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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May 27. 2023

보성 일림산(667m)

우중 철쭉 산행

  지난 이 월에 여수에서 처음 만난 K 님은 단행본 <저 등산 안 좋아하는데요?>를 소장한 소중한 독자입니다.

  "책 가져오시면, 서명해 드릴게요."

그렇게 일렀건만, K 님은 빈 손이었습니다.

  "왜 책 안 가져왔어요?"

  "슈히 님 때문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죠?"

  안개 탓에 출항이 지연되자, K 님은 그만 깜빡 잠이 들었나 봅니다. 자다 깨서 허둥지둥 출발하는 바람에, 책을 미처 챙기지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본인 탓을 왜 나한테 한담......'


  전부터 군평선이가 궁금했는데, 오늘에서야 드디어 처음 먹어 봤습니다. 여수 사투리로 금풍쉥이라고 불리는 이 생선은 맛이 좋아 샛서방 고기로 불립니다. 큰 기대를 품고 맛을 봤으나, 기대에 절반도 못 미쳤습니다.

  "에계? 먹을 것도 별로 없구먼!"

  샛서방을 둔 여자에게는 군평선이가 남편 몰래 애인에게 주고픈 만큼 맛있는 물고기인가 봅니다. K 님은 아귀탕을 추가로 주문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줄 서서 대기했던 맛집 복춘 식당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번 아귀탕은 그때의 수준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과연, 괜히 맛집이 아닌가 봅니다. 실망스러움을 안고,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순천인 두 명과 보성 일림산에서 합류할 예정이었습니다. 비가 거세게 내렸습니다. 일기 예보에서는 분명 늦은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내리다니 억울했습니다. 일정을 취소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비 때문에 분명 꽃이 다 져버릴 것만 같아 그럴 순 없었습니다.

  보성 일림산은 몇 년 전, 여수 영취산에 갔을 때 만난 아이스크림 장수가 추천해 준 곳입니다. 순천에서 온 T 님과 H 님을 만났습니다.

  "철쭉은 색깔이 야해요."

  "네? 야하다고요?"

님이 되물었습니다.

  "지인 옥구슬 씨가 쓴 표현이에요. 천박하게 아름답다는 뜻이죠. 진달래에 비해 철쭉은 채도가 높잖아요."


  T 님은 포스코에서 교대 근무 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임의 Y 님도 거기 직원이랬는데!"

  "그래요? 이름이 뭔데요? 검색하면, 다 나와요."

T 님이 Y 님의 이름을 검색하자, 단정한 인상의 Y 님의 증명사진이 나왔습니다.

  "와, 잘 생겼다!"

H 님이 외쳤습니다.

  "이 분도 순천 살아요. 소개해 줄까요? 잘 생기기만 한 게 아니라, 몸도 좋아요!"


  최근에 다녀온 흑산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성폭행 사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전 국민이 다 아는데, 저만 모르더라고요. 워낙 뉴스를 안 봐서, 몰랐네요. 뒤늦게 알고, 너무 놀랐어요! 한편으론,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오히려, 남자 셋을 잘 구슬려서 성폭행 안 당했을 수도 있어요. '좋은 곳 가서, 즐겨요.' 이런 식으로 말하고 위기를 모면했을지도 몰라요."

  여기까지 말하자, 갑자기 K 님이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괜찮으세요? 길이 미끄러운가 봐요. 조심하세요!"

 K 님은 나중에 변명처럼 말했습니다.

  "슈히 님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래요......"

  "남 탓하지 말고, 본인 하체를 단련합시다!"


  T 님은 우리들 중 유일하게 기혼이었습니다. 무려 다섯 살이나 어린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녀들을 둔 가장입니다.

  "최근에 한라산 다녀왔어요."

  "그럼, 등린이 아니에요."

  "등린이는 아닌가요?"

  "네, 아니에요!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 다녀오셨잖아요. 등린이 아니고, 쌉고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연애 이야기로 흘렀습니다. 관심 있는 분야입니다.

  "가진 게 없어서, 상대에게 줄 거라고는 오직 몸과 마음뿐이에요. 최근에 몸과 마음 다 바쳤다가, 마음은 얻지도 못한 채로 버려졌네요."

공허한 현재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었는데, T 님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줄 거라곤 맘뿐이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몸과 마음이라고 말해서 설렜어요!"

  "네? 핵심은 그게 아닌데! 아직 한창이시군요."


  철쭉 군락지에서 찍은 인물 사진을 보며, T 님이 평했습니다.

  "슈히 님은 공격형이로군요."

  "네? 무슨 뜻이에요?"

 그는 의아한 말을 남겼습니다.


  비록 비바람이 몰아쳐서 고생도 많이 하고, 안개가 자욱해서 시야 확보도 어려운 꽃밭이었으나, 아름다운 시기에 오고팠던 명산을 방문했기에 만족합니다. 하산 후, 인근 맛집에서 육회 비빔밥과 육개장, 설렁탕을 먹었습니다. T 님은 같은 걸로 주문해 달라며, 화장실에 가버렸습니다. 육회 비빔밥이 나오자, T 님은 내가 설렁탕을 시킬 줄 알았다며 황망해했습니다.

  "그러게, 본인이 직접 주문했어야죠."

  "육회 비빔밥, 잘 시켰어요. 최고! 맛있어요!"

  다들 맛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등산뿐만 아니라, 뒤풀이까지 훌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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