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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May 10. 2023

여수 거문도 불탄봉(195m)

  여수 초도에서 거문도로 이동하기 위해서, 선착장으로 나갔습니다. 매표소에는 이장님이 배표 발권 중이었습니다.

  "여덟 시 사십 분, 거문도행이요." 

  "이렇게 거문도에 간다고? 그렇게 가지 말고...... 잠깐 이리 들어와 봐요."

알고 보니, 묘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거문도 가지 마요. 손죽도를 먼저 들리고, 거문도로 가서 하루 묵어요. 거문도가 손죽도보다 더 크고, 번화하거든요."

  친절한 이장님이 설명했습니다.

  "네? 체류일을 하루 줄일 수 있어요? 가는 배가 있어요? 아니, 해운사에선 왜 이런 안내를 안 해줬담?"

해운사에서 안내해 준 일정은 돈, 시간, 체력을 하루 더 낭비하는 판국이었습니다.

  "책임자는 알지 몰라도, 전화받고 안내하는 부하 직원들은 잘 모르겠죠. 다른 회사 뱃시간까지 알 리 없으니까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문의했더니, 하루에 하나씩만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일정을 짰거든요. 이장님 말씀대로라면, 고흥 녹동항에서 섬 세 개 가는 게 충분히 가능하네요. 굳이 승용차 타고 여수여객선터미널로 이동 안 해도 되고요. 아, 이미 여수에서 숙소도 예약했는데......"

  "그럼, 숙소를 취소하면 되잖아요."

  "그건 손해잖아요. 그냥, 계획대로 할게요. 토요일에 산악회원들과 만나기로 했거든요. 금요일에 시간이 갑자기 비면, 갈 곳이 없어서 어차피 곤란해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가끔은 이렇게 쉬기도 해야죠."

이장님이 얇은 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그가 쓴 시집이었습니다.

  '좌광우도? 무슨 뜻일까?'


  도민들이 거문도행 배를 타고 떠나니, 선착장은 적막했습니다.

  "이리 와봐요."

이장님이 길가에 있는 식물로부터 열매를 따더니, 먹어 보라며 내밀었습니다.

  "이게 상동 열매예요. 항암 효과가 있고, 블루베리보다 더 좋은 식물이죠."

친절하고, 박식하기까지 한 이장님이었습니다.

  "아까 양치해서...... 안 먹을래요. 뒀다가, 이따 먹을게요."

  "주머니에 넣으면, 다 으깨져요!" 

  "어제 먹은 청포도 막걸리 탓에, 지금 머리가 깨질 것 같네요."

  "그걸 마셨어요? 아스타팜 범벅인데."

  "아스타팜은 또 뭔가요?"

  "아스타팜, 몰라요?"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입니다.


  이장님의 배웅을 받으며, 거문도행 배에 올랐습니다. 햇살이 눈부신 화창한 날이었습니다. 아홉 시 오십 분경, 거문항에 도착했습니다. 배낭을 멘 어르신이 다가오길래,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혹시, 불탄봉 가세요?"

  "네."

  "그럼, 블랙야크 인증하세요?"

  "네."

  "그럼, 같이 가면 되겠네요!"

이렇게 즉흥적으로 동행이 됐습니다.


  선착장에 내려 가까운 가게에 들렀습니다.

  "길 좀 여쭐게요. 불탄봉 가려는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실내에 들어서자 어리고, 건강해 보이는 큰 개가 상당히 반겼습니다. 처음 본 사이가 아니라,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전폭적인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더 머물고 싶었으나, 어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남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리 건너서 저기로 가면, 등산로 있어요. 저 파란 집 보이죠? 저기요. 사실, 중학교에서도 등산 시작할 수 있는데, 거긴 길이 나빠요. 거긴 가지 마세요." 

  친절한 도민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들머리에 안정적으로 진입했습니다.

  "길 찾기 젬병이라서...... 아가씨만 믿고 따를게요."

동행이 말했습니다. 등산 시작하기 전, 화장실도 다녀오고, 옷매무새도 고치는 등 만반의 태세를 갖췄습니다. 어르신은 몸놀림이 느린 편이었습니다. 내심 다소 답답했지만, 하나뿐인 소중한 동행이니 인내심을 지녔습니다. 다리를 건넜습니다. 가족에 대해 대화하던 중, 나이 얘기가 나왔습니다.

  "자녀 분들이 저보다 한참 나이가 많으시네요. 그럼, 선생님 연세가 팔십 대이신가요?"

  "아, 나이 좀 깎아줘요!"


  불탄봉까지 가는 길은 평화로웠습니다. 한적하고, 고요하고, 적막하기까지 했습니다. 싱그러운 풀들이 무성했고, 봄날 햇살은 이글이글 타올랐습니다. 땀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일교차가 크기에, 옷차림은 아직 무거웠습니다. 어느새, 정상에 닿았습니다. 딱 하나 남은 찹쌀떡을 갈랐습니다. 한쪽은 입에 넣고, 다른 하나는 지인과 통화 중인 어르신의 입에 넣었습니다.

  "점심 살게요."

  "고맙습니다!"


  등산할 땐 보지 못했던 식물을 하산길에 발견했습니다. 노랑꽃은 괭이밥, 연한 자주색꽃은 청사랑초들이 앙증맞았습니다. 특히 진한 자줏빛꽃은 완두콩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이거 완두콩꽃인가 봐요. 와, 신기해요!"

꽃들이 황톳빛으로 쪼그라든 흔적이 눈에 띄었고, 열매 맺은 모습이 탐스러웠습니다. 새로운 걸 발견하고, 배우는 과정이 참 즐겁습니다.


  하산 후, 눈앞에 보이는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레스토랑이라는 글씨만 보고 들어갔는데, 양식집이었습니다. 점심 식사 중인 손님들이 꽤 많았습니다. 돈가스와 베트남 쌀국수를 주문했습니다. 주인아주머니 인심이 넉넉해서, 음식도 아주 후했습니다. 성의에 부응하기 위해, 남기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습니다.

  "음식이 참 맛있어요. 섬에서 이렇게 우아하게 양식을 먹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돈가스도 직접 가공한 거고, 쌀국수 만드는 비법도 베트남 가서 직접 배워왔어요."

  "와, 대단하시네요!"

어르신에게 찹쌀떡 절반 떼어 주고, 풍성한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어딜 가나 먹을 복이 많아서, 행복합니다.


  고흥 녹동항으로 돌아가는 배는 오후 한 시 사십 분이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막판에 달렸으나, 무사히 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이장님으로부터 받은 시집을 펼쳤습니다. 육지에 도착하면, 차를 타고 여수로 이동합니다. 이제, 여수 섬은 손죽도 하나 남았습니다.




얼릉 오이다

                                             김진수


그대 그리운 날은 여수로 오이다

세상의 모든 봄은 여기서 시작되고

세상의 모든 맹세도 여기서는 굳어지나니


사랑을 잃고 시를 잃고

꿈과 희망마저 까마득한 날이거든

얼릉 오이다!

여수로 오이다!

세상사 모든 설움 여기 와서 풀고 가이다


오동도 동백숲 쫑포해변 밤바다

발걸음 걸음마다 가슴 가득 꽃 붉을 때

돔바리 서대회 새콤달콤한 인정으로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들이키면

다시금 아름답고 물 맑은 파도소리

그래서 여수여라

사랑이고 시랑께라. 



괭이밥
청사랑초
완두콩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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