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히 May 26. 2023

여수 손죽도 깃대봉(242m)

안타까운 일방통행

  여수 거문도에서 배를 타고 고흥여객선터미널로 돌아왔습니다. 승용차를 타고, 여수로 향했습니다. 지도상으로는 가까운 거리지만, 막상 주행하면 한 시간 이상 꼬박 걸리는 장거리였습니다. 여수에서 석식으로 먹은 돼지 국밥이 별로 맛이 없어서 실망스러웠으나, 맛집을 찾아갈 기력은 털끝만치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오후에 배를 타고 손죽도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이인실 숙소에서 만난 귀여운 아가씨와 잠시 담소를 나눴습니다. 포항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는 스물아홉 살의 그녀는 홀로 온 여행자였습니다. 


  오전에 지인 B를 만났습니다. 그는 퇴근 후 여수에 온 상황이었는데, 상당히 피곤해 보였습니다. 그의 눈은 줄곧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아무런 바람도 내비치지 않았습니다.

  "우린 어차피 장거리라서, 안 돼."

  그는 부정적이었습니다.

  "거리가 멀어서, 애틋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긍정적으로 대꾸했습니다. 그는 급기야 짜증까지 냈습니다.

  "누나는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어. 호불호 갈릴 것 같아. 예전에 다녔던 직장 생활은 어땠어?"

  '불호라는 뜻이로군.'

  "소개만 받고, 아직 만나진 않았지만 요즘 연락하는 여자 있어."

  '나쁜 놈이네. 소개팅 확 망해라!'

  "이런 나, 이해해 줄 수 있어?"

  할 말은 많았지만, 말을 삼갔습니다. 그와 끝나는 마당에, 구구절절이 속내를 드러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 만났을 때, 그는 어색했지만 친절했습니다. 말이 없고 조용한 그는 서툴렀지만, 부드러웠습니다. 사월에 벚꽃이 만개했을 무렵이었고, 한없이 달콤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 후 그는 일방적으로 이별을 선언했습니다.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이유였는데,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결이 비슷한 사람이 좋아."

그는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서로 다르니까, 매력적인 거 아니야? 비슷한 사람은 재미없어."

필사적으로 그를 붙잡았으나, 그는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마치 무형의 바람과도 같았습니다.


  그는 오후에 친구와 선약이 있다며,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너한테 줄 게 있어."

  "나한테 잘해주지 마!"

그가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빤히 바라봤습니다.

  '우리, 어쩌다 이렇게 돼버렸을까. 안타깝다......!'

  "누나가 애정 표현 하는 거, 부담스러워."

가슴에 쿵! 하고 바위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목에 입을 맞췄습니다. 한 달 만에 재회한 그가 반갑고, 좋고, 더 같이 있고 싶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떠난 후였습니다.

  문득 숙소에서 본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너랑, 여수'라는 글귀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습니다.

  '여수에서 '너'를 만나긴 만났구나...... 넌 이제 더 이상 그때의 '너'가 아니지만......'


  오후에 여수여객선터미널에 여유롭게 도착했습니다. 매표소 직원에게 가서 이치를 따졌습니다. 

  "이박 삼일 간 섬 세 개를 다녀올 수 있는데, 왜 아무도 안내해주지 않았죠? 여수 초도의 이장님이 알려주셨어요!

  "전화 응대하는 직원들이 다른 해운사 일정까지 모두 알고 있진 못해요. 만약, 제가 전화를 받았으면 그렇게 안내했을 텐데요. 많이 속상하셨겠어요. 죄송해요."

  큰 키에 배가 남산 만한 남자 상관이 사과했습니다. 기분 풀라며, 배에서 간식까지 사줬습니다. 아이스크림이 입에서 녹으며, 속상했던 마음도 누그러졌습니다. 배는 순조롭게 손죽도로 향했습니다.


  두 시 십 분에 출발한 배는 세 시 삼십 분경에 목적지에 닿았습니다. 민박집의 주인아주머니가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작은 체구에 큰 눈이 대조적이었습니다.

  "빨간 집 민박이에요. 전화한 사람, 맞죠?"

  "네, 맞아요! 민박집은 어디예요?"

  "가까워요. 짐은 트럭에 싣고, 우린 걸어가요."

  "깃대봉 가려는데, 어디로 가면 돼요?"

  "거긴 가본 적이 없는데. 전화해서 알아봐 줄게요."

  마을 사람이 알려준 대로 가니, 깃대봉까지 금방이었습니다. 바다가 펼쳐진 해변과 낮은 산이 솟아있는 풍경이 평화로웠습니다. 아담한 단독주택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습니다.

  '이런 곳에서 살면, 근심이 없겠다! 물론, 며칠 안 지나서 지루하겠지만.'


  하산 후, 민박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삼각봉에도 갈 것을 추천했으나, 해가 저물어서 어둑할 무렵이었습니다.

  "내일 아침 배 타기 전에 삼각봉도 들려요. 거기가 깃대봉보다 훨씬 좋거든! 나, 거긴 가봤어."

  "못 가요. 비 소식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바닥 질퍽할 걸요."  

  민박집 이름이 '빨간 집'이길래, 빨간 지붕일 거라 예상했으나 빨간 것은 지붕이 아니라 벽이었습니다. 실내는 아늑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건, 주인아주머니의 인심이었습니다. 상다리 휘어지게 차린 만찬에는 회, 생선구이, 각종 나물들이 즐비했습니다.

  "우와, 이런 융숭한 대접은 처음이에요! 섬 다니면서 여수 초도가 첫 민박집이었는데, 거기도 좋았지만 여기는 비교가 안 될 정도네요!"

  "특별한 반찬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음식보다는 향토적인 재료 말이야. 요리하는 걸 좋아해."


  충분히 배불리 먹었는데도, 후식 배는 따로 있는지 군것질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혹시, 슈퍼 있어요?"

  "응, 점방 있어."

시골에서는 슈퍼보다 점방이 통용되나 봅니다. 슈퍼보다 생소하지만, 영어보다 친근했습니다.

  점방 간판은 새 느낌이 물씬 풍겼습니다.

  '최근에 단장했나 봐.'

규모는 손바닥 만한 크기였으나,  음료, 과자, 라면, 맥주, 식용유, 아이스크림 등 다양하고도 가지런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점방일 거예요!"

  점방 사장님은 환경 미화원으로 근무 중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안경 너머로 붉게 충혈된 눈을 보니, 안타까웠습니다. 아직 정리가 덜 된 듯, 주변은 잡동사니로 가득했습니다. 어수선한 집을 정리하려면, 아마 시간과 노력이 꽤 필요할 겁니다.

  "여기 토박이세요?"

  "여기가 고향이긴 한데, 육지에서 생활하다 최근에 돌아왔어요. 어디서 묵어요?"

  "빨간 집 민박이요."

  "그 집과 고종 사촌 지간이에요."

  

  아이스크림을 선호하지만, 아까 배에서 이미 하나 먹었으니 과자를 한 봉지 샀습니다. 와그작와그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짭짤한 과자가 바스러졌습니다. 노을을 감상하며, 산책했습니다. 늘 시간에 좇기며 힘든 산행만 하다가, 이렇게 여유롭게 천천히 걸으니 마냥 행복했습니다.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벽 위로 고양이 한 마리가 보였습니다. 두 눈동자에는 경계심이 가득했지만, 그런 냉랭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조차 그저 즐거웠습니다.


  보호수 아래에서 마을 주민들과 맞닥뜨렸습니다.

  "어디 가세요?"

  "회의하러 가요."

그러고 보니, 민박집의 주인아저씨도 아까 회의하러 나가는 모양이었습니다. 나중에 전해 들으니, 주민들 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나 봅니다.

  "노인들이 대체적으로 고집이 세요. 과거에 연연하는 경향이 있지. 마을에 어떤 식물을 심을지 의논하는 자리였는데, 웬 미친 ㄴ이 난리를 피지, 뭐야!"


  아름다운 꽃이 수 놓인 벽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마음에 와닿는 문구도 보였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우리 그렇게 살아요'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현재 사랑 중인 건 분명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사랑을 되돌려 받지는 못하고 있으니, 외롭고 지칠 따름입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곧 지나가겠지요.


  "어, 히틀러다!"

독재자 히틀러의 콧수염처럼 코가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지, 가까이 다가가도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폐교에도 들렸습니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아 덜컥 겁이 났습니다. 곤충들의 기척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오래 머물지 않고, 곧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비가 지나갔습니다.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손죽도에서 아홉 시 배를 타고 여수로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매표소 옆 정자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자니, 뭍으로 나가려는 도민 모자와 대화를 나누게 됐습니다. 푸들처럼 곱슬곱슬한 긴 머리칼을 늘여 뜨리고, 폭이 좁은 긴치마를 입은 딸은 나이답지 않게 유독 볼살이 통통했습니다. 삼십 대 혹은 사십 대로 보였는데, 날씬한 몸매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큰 얼굴을 지녔습니다.

  '달덩이 같네.'

  "도민들은 여자가 생활력이 강해요. 섬 남자들은 선비 아니면, 건달이야."

  "재밌는 표현이네요. 선비는 드무니, 대부분 건달이겠네요."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소방차 대가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최근 들어 소방차가 너무 눈에 밟힙니다.

  "최근에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는데, 너무 멀리 살아요."

  "어디 사는데요?"

  "○○이요."

  "섬이 아닌 게 어디예요."

  "풉, 그러네요."

  "서울 사는 남자랑 손죽도 사는 여자랑 장거리 연애하다가 결혼했어요."

  "네? 정말요? 아니, 어쩜 그런 힘든 연애가 성공했죠?"

  "더군다나, 여자는 이혼녀였고 재혼이에요."

  "와, 될 사람은 되는구나......!"

  

  담소를 나누다 보니, 여수 시장이 인사하러 왔습니다. 여수인들도 보기 어려운 광경을 섬에서 보게 됐습니다. 배는 시간가량 출항이 연기됐지만, 무사히 뭍에 닿았습니다. 결국, 일정이 조금씩 지연되고 말았습니다. 식당에서 K 님을 만났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수 거문도 불탄봉(195m)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