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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Apr 15. 2023

벼랑길, 여수 비렁길(1)

전남인들과 함께 금오도에 가다

  불타는 금요일, 칵테일 모임에서 남자 넷과 단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동생들에게 공짜 술을 두 잔이나 얻어먹었습니다. 원래 평소에도 취한 것 같은 상태지만, 술을 마시니 더 기분이 좋았습니다. 헤어지기 아쉬웠으나, 다음날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약 서너 시간 자고 일어나, 집을 나섰습니다. 08:40까지 여백야도 선착장에 가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감깁니다. 도수 낮은 술만 골라 마셨기에 숙취는 심하지 않았으나, 아무래도 술이 덜 깬 느낌이 듭니다. 다행히,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무료 주차장에 차를 세웠습니다. 지난번엔 유료인지 몰라서 선착장 전용 주차장에 주차했는데, 이번에는 십 원 한 장이라도 아끼기 위함이었습니다.


  매표소에 들어서자, 손님이 꽤 많습니다. 주말이라서, 대기 줄이 길었습니다. 

  "슈히 님이시죠?"

  앞에 선 여자가 말을 건넸습니다.

  "아, 네! 맞아요."

  "사진을 봐서, 슈히 님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순천인이고, 산악회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광양인도 도착했습니다. 여자 셋이 모였습니다. 우연히 매표소에서 여수인 스윔이 님과 만나서, 남자들과도 합류했습니다. 우리는 총 일곱 명이 됐습니다. 갑자기 인원이 늘어서, 괜히 든든했습니다. 스윔이 님은 원래 여수 신기항에서 배를 탈 예정이었으나, 여천항에서 비렁길 3코스로 오는 마을버스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차를 배에 싣고 와야 합니다. 하지만, 선적 비용이 아까울 뿐만 아니라, 비렁길 3코스부터 1코스까지 모두 갈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가용을 되찾기 위해서, 반드시 원점회귀를 해야만 합니다.


  금오도 함구미 선착장에 내려서,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학동에서 내려 비렁길 3코스부터 시작해 2, 1 역순으로 다시 함구미 선착장으로 오는 일정이었습니다. 스윔이 님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길 찾기는 대부분 남자에게 맡기는 편입니다. 스윔이 님이 믿음직스럽게 앞장섰습니다.


  때는 3월 초,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길가에 꽃이 펴있는데도,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여기, 꽃도 안 보고 가요?!"

하늘이 흐려서, 사진을 찍어도 안 예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촬영하지 않고 눈으로만 감상했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에도 연둣빛이 물씬 피어올랐습니다.

  '아, 봄이야! 이걸 보러 남쪽까지 내려온 거야.'


감상에 젖어 있는데, 어느새 혼자였습니다. 일행들은 저만치 성큼 가있었습니다. 부지런히 쫓아갔습니다. 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보였습니다.

  "혹시, 이거 방풍나물인가요?"

2월에 매봉산을 등산하기 위해 혼자 금오도에 왔을 때, 방풍나물을 처음 접했습니다. 혹시나 싶어 질문하자,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이 섬에서 마주치니 방풍나물인 걸 알지, 아마 다른 곳에서 본다면 아마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날 칠 터였습니다. 그저, 마냥 반가웠습니다.





  '비렁'은 순우리말인 '벼랑'의 여수 사투리이다.     

                                                                                                - 여수 금오도 비렁길 안내문



  비렁길은 국립공원도, 블랙야크 인증지도 아니지만,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했기,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비렁길은 3, 4코스가 가장 아름답다고 들었습니다. 달랑 두 개만 가기엔 아쉬웠으나, 숙박하기엔 부담스러웠습니다. 다음 달에 꼭 재방문하기로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3코스에서 탁 트인 바다를 만났습니다. 여자 셋이 벼랑 끝에 나란히 서서, 사진 찍었습니다. 하늘이 뿌얘서 속상했으나,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풍나물 조형물로 장식된 출렁다리를 지났습니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흰 절벽과 푸른 바다가 조화로웠습니다. 배 한 점이 떠가니,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출렁다리를 한참 지나서, 전망대에서 출렁다리를 바라보니 입구와 출구의 원형이 마치 한 쌍의 반지 같았습니다. 여수 남자 넷이 모여 있길래, 기념으로 사진 한 장 찍었습니다. 모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습니다.

  "모자, 선글라스 없어요? 흐리긴 해도, 봄에는 자외선이 강해요. 이제, 관리할 때라고요."

오늘 일행들 중 최연소는 서른한 살이었고, 모두 삼십 대였습니다. 스윔이 님이 말했습니다.

  "선글라스로 가리면, 저 좀 괜찮아요."

  "네? 하하하, 오늘 한 말 중에 가장 웃기네요!"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아까부터 허기져서, 내내 괴로웠습니다. 여자들이 준비한 건 과자, 젤리, 샐러드, 과일 따위였습니다. 탄수화물이 전혀 없었습니다. 반면, 남자들은 김밥, 샌드위치 등 곡물이 풍성했습니다. 사이좋게 나눠 먹었습니다.

  "합류하길 잘했네요. 남자들 없었으면, 여자들 쫄쫄 굶었겠어요!"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3코스는 상당히 수월했는데, 2코스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배를 놓칠까 봐, 덜컥 조바심이 났습니다. 다른 남자들은 쏜살같이 내뺐습니다. 다들 상당히 집에 가고픈 눈치였습니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동백 하트를 발견했습니다. 스윔이 님과 손가락으로 하트를 그렸습니다. 뒤따라온 여동생들도 다가와 별을 만들었습니다.

  "다섯 명이면 완전체인데, 넷이라서 아쉽네요."

그러자, 광양인이 능청스럽게 두 손으로 별을 만들었습니다.

  "풉! 우리 넷인데, 다섯인 척하는 거예요? 너무 웃겨!"


  "다들 이런 것도 안 보고, 그냥 가버리네요." 

  스윔이 님과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지난 2월에 여수 돌산도 봉황산을 등산했을 때도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한 달 만의 재회였습니다.

  "경상도라 전라도는 왜, 서로 사이가 나빠요?"

궁금한 것을 질문했습니다.

  "정치적 요인이 커요."

  "제가 작년 12월 내내 거제, 올해 1, 2월 내내 통영 드나들었거든요. 고속도로 잘 돼있어요. 그런데, 전라도는 너무 멀고, 길도 불편해요. 왜 그런 거예요?"

  "옛날부터 경상도는 유생들이 많았고, 벼슬하는 선비들도 많았어요."

  "그러고 보니, 역대 대통령들도 경상인들이 많았네요. 그럼, 전라도는요?"

  "전라도는 유배지였죠."

듣고 보니, 과연 일리가 있었습니다. 경상도, 전라도 출신이 아니라서,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점이었습니다.


  어느덧, 선착장에 가까워졌습니다. 동백이 흐드러지게 펴있길래, 그냥 지나치기엔 아쉬워서 잠시 멈췄습니다. 스윔이 님을 먼저 촬영한 후, 이어서 서로의 모습을 찍었습니다. 양손을 모아 귓가에 대고 고개를 기대는 자세를 똑같이 했습니다. 나중에 단체 대화방에 올렸더니, 스윔이 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이런 사진 올리면, 사람들이 오해해요."

바로 답장했습니다.

  "아무도 오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달에 혼자 갔던 식당에 가서, 방풍 막걸리 한 병과 방풍 전 두 개를 주문했습니다. 방풍 막걸리가 쓴 맛이 난다는데, 쓴 맛은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술맛을 잘 몰라서 그런지, 특별한 점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색깔도 살짝 푸르스름하다고 하는데, 전혀 안 그래 보였습니다. 그저, 평범하고 일반적인 막걸리였습니다.


  사장님에게 인사드리니, 주인아주머니는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식대를 무려 만 원이나 깎아주었습니다.

  "벽에 걸린 액자 속 사진의 풍경은 어딜 가야 볼 수 있어요? 저 오늘 비렁길 3부터 역순으로 2, 1 다녀왔는데, 저런 절경은 못 봤거든요. 저걸 보러 오늘 온 건데......"

  "저길 못 봤어요? 저런, 다음에 한 번 더 와야겠네!"

  "아뿔싸!"

원래 한 번 간 곳 절대 또 안 가는 주의인데, 끝끝내 보고픈 경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다음 달에 여수 금오도를 무려 세 번이나 가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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