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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Mar 29. 2023

홀로 떠난 청산도에서

  이천십팔 년 사월 이십일 금요일, 혼자 청산도에 봄나들이를 갔습니다. 이곳은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알려진 곳입니다. 잔뜩 부푼 가슴을 안고 배를 탔습니다.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를 기대했건만, 실상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작은 섬에 뭐 볼 게 있다고 관광객들이 몰리는 거람?’

의아했습니다. 도청항에 도착하자, 단체로 관광 온 손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마치 도떼기시장에 들어선 기분이 들었습니다. 

  순환 버스를 타고 슬로(slow)길 첫 번째에 닿았습니다. ‘청산도는 쉼표다’, ‘아시아 최초 슬로길’, ‘조금 느려도 괜찮아’등의 표어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유로운 마음가짐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하늘보다 더 파란 바다, 그리고 넘실대는 노랑 유채꽃밭이 장관을 이뤘습니다.

  ‘와, 환상적이야!’

생애 최초로 본 경치에 감탄했습니다. 가슴이 요동쳤습니다. 평소에는 거의 겪을 수 없는 이런 설렘을 느낄 수 있어서, 여행을 좋아합니다.

  양산을 써서 자외선을 막아보려 했건만, 뜨거운 봄볕에 금방 지쳤고, 갈증이 났습니다.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인근 식당으로 들어가 요기를 했습니다. 김으로 만든 전을 먹었는데, 상당히 양이 적었습니다.

  ‘관광지라서 터무니없이 비싸구나!’ 

한적한 풀밭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습니다.

  버스와 배를 타며 장시간 이동한 피로를 풀기 위해 일찌감치 숙소로 향했습니다. 예약한 게스트하우스는 열 번째 슬로길 지리 해수욕장에 위치했습니다. 숙소에서 키우는 개 한 마리를 앞세워 해수욕장을 감상했습니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이곳은 일몰 명소라고 합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외국인들을 만났습니다. 까무잡잡한 모로코인 두 명과 대조되는 흰 피부의 프랑스인 한 명. 그중 한 명이 입은 겉옷에는 눈에 띄는 큰 글씨로 KAIST라고 적혀있었습니다.

  “Do you live in Dae-jeon?(대전 살아요?)”

말을 걸까 말까, 한참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그들 중 두 명만 대전에서 지내며, 카이스트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 중이라고 했습니다.

  나처럼 혼자 여행 온 사람들도 두 명 있었습니다. 둘 다 서울에서 온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이 섬이 유채꽃 외에는 볼 것 없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저는 매년 이맘때쯤 청산도에 혼자 와요. 붐비는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정취를 여기서 찾거든요.”

  “이번엔 혼자 왔지만, 다음번엔 친구들과 함께 오려고요. 청산도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예쁜지 보여주고 싶어요!”

과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발견하지 못한 청산도의 매력이 물씬 풍기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모르는 세상을 배울 수 있어서, 여행을 즐깁니다.

  둘째 날에는 자전거를 빌려서 명품 첫 번째 길, 두 번째 길, 일곱 번째 길 신흥리 해수욕장, 여덟 번째 길 상산포, 아홉 번째 가을 길을 쭉 훑었습니다. 곳곳에 언덕이 즐비해서 금세 후회했습니다.

  ‘자전거 대여하지 말고, 버스를 탈 걸 그랬나…….’

  그래도, 고생한 보람은 나름 있었습니다. 무르익는 봄의 생동감에 내내 탄성을 질렀고, 총천연색의 자연을 한껏 만끽했습니다. 고채도의 발색이 특히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가을 길에서는 가을에 코스모스 만발하고 단풍이 물드는 모습, 국화가 흐드러지게 핀 풍경을 상상하며 국화리를 지났습니다. 흑염소를 흔히 볼 수 있었는데, 반가워서 다가가자 다들 놀라서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아무래도 인적이 드문 시골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아쉬운 마음을 놓고, 노래를 흥얼거렸습니다.

  “파란 하늘, 파란 하늘 꿈이 그리운 푸른 언덕에, 아기 염소 여럿이 풀을 뜯고 놀아요, 해처럼 맑은 얼굴로.”

  빡빡한 일정을 모두 마치자 녹초가 됐습니다.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습니다. 어제 마주친 사람들은 이미 귀가한 모양이었습니다. 덩그러니 방에 머물며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아직 해는 저물지 않았습니다.

  ‘아, 지루해!’

  거실로 나와 한편에 앉았습니다. 낯익은 외국인들이 식탁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카이스트 글씨가 대문짝만 한 후드 점퍼를 여전히 입은 채였습니다.

  ‘아직 안 돌아갔군! 심심한 터에 잘 됐다.’

다가가 입을 열었습니다. 마침 오늘 아침에도 몇 마디 주고받은 상태여서 어색하지 않았고, 내 쪽에선 그들을 다소 친근하게 느끼던 터였습니다.

  모로코인 유세프와 타하는 프랑스로 유학 갔는데, 대학교 교환학생 신분으로 한국에 잠시 방문한 거라고 했습니다. 유세프와 프랑스인 티보가 카이스트에서 공부 중이고, 타하만 인천 인하대학교에 있다고 했습니다. 세 명 모두 대학원 과정이라고 했고, 대단히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짬을 내어 여행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비록 잘 알지 못하고, 가 보지도 않은 국가이지만 그들을 통해 모로코와 프랑스에 대해 어렴풋이 전해 들었습니다. 모로코는 프랑스의 식민지라서 프랑스풍의 건물이 많다는 점, 모로코인 유학생의 

대부분이 프랑스로 공부하러 간다는 점, 모로코는 빈부격차가 크다는 점 등을 통해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국제 관계를 잠시 떠올렸습니다.

  우리는 슬로길 열 번째 길 송정 해수욕장을 함께 거닐며 노을을 감상했습니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늘 높이 뜀박질하는 우스꽝스러운 단체 사진을 찍고, 즐거워하며 너털웃음을 지었습니다. 해가 완전히 저물도록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고, 별을 보며 숙소로 느지막이 되돌아왔습니다.

  문밖을 나서면 일상에서 겪기 드문 감정을 맛볼 수 있고, 드넓은 세상을 관찰하며 견문을 넓힐 수 있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며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기에 여행은 늘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듭니다. 그래서, 여행을 사랑합니다.                                                      - 단행본<저 등산 안 좋아하는데요?>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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