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그 애 24화

24. 발칙한 기집애

by 차태주

“남편 기다리나? ㅋㅋ”

영곤이 비아냥대며 앞을 지나갔다.

그 옆을 같이 걷고 있는 승재도 무심한 듯 힐끗 쳐다보며 지나갔다.

지능지수가 높은 것의 장점 중 하나는 또래들의 유치한 놀림 따위에는 아무런 감응도 없다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IQ가 높은 게 귀찮을 때도 있지만, 확실히 지능이 높다는 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잘 가...”

복도를 걸어 다가온 지혜가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어제 내가, 우리는 이제 단짝이라고 선언한 이후 지혜는 더 수줍어했다.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허옇고 둥글둥글한 게 몸을 배배 꼬며 지나가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할 때였다. 지혜가 지나온 복도 저쪽에서 문득 나무 바닥이 부딪히는 통통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아까의 그 매서운 눈초리로 날 노려보는 영미가 왜인지 바닥을 힘껏 박차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걸을 때마다 배꼽까지 치솟는 무릎이 마치 장난감 병정이 행진하는 것처럼 보여 웃음이 나려 했다. 왜 저러는 걸까.

지금 제 모습이 적잖이 괴상하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조그맣고 여리여리한 기집애는 그 어색한 동작으로 곧 내 앞을 지나가면서도 목이 뒤로 꺾이기 직전까지 나를 째려봤다. 하... 저 같잖은 기집애를 정말 어쩌면 좋을까.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흰색 원피스의 치맛자락과 긴 생머리가 하늘하늘 흔들리는 게 조금 예뻐 보이기는 했다.

“‘손 씻고 발 씻고 숙제합니다’”

곧, 그 애가 있는 1반 교실 안에서 종례가 끝날 때마다 울리는 제창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지능지수가 높았던 나로서는 내 또래 아이들이 아직도 학교에서 저런 걸 배우는 줄 알았었다. 그때쯤 나는 중학교 과목을 배우는 때였으니까, 초등학생이면 아직도 스스로 손과 발을 씻거나 숙제를 하거나 하는 걸 못 하는 애도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곧 1반 교실 문이 열리며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창문 너머로 선생님이 웃으며 양손을 흔드는 모습이 얼핏 보였다.

이번에도 도망가지 못하게 바로 손을 잡아챌 요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곧 익숙한 얼굴이 아이들의 머리 위로 비죽 튀어나와 다가오는 게 보였다.


“나, 오늘은 친구 집에 놀러 가기로 해서...”

녀석의 이름은 이현우였다. 복도에서 신발을 꺼낼 때 신발장에 붙여진 이름표를 확인했다.

그 애에게도 친구는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내게서 그 애를 이렇게 갑자기 뺏어 갈 줄은 예상 못했다. 집에도 놀러 갈 정도로 친하다는 건 단짝이라는 뜻일까. 나도 앞으로 그 애 집에 매주 놀러 갈 작정인데, 그러면 나도 꽤 친하다고 할 수 있게 될까.

옆이 허전했다. 혼자 집에 가는 건 꽤 쓸쓸한 거구나. 그나저나 집에 가면 어쩌지. 숙제하고 바로 잠들었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분명 밥 먹으라고 하실 텐데, 오늘만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

“꼼짝 마!”

별안간 들려오는 소리에 문뜩 고개를 들었다. 터미널로 향하는 길. 골목을 나와, 주택 사이에 조그만 밭이 있는 10평 남짓한 공터로 들어섰을 때였다.

처음엔 무슨 상황인지 퍼뜩 이해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울고 있는 지혜가 어째선지 상체를 뒤로 젖힌 채 서 있는 것이다.

한 발짝 다가갔다.

“가까이 오지 마! 꼼짝 마!”

지혜가 냈을 리 없는 목소리가 지혜의 뒤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문득 지혜의 목에 얇실하고 허연 뭔가가 걸쳐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팔뚝 같았는데, 뒤에서 한쪽 팔로 지혜의 목을 감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그때 서야 알았다.

꼼짝 말라니,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싶어 조심스레 한 발 더 내디뎠다.

“오.. 오지 말라니깐!”

목소리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으며 지혜를 끌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니 조용히 눈물만 흘리고 있던 지혜가 몸을 비틀며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그때, 몸을 비트는 지혜의 어깨 너머로, 조만한 몸집으로 저보다 훨씬 큰 지혜를 끙끙거리며 겨우 붙잡고 있는 영미, 이 발칙한 기집애를 보게 된 것이다.

“하아...”

상황 파악이 되자 한숨이 나왔다. 요즘 만화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유치한 대사를 지껄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아니 그리고, 영미도 영미지만 신지혜... 저 답답한 기집애는 그 큰 덩치로 저 조막만 한 것쯤이야 뿌리치면 될 것을, 고대로 붙잡혀 쩔쩔매고 있다니.

“너 지금 뭐하니?”

어이가 없어서, 설마 진심으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장난이라도 치자는 건지 정말로 궁금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곧 영미가 다른 쪽 손을 들어 지혜의 어깨너머로 내게 손가락질했다.

“야 너! 다 사실대로 말해라이! 안 그라면 지혜를...”

“지혜를 뭐? 어쩌겠다고?”

말을 잇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러는 게 가소로워 몰아세웠다.

그러니 당황한 듯,

“어어, 으으...해 버린다!”

“어? 뭐라고?”

저도 어쩌겠다고 할지 몰라 은근슬쩍 얼버무리는 주제에.

“너 정말 미쳤니?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뭘 사실대로 말하라는 건데?”

“니가 지혜를 어짤라고 하는지 다 말하라고!”

이윽고 겁에 질린 지혜가 울먹이며 끼어들었다.

“영미야, 으허엉, 살려줘, 흐으윽, 잘 못 했어”

지혜는 제 목에 감긴 팔을 붙잡고 벌벌 떨었다. 이따금 엉엉거리며 표정을 찡그릴 때마다 질끈 감져지는 눈에서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지혜한테 손짓했다.

“야, 그냥 이리 오면 되잖아, 왜 붙잡혀 있어!”

지혜가 손바닥을 들어 손짓했다.

“흐윽, 난 괜찮아, 너라도 빨리 도망가”

그러니 영미가 지혜를 흔들며 다그쳤다.

“니는 가만 있어라! 다 너를 위해가 이라는 거다 아이가!”

제 몸이 흔들려지자 놀란 지혜가 더 크게 엉엉거렸다.

안 되겠다 싶어, 퍼뜩 다가갔다.

“야! 애 울잖아! 놔 줘!”

갑자기 다가가니 영미가 놀랐는지,

“어어! 오지 말라고!”

지혜를 확 흔들며 뒤로 물러났다.

지금이야, 도로는 물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골목 골목마다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지 않은 길을 찾아볼 수 없지만, 주택들 사이에 밭이나 정원을 갖추고 있던 당시 시골길들은 아무리 읍내라고 해도 차가 다니는 큰 도로와 인도를 제외하면 온통 진흙과 모래로 된 흙길이 대부분이었다.

그 공터도 그랬다. 학교 앞 큰 골목은 닦여 있는 길이었지만, 터미널로 가는 골목부터 그 공터까지는 비가 오면 푹푹 빠질 정도로 질펀한 진흙투성이였고, 이따금 인가에서 가꾸는 조그만 밭들이 작은 울타리를 이루며 길 중간중간 자리 잡고 있었다.

문제는 그 울타리였다. 요즘이라면 목재라도 예쁘게 다듬어 새워놓았겠지만, 아직 위생이나 안전 따위에는 관심 없었던 그 당시 시골에서는, 사람이 다니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건축 현장에서나 볼 수 있는 까칠한 철근 따위를 대충 구부려 밭을 경계 지을 울타리로 조악하게 이뤄 놓았던 것이다.

그러니 뒤는 확인도 않고 엉거주춤 뒷걸음치는 영미와 지혜가 그 울타리에서 튀어나온 철근 가닥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지혜의 한쪽 팔을 제 목뒤로 걸쳐 부축한 영미가 울먹였다.

“으윽, 흑, 미안해 지혜야, 얼른 가자, 내가 약 발라 줄게”

영미에게 부축되어 절뚝이는 지혜도 같이 울먹였다.

“아니야 괜찮아, 흐흑, 너도 조심해”

놀고들 있네, 이 어수룩하고 단순한 멍청이들. 그, 뭐라 그러더라, 스톡홀... 증후군?

내 나이의 아이들이 고작 초등학생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다. 허영미, 고작 생각해낸다는 게 친구를 인질 삼아 나를 이실직고하게 하는 거라니. 이런 한심한 멍청이를 두고 뒤에서 모략이라도 꾸밀 위인으로 치부했다는 게 쪽팔릴 뿐이다. 그러니 둘이 자빠져 있는 광경을 보고 아주 비위가 상했던 거지.

“파상풍? 그게 뭔데?”

살짝 놀란 얼굴로 지혜가 되물었다. 옆에서 지혜의 긁힌 종아리를 살피던 영미도 어리둥절한 듯 이쪽을 돌아봤다.

“파상풍 몰라? 녹슨 철에 상처 입으면 걸리는 병 말이야, 파상풍에 걸리면 살이 막 부어오르고, 썩고, 나중에는...”

지혜와 영미가 몹시 겁먹은 표정으로 내게 집중했다.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 지혜는 울음을 터뜨렸고, 영미는 사색이 되어 옆에서 벌벌 기었다. 곧 영미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울먹이기 시작했다.

꼴 좋다, 괘씸한 기집애.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친구를 인질로 삼아? 어떻게 저 멍청한 기집애를 골려줄까 생각하다가, 지혜의 종아리가 녹슨 철근에 살짝 긁힌 것을 보고 겁을 주기로 한 것이다. 뭐, 지혜한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이윽고 영미가 내 다리를 붙잡고 애원하듯 물었다.

“어떡해, 어떡해... 그럼 어떡해야 돼?”

흰색 원피스 자락이 군데군데 시커멓게 흙이 묻어 지저분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균이 퍼지기 전에 빨리 약을 발라야 된다고 하니, 영미가 잽싸게 지혜를 부축하여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아깐 괜찮다더니, 지혜는 갑자기 긁힌 다리가 몹시 아프다며 절뚝이기 시작했다.

영미 집은 터미널을 지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나무 대의 붉은색 깃발이 꽂혀있는 제법 큰 초록색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음 자 형태로 방들과 창고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고 있는 꽤 오래된 주택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영미가 소리쳤다.

“엄마아! 파상풍! 파상풍!”

그리곤 지혜를 마당 한쪽에 앉혀두고 방에서 빨간약과 연고를 들고나와 지혜의 긁힌 곳에 제법 정성 들여 발랐다. 그런데 약을 다 바른 기집애가 이번엔 웬 붕대까지 가져와 감으려 하는 것이다.

붕대는 안 감아도 된다고 하니 영미는 버럭 성을 냈다.

“다쳤으니까 붕대도 해야지! 안 도와줄 거면 가만히나 있어!”

지혜도, 약을 바르니 이제 안 아프다고 하는데도 영미는 막무가내였다. 멍청한 게 고집까지 있으니 아주 골치가 아팠다.

“너 바보니? 살짝 긁힌 거 가지고 무슨 붕대까지 감아?”

“뭐라노! 너 파상풍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나? 잘못 해갖고 지혜 죽으면 니가 책임질래?”

아유, 저 입을 그냥.

그렇게 한동안 붕대를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으니, 곧 마당 안쪽 안방으로 보이는 방의 여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가시나야! 엄마가 손님 있을 땐 조용히 하라꼬 했나 안 했나!”

문을 열고 마루로 나온 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어느 예쁘장한 아주머니였다.


“으이그, 이 문디 가시나! 생일이라꼬 사줐드만 고새를 못 참고 다 베리가 왔네”

영미의 미모가 어디서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을 만큼 영미의 어머니는 제법 예쁜 분이었다. 그리고 그 매서운 눈매와 도톰하고 야무진 입매마저 닮은 걸 보면, 아마도 그 거침없는 입담 또한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았을 거였다.

모녀로 보이는 손님들을 대문까지 마중한 아주머니는, 곧 우리를 마루로 안내하곤 친절하게도 사과와 배를 예쁘게 썰어 대접해주셨다. 내가 자란 그곳 고장은 사과도 많이 났지만, 배도 꽤 유명한 곳이었다. 그날 영미 집에서 먹었던 달콤한 배 맛은 지금도 가끔 생각날 만큼 기억에 오래 남는다.

“지혜야, 와 그동안 놀러 안 왔노, 아줌마 니 많이 보고 싶었다 아이가”

가지런하게 썰린 배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한입 베어 문 지혜를 보며 아주머니가 싱긋 웃었다.

그러니, 조용히 배를 씹던 지혜가 문득 영미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영미는 지혜 눈을 피하는 듯 딴청을 부리며 입을 오물거렸다.

둘을 번갈아 보던 아주머니가 이내,

“와? 쟈아가 니 오지 말라 카드나? 으이그, 저 못된 가시나”

그러자 영미가 아주머니를 흘깃 노려보고는 다시 입을 마저 오물거렸다.

아주머니는 곧 내게도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까이 다가오셨다.

“니는 누고? 우리 영미 친구가아?”

선뜻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나도 영미 눈치를 살피게 됐다.

“와아? 니는 또 와 쟈아 눈치 보는데? 뭐 원수라도 되나?”

장난스럽게 묻는 아주머니에게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닌데요, 영미가 절 싫어해요”

이번엔 영미가 이쪽을 보며 눈을 흘겼다.

아주머니는 깔깔 웃더니,

“쟈아는 원래 그래, 신경 쓸 거 읎으, 히히히, 앞으로 자주 놀러 온나”

“네에,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 숙였다.

그러니 아주머니의 표정이 더 밝아졌다.

“니는 어째 그래 인사도 그리 잘하노, 헤헤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며 환히 웃던 아주머니가 웬일인지 한참 동안 날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엔 밝기만 하던 아주머니의 눈빛이 왜인지 씁쓸한 미소로 바뀔 때까지 나는 영문을 몰라 그저 아주머니의 눈을 마주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땐 의미를 몰랐지만, 그날 아주머니가 내게 지어 보였던 표정들이 날 가엽게 여기는 표정이었던 걸까, 어렴풋한 기억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이윽고 아주머니는 다시 인자한 표정이 되어, 마치 날 위로하려는 듯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날 아주머니가 내게 해주셨던 말씀이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건, 지능만 높았지 사실 속내는 아주 어렸던 내게 그다지 와닿는 얘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그때 아주머니의 말을 새겨들었다면 나는 나를 사랑해주던 그 애에게 그렇게 가혹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오랜 시간 그리워하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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