 고소함이 오르기도 했다.
맛있냐고?
솔직히 말하면 슈퍼에서 파는 초콜릿이나 과자에 비하면 밍밍하다.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것 같은 싱거움을 싸구려 단맛으로 덮어놓고 꼴에 과자라고 양심은 찔렸는지 고작 땅콩 몇 알로 고소한 맛을 기별이나 겨우 갈 만큼만 더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 촌스럽고 밍밍한 것이 나도 모르는 사이 벌써 몇 개째 입안으로 삼켜지는 중이었다. 반으로 베어져 씹혀지고 곧 부드러운 덩어리로 변해 목으로 넘어간 그것이, 식도를 꿀렁이며 내려가 뱃속을 채워갔다. 음식이 넘어가는데도 구역질이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챈 건, 한 소쿠리를 다 비우자 할머니가 더 큰 소쿠리에 그것들을 더 가득 담아오셨을 때였다.
옆집에 처음 가봤던 그날,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넉살 좋은 내 아양을 들으며 참 즐거워하셨다. 아무래도 무뚝뚝해 보이는 그 애는 재롱을 부리거나 했던 적이 잘 없었겠지.
그날 튀밥강정을 꽤 많이 먹으며 배부르다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다. 그리고 깨달았다. 싸구려 단맛 사이 씹을수록 더욱 깊어지는 담백함이 있다는 걸.
웬일일까. 현우 집에서 놀다가 오후 늦게야 집에 올 줄 알았던 그 애가 왠지 생각보다 일찍 터미널에 와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다가가 어깨를 때렸다.
“어머! 너, 날 기다리고 있었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내가 다가가는지도 모르는 채 멍하니 있던 그 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 어? 아니, 나 방금 왔는데...”
그리고는 은근히 내 눈을 피하는 것이다.
“응? 방금 왔다고? 정말?”
방금 왔다면 굳이 벤치에 앉지 않고 출발까지 이제 10분쯤 남은 버스를 탔겠지. 혹시 날 기다린 걸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괜히 쿡쿡거리며 장난쳐본다. 그 애가 언짢은 듯 입을 삐죽이니 더 재미있다.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나 지혜랑 영미랑 놀다 오는 길이야”
저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삐죽이던 그 애가 의아한 듯 돌아봤다.
“여자애들이랑도 놀 줄 아네...”
내가 점심시간마다 남자애들이랑 축구하러 나가는 걸 보고 하는 말일까. 엄밀히 말하면, 당연히 나는 여자애들과 더 친하다. 하지만 축구는 남자애들만 하니 거기에 끼었을 뿐이지. 그래도 요즘에는 영곤이를 비롯해 같이 축구하는 몇몇 애들과도 꽤 친해졌다.
“여자애들이랑도 친하게 지내야지, 왜?”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 애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설마 나한테 친구가 너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러니 그 애는 당황하여 내 얼굴을 피해 물러났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니가 남자애들이랑 더 잘 노니까...”
그 모습에 킥킥 웃음이 났다.
덥석 그 애 손을 잡고 버스로 이끌었다.
“출발하겠다 얼른 타자, 집에 가면 뭐 할까? 할머니가 해오신 튀밥 아직 많이 남았지? 근데 너는 현우랑 더 친해 아니면 나랑 더 친해?”
왠지 그 애를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집에 가서 튀밥강정도 마음껏 먹고 저녁도 얻어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