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그 애 23화

23. 지혜와 영미

by 차태주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주순자 선생님이 인정 없고 포악한 성질머리를 가졌다 해도, 사실관계는 따지지도 않고 여자애 둘의 말만 듣고는 김호정을 사정없이 응징했다. 그건, 냉철하고 엄정하게 아이들을 훈육하던 평소의 선생님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안다. 언젠가 시험 삼아 한번 써먹어 볼 생각이었는데 기대 이상으로 효과가 좋았다. 신지혜, 그 애는 정말 유용한 아이다.

지혜는 사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는 힘으로 제법 쓸만한 것을 갖고 있다. 나는 그것을 알지. 우리 아빠도 그 비슷한 것에 당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지혜와 단짝이 되기로 했다. 날카롭지 않은 나의 강력한 무기.

“근데 있잖아... 아까... 호정이는 왜 맞은 건데에?”

아까부터 내 눈치를 보며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윽고 조심스레 묻는 것이다.

화장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돌려 잠근 나는 물에 젖은 손을 털며 지혜 쪽으로 돌아섰다.

“왜 맞기는? 그동안 너한테 돼지라고 자꾸 놀렸잖아”

“어? 어... 그렇기는 한데...”

뭐가 그리 불편한지 지혜는 어깨가 잔뜩 움츠러든 채 꺼림칙한 표정으로 뭔가 더 묻고 싶은 게 있는 듯 입술을 꼼지락거렸다.

양손으로 지혜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지혜야 나 봐봐, 걔 맞을 짓 한 거야, 그러니까 선생님도 그렇게 혼내신 거지, 괜히 그러셨겠어? 너 인격 모독이 사람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 몰라? 특히나 우리 같은 유년기.. 아니 소년기 어린이에게는 정서적으로 평생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남길 수도 있는 거야, 생각해 봐, 너 아주 큰 일 날 수도 있었어”

지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 응, 고마워...”

찜찜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지혜에게 다가가 감싸 안았다. 팔을 벌려 다가갈 땐 움찔 떨더니 내 품에 감싸지자 이내 얌전해졌다.

어깨너머로 도착한 지혜의 귓가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너는 정말 착하고 예쁜 친구야, 그런 네가 상처 입는 건 싫어, 이제부터 내가 너....... 지.. 지켜줄게, 그러니깐 나랑 같이 다니자, 알았지?”

으... 지켜주겠다고 하다니. 오글거리다 못해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아내야겠지.


그날 이후 지혜는 내게 꼭 붙어 다녔다. 그 모습이 아이들이 보기엔 지혜가 날 따라다니는 걸로 보일 테지만, 사실 내가 지혜를 옭아맸다고 보는 게 맞을 거다. 지혜는 어쨌든 친구가 필요했고, 그런 지혜를 달콤한 말로 구슬린 건 나였으니까.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 사이를 금방 눈치챈 어느 음흉한 기집애가 있었다.

체육을 앞둔 쉬는 시간. 옷을 갈아입던 중 넌지시 빈정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옆을 지나가는 것이다.

“참... 불쌍한 애 꼬드겨가 놀면 재밌기도 하겠다”

퍼뜩 고개를 돌리니 긴 생머리를 뒤로 늘어뜨린 어느 비실비실한 기집애 뒷모습이 교실 뒷문을 나가고 있었다. 쟤 이름이 뭐였지? 워낙 조용한 애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는데 별안간 저러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날 체육 시간도 남자애들은 축구를 했고, 여자애들은 운동장 한쪽에서 피구를 했다. 나는 자연스레 남자애들 쪽으로 합류했다. 선생님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선생님의 지도하에 편을 가르고 골대를 정했다.

“니는 오늘도 수비 해”

승재가 거만한 말투로 골대 쪽을 가리켰다.

재수 없는 놈. 저가 축구를 제일 잘한다는 이유로 매번 제멋대로 아이들의 포지션을 정했다. 그러면 체육을 못하는 아이들은 고분고분 놈의 지시를 따라 골대 쪽으로 갔고, 체육을 잘하는 아이들은 저들끼리 상의하여 가운데 좌 우 같은 포지션을 정했다. 그 모습이 눈꼴 시렸다.

“싫어, 오늘은 공격 할 거야”

그러니 옆에서 영곤이가 비웃었다.

“니가? ㅋㅋ 공도 제대로 못 차면서 어째 공격을 하노”

오기가 생겼다.

“자꾸 수비만 시키니까 못 차는 거잖아, 나도 공격 해 볼래”

그렇게 티격태격하고 있으니 다시 승재가 끼어들었다.

“아, 알았으, 그러면 오늘은 공격 해 봐”

“야아, 지면 우짤라꼬?”

영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나도 놈의 눈을 마주하며 째려봤다.

“쟈아 때메 지면, 다음부턴 안 시키주면 되지, 뭐”

그렇게 말하곤 승재는 의기 있게 운동장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선심 쓰듯 그러는 게 아니꼬왔지만, 일단 기회가 왔으니 최선을 다해 뛰어야지.

나는 축구를 꽤 좋아한다. 서울에서도 체육 시간이면 매번 남자애들이 하는 축구에 끼었었다. 거기서도 수비만 하기 일쑤였지만, 어쨌든 이 넓은 운동장에서 마음대로 뛰어다니지도 못하는 피구를 살랑거리는 여자애들과 하는 건 내겐 지루하기만 한 일이다.

공격수는 생각보다 어려웠다. 수비는 공을 찰 줄 몰라도 몸으로 막거나 멀리 차내기만 하면 됐지만, 공격수는 공을 잘 차는 건 물론 잘 몰기도 해야 했고 패스도 잘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체육에는 관심 없어 그저 저들끼리 시시덕대다가 공이 올 때만 대충 막는 시늉 하는 다른 수비수 남자애들과 달리 그동안 수비에라도 꽤 열심히 참여한 덕분에 어느 정도 공을 다루는 감은 있던 터였다. 내가 생각보다 공을 찰 줄 아니, 결정적일 때만 아니라면 아이들이 종종 내게도 패스를 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창 축구에 몰두하던 중 저쪽 스탠드에 홀로 앉아 있는 아까 그 기집애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체육 시간이면 수업엔 참여하지 않고 매번 저 혼자 스탠드에 음산하게 앉아 있는 기집애. 이번에도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댄 걸까. 친구가 없는 건지 항상 혼자다. 성격이 아주 소심한 이유로 친구가 없는 건 줄 알았는데, 아까 내게 비아냥댄 걸 봤을 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나저나 아까 내게 했던 말은 무슨 뜻이지? 싸우자는 건가.

문득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마침 공을 몰고 있는 영곤에게 소리쳤다.

“야! 패쓰!”

상대편 수비와 맞닥뜨리는 중이었던 영곤이가 이쪽으로 공을 보냈다.

내게 다다른 공을 있는 힘껏 찼다. 스탠드까지 날려 보내려면 꽤 세게 차야 했다. 그렇게 멀리 보내는 건 처음이라 발목이 저릿했다.

공은 날아가 기대한 대로 그 기집애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맞출 생각은 없었다. 그냥 주변에 떨어트려 놀라게만 할 생각이었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아닌지 정확히 기집애 발에 부딪히며 다시 튀어 올랐다.

별안간 공이 저한테 떨어지자 기집애는 놀라 몸을 웅크렸다.

“아악!”

비실비실 힘도 없을 것 같이 생겨서는 의외로 비명소리는 꽤 컸다.

웅크려 떨던 기집애가 황급히 주변을 살피다 이윽고 일어나 멀리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골이 난 게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운 눈빛이 멀리서도 찔러왔다.

“아 뭐고! 와 그쪽으로 차는데”

영곤이의 원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잘 쫌 차”

다른 애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아아! 미안, 왜 이러지? 나 오늘은 그냥 수비 해야겠다, 헤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멋쩍게 웃어 보인 후 골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서며 다시 그 기집애를 힐끔 보니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얼굴이 허연 게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서 있으니, 마치 비디오에서나 보던 처녀귀신이 그러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하얀색 원피스 차림이니 더 그랬다.

그나저나 저 기집애는 공을 맞은 후 어째선지 곧바로 날 찾아냈다. 허공을 보며 멍하니 있던 애가 내가 찬 줄은 어떻게 안 거지? 축구 하는 걸 보고 있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조금 곤란하게 된 것 같다. 곧 내게 따지러 올 테지.


“뭔데?”

그럴 줄 알았지.

“야! 뭐냐고”

복도로 따라 나올 줄 알았지.

“응? 무슨 일이야?”

태연히 웃으며 뒤돌았다.

“니가 나한테 공 찬 거다 아이가, 내 모를 줄 알았나”

“아 맞다, 아깐 놀랐지? 미안해 실수였어, 사과할게”

그러니 영미는 더 약이 올라 눈썹을 구겼다.

“거짓말 치지 마! 니 일부러 그런 거다 아이가”

쭉 찢어져 부릅뜬 눈매가 아주 매서웠다.

일부러 찬 건 줄은 또 어떻게 안 걸까. 모르겠지만 일단은,

“어머, 근데 너 아깐 몸 안 좋다더니, 지금은 괜찮나 보다? 기운이 넘치네, 히히”

여전히 웃으면서 그러니, 영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뭐? 하아!”

기가 찼는지 입이 벌어진 채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모르겠지만, 그만 기분 풀어, 지혜는 내 친구니까 사이좋게 지내야지”

“뭐라는 거고 지금, 할망구같이 생긴 게”

그리곤 곧 알겠다는 표정으로,

“아아, 니 아까 내가 한 말 때메 그라나? 그래, 못 돼 처먹은 게 지혜 갖고 노는 거 들키가 그란 기네”

나도 조금 약이 올랐다.

“무슨 말이야아, 그런 거 아냐, 너는 친구가 없어서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지혜와 나는 각별한 사이야, 하긴, 너 같은 외톨이가 어떻게 알겠어, 이해해, 히히”

그러니 영미가 다시 눈썹을 잔뜩 구기며 매서운 눈초리로,

“뭐? 하! 니 진짜... 하아, 진짜... 두고 보자”

그렇게 한동안 씩씩거리며 날 노려본 뒤, 곧 뒤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얀 원피스의 레이스 달린 치마가 살랑거리며 뒤따랐다.

여기서 소리라도 지르거나 내 머릴 쥐어뜯으려 하거나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생각보다 참을성이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아니면 힘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걸까.


그 기집애 이름은 허영미라고 했다. 어떤 애인지 지혜한테 물어보니 말을 아끼는 듯, 자기도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쁜 애는 아니라고 했다. 바보야, 그건 네 생각이고.

영미가 어떤 애인지 더 알 필요가 있었다. 두고 보자고 했으니 뭔가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나에 대한 소문을 안 좋게 낼까? 아니면 나와 지혜 사이를 이간질 하려는 속셈일까. 어쨌든 일이 터졌을 때 대처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지혜한테서는 백날 캐내려 해봤자 별 볼 일 없는 얘기만 할 게 뻔하니 다른 애들한테 물어보기로 했다. 아무한테나 물어보면 내가 뒤를 캔다는 걸 영미에게 들킬 수도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 아직 반 애들끼리의 관계를 잘 모르니,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다는 게 이럴 땐 참 불리하다.

내가 친하게 지내는 애들 중에 가장 입이 무거운 승희한테 물어볼까? 아니다. 과묵한 만큼 남 얘길 잘 안 하는 승희는 내가 캐묻는다 한들 그다지 유용한 정보를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저 내가 물어봤다는 흔적만 남길 테지.

그렇다면 말이 많고 발랄한 연주에게 물어볼까?

“누구라고? 허영미? 아아 쟤? 아유 내가 아주 잘 알지, 뭐가 궁금한데? 와 혼자냐고? 아아, 나도 잘은 모르는데, 들리는 말로는...”

그리곤 수저를 내려놓은 연주가 식판 너머로 가까이 귀를 대라며 손짓했다.

‘쟤, 귀신이래’

에라이... 낭패다. 최연주, 이 망할 기집애를 어쩌지?

입이 가벼운 만큼 신뢰하지 못할 얘기가 많을 거란 걸 예상했어야 했다.

“아아, 하하하하, 그것참 재밌는 얘기다, 나는 그냥, 쟤가 혼자 밥 먹길래 왜 그러나 궁금해서... 신경 쓰지 마, 히히”

“맞제? 니도 궁금하제? 내가 살짝 가서 물어볼까? 와 혼자 밥 먹는지? 아, 그리고 진짜 귀신인지도 궁금하지 않나? 한 번 물어볼게, 히히히, 있어 봐”

뭐가 그리 재밌는지 혼자 신나서 일어서려는 연주를 다급히 붙잡았다.

“연주야! 그러지 마, 그냥 가만히 있어”

입꼬리는 웃으며 눈으로 연주를 노려봤다.

“어? 어, 어어...”

내 표정에서 위압감을 느꼈는지 연주가 얌전히 앉았다.

옆에서 조용히 밥을 먹던 지혜가 문뜩 딸꾹질을 했다.


결국 지혜에게 영미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와 함께.

결론적으로 영미는, 적어도 내 기준으로 볼 때 그다지 위험한 애는 아니었다. 뭐, 예상대로 귀신이나 빙의, 저주 같은 미신적인 얘기를 듣긴 했지만, 그건 미신일 뿐이고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다. 걔네 엄마가 무당이라고 해서 짚으로 된 인형에 바늘이라도 꽂으며 날 저주하기라도 할 건가. 그리고 그게 통하기나 할까.

그 바보 같은 기집애는 자기 엄마가 무당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고립시켜 상처받길 거부하는 힘든 선택을 하고 있었다. 흠... 잘 모르겠다. 만약 우리 엄마가 무당이라면 나는 그것을 창피하게 여길까.

어쨌든 영미는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할 거란 걸 지혜를 통해서 나는 확신했다. 지혜의 말에 의하면, 영미는 한 번도 누군가를 해코지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영미란 애는 단지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스스로 혼자가 된 불쌍한 아이라는 것이다.

문득, 아까 내가 한 말이 심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미안해졌다. 영미, 그 미친 기집애가 나와 지혜에게 벌인 짓을 보기 전까지는.

아차... 지혜의 무기에 내가 당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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