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그 애 27화

27. 공황발작

by 차태주

가장 부끄러웠던 건, 너에게 못 볼 꼴을 보여준 것도, 사람들 앞에서 웅크려 벌벌 떨었던 것도 아니었어. 내가 정말 못마땅했던 건, 내가 너를 지킨다는 건 애초부터 주제넘은 짓이었다는 걸, 사실 나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계집아이일 뿐이라는 걸 비로소 깨달은 거였어. 정말이지 내 자신이 실망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

웃기지. 고작 열두 살짜리가 뭐라고.





너무 어려 기억하지 못하는 유아 시절과 초등학교, 그리고 아직은 어린이날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여러 번의 어린이날을 지냈겠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때 학교에서는 뭘 하며 보냈는지 나는 뭘 하고 놀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곳 고장에 내려가서 처음 맞이한 어린이날은 유난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까지도 나는 시장이라는 곳을 TV에서나 봤었지 실제로 가본 적은 없었다. 서울에서는 백화점이나 몇 년 전부터 생겨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던 시절, 상인들이 모여 갖가지 식자재와 물건들을 파는 곳이 있다는 건 대충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리는지 어떤 냄새가 나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전혀 몰랐었다.

할머니가 사주신 핫도그를 뜯으며 그 애와 나란히 시장으로 들어섰던 그날을 기억한다. 조금은 불편한 허리를 뒷짐으로 지고서도 담담히 앞장서는 할머니의 뒤를 따라 도착한 시장 어귀에서는 길바닥 노점상으로 부려진 온갖 채소와 나물의 쓴 내가 풍겨왔고, 안으로 들어서니 온 군민이 그곳에 다 모였는지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북적하게 서로를 부비며 지나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쌀 볶는 냄새, 떡 찌는 냄새, 뭔가가 구워지는 달달한 냄새가 온 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아이고, 왔는교”

1명이 겨우 누울 만한 조그만 평상에 다리를 뻗고 앉아 수첩만 한 TV를 틀어놓고 있던 건어물집 할머니가, 덮고 있던 이불을 주섬주섬 걷으며 일어났다.

“하아, 목은 좀 어띠아?”

두 분이 손을 맞잡았다.

“인지 다 나았으, 고마 엊저녁에 뒤질란가 싶었디만”

“아이가! 사흘 만에 다 나았시믄 요새 젊은 사람들 보담 낫네, 모”

“아유, 실읎는 소리 한다, 또”

그리곤 뒤쪽을 넘어보는 건어물집 할머니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애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야 왔니라, 아여! 쟈는 늬기라?”

할머니가 나를 돌아봤다

“와, 저, 옆집!”

그러니 할머니는 놀란 듯 동그래진 눈으로,

“으이? 홍선생네 손녀라? 하이고 마이도 컸네”

“하아! 헤헤헤”

꾸벅 인사하고 고개를 드니, 왠지 두 분이서 나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다마네기는 가아갔는가?”

“하아, 엊그즈께 다 가아깠으”

“돈 마이 벌었시믄, 여어 곶감 새로 들어온 것 좀 가아가니라”

“아이가! 할마시 노망났는갑네, 저번 주에 가아깠는디 또 가아까!”

“저번 주에 가아갔시니 이번 주도 가아가야제”

“예래기 순!”

낄낄 웃으며 티격태격하는 두 분 모습은 무척이나 친밀해 보였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잠시 얘기를 더 나누다가 곧 발걸음을 옮기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여! 벌쎄 갈라꼬?”

“야아 애미가 오늘 음식 한다꼬 빨리 오라 캐”

그리곤 문을 열고 나오려니 건어물집 할머니가 왠지 양손에 곶감 하나씩을 들고 따라 나오는 것이다. 그때 알았다.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하다는 걸. 한쪽 다리를 짚을 때마다 몸을 기우뚱거려야만 하는 불편한 걸음걸이로 힘겹게 오셔서는 들고 온 곶감을 우리에게 하나씩 건넸다.

“아이가! 참 내, 뭐 타러 이런 걸 줘 싸”

할머니는 괜스레 타박했지만, 건어물집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인거 묵고, 할마이한티 장밭댁이 할마이 곶감 사달라 키야, 헤헤헤”

집 앞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 맛있는 간식거리가 많았던 당시, 나는 굳이 말린 과일의 비릿한 단맛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할머니의 그 따듯한 눈빛이 스며들었던 달콤한 곶감 맛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한입 한입 뜯을 때마다 그 단단하고도 물컹한 식감이 어쩌면 그렇게 맛있던지.


이미 핫도그와 곶감을 먹은 터라 배가 불렀지만, 어째서인지 할머니는 우리를 웬 국밥집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 애도 당연한 듯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다.

“야아는 누구라요?”

컵과 물병을 가져와 우리 테이블에 내려놓은 주인아주머니가 눈짓으로 날 가리켰다.

“요오, 옆집 딸래미!”

“야아? 대평댁이 손녀라? 아이고 무시라, 벌쎄 이맇키나 컸소?”

일어나 꾸벅 인사하니, 또 두 분이서 아까처럼 나를 보며 흐뭇한 표정으로 웃는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나의 가족을 알고, 그로 비롯한 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그들은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양 말했고, 원래부터 친근한 사이인 듯 나를 대했다. 그건 낯설면서도 어쩐지 푸근한 기분이 드는 경험이었다.

“메늘아아는?”

“요오 앞에 채소 쪼깨 사러 갔으”

“일은 잘 하는가?”

“오데라요, 배 안 곯믄 다행이제, 모”

“처음부탐 잘하는가 오데, 헤헤”

아주머니는 곧 주방으로 들어가 국밥 3그릇을 내 오셨다. 할머니는 하얀 국물에 순대가 들어간 국밥을 드셨고, 나와 그 애는 맑은 국물에 소고기와 무가 들어간 것을 먹었다. 사실 그곳 시장 돼지국밥집에는 소고기무국이 없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주머니가 그 애와 내 입맛에 맞는 것을 내어주기 위해 따로 만들어 준 것이었다.


우리 엄마 이름을 대며 나를 반겨준 생과자집 아저씨가 내게 센베 하나를 건넸다. 철판에 올려 식힌 것이었지만 방금 구운 것의 온기는 조금 남아 있었다. 소고기국밥까지 꾸역꾸역 먹은 터라 배가 부를 대로 불러있었지만 그래도 그 고소한 냄새가 궁금해 한입 맛보고 싶긴 했다.

그날 처음으로 그곳 고장이 참 좁은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곳을 고향으로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어쩌다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라도 한 다리 두 다리 건너면 어떤 인연으로 얽혀있는지 알 수 없는, 알고 보면 모두가 친구고 친척이고 가족인 곳이었다.

배가 불러 다 먹지는 못했지만, 처음 맛본 센베는 잘 구워진 밀가루가 퍽 달달한 제법 맛있는 과자였다. 솔직히 말하면 설탕이 듬뿍 들어간 슈퍼마켓 과자보다는 못했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앞으로 시장에 올 때마다 아저씨가 구워주는 생과자의 온기가 생각날 것 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저씨가 오는 시간에 맞춰 생과자집을 나섰다. 과자가 든 상자는 그 애가 들었다. 책가방보다도 훨씬 작은 상자라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았지만, 과자는 꽤 많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입구 쪽으로 가까워지면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점점 붐벼갔다. 곧 쌀 볶는 냄새와 떡 찌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뜻밖의 시장 나들이에 기분이 좋아졌다. 처음 가본 시장이라는 곳은 사람이 붐벼 혼잡하고 시끄러운 곳이었고, 달콤한 곶감과 구수하고 시원한 소고기국밥과 달달하고 바삭한 센베 과자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나를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나를 친애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상한 곳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곳 고장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우리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고향이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와서 외지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가족을 아는 사람들과 그에 따라 나를 알 것인 사람들과 그리고 앞으로 나를 알게 될 사람들과, 나는 이제 이곳에서,


쩡!!


순간, 경기를 일으키듯 심장이 덜컥 떨었다. 그 충격인지 가슴이 옥죄며 통증이 일었다.

들고 있던 과자를 놓쳤다.

고통에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가 가까이로 다가오는 듯했다.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심장이 요동치며 온몸이 떨렸다.

눈앞이 누렇게 보이다가 이내 빨개졌다.

삐이이 하며 귀가 먹먹해졌다.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뭔가가 어깨에 닿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내 어깨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희미해진 시야를 가다듬었다.

아빠.

손을 뻗었다.

닿지 않아 휘저었다.

아빠! 아빠! 나 좀 잡아줘, 너무 무서워.

곧 손이 닿는 느낌이 들어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품속으로 들어가 껴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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