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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Jul 07. 2023

[블야 섬&산 80좌] 완도 여서도 여호산(351m)

  머나먼 완도까지 왔으니, 내친김에 여서도에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완도 생일도를 함께 다녀온 오빠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홀로 하루 묵었습니다. 완도 여객선 터미널 인근의 제일 저렴한 곳을 골랐습니다.

  완도 여서도는 원래 함께 가기로 약속한 상대가 있었으나, 일정이 안 맞아서 혼자 가게 됐습니다. 상대는 여수에서 교대 근무를 하는 초면인 남자였는데, 완도 수목원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말없이 산악회 단체 대화방을 나가버렸습니다.

  '가기 싫으면, 솔직히 말을 할 것이지 약속해 놓고 이런 법이 어디 있담? 어휴, 차라리 출발 전에 이렇게 돼서 다행이네! 완도 수목원에 도착했는데, 바람맞으면 어쩔 뻔했어?'

세상에는 이렇게 무책임한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처음 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초면이니,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일요일 오후, 청청한 하늘을 보며 완도 여객선 터미널에 당도했습니다. 황금 전복 조형물이 반짝거리며 반겼습니다.

  '전복 보니, 또 생각나네. 완도에서 너랑 처음 만났을 때 네가 전복 사줬던 거.'

우울해지려는 마음을 황급히 다독이려 해도,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15시, 여서도행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가보진 않았으나, 저 멀리 완도 타워가 보였습니다. 구름에 휘감긴 신비로운 산등성이도 눈에 띄었습니다.

  승선권을 촬영해 단체 대화방에 공유했더니, Y 님이 말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 꺼화 님은 안 오셨나요?"

'꺼화'는 어제 완도 생일도에서 해운사 직원이 발권할 때 낸 오타입니다. Y 님의 장난에 피식 웃었습니다.


  완도 여서도는 최남단입니다. 하루에 배가 한 번뿐이고, 완도항에서 무려 세 시간이나 걸립니다. 이렇게 오기 힘든 곳에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곧장 민박집에 도착해 석식을 먹었습니다. 생선, 편육, 나물과 국 등 건강한 밥상이었습니다. 식대는 자그마치 만 오 천 원이었습니다.

  '섬이라서 역시 물가가 세다......'

  생선 중에 낯선 음식이 있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질문했습니다.

  "박대라는 생선이에요."

  "오, 박대요? 이거 군산에서 먹어본 적 있어요. 반갑네요!" 


  침실로 돌아와 씻고, 독서하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월요일에 완도행 배는 열 시에 딱 한 대뿐이라서, 새벽 일찍 산행을 나섰습니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등을 보이며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장미꽃이 만발한 사이로 보이는 광경이 조화롭고 아름다워서,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초반에 들머리를 못 찾아서, 한참 헤맸습니다. 이정표가 전혀 안 보였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여서 국민학교를 지나 골목에 들어서자,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인기척이 들리길래, 민가에 뛰어 들어가 도움을 청했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은 쭈글쭈글한데, 머리는 새카맸습니다. 대화를 나눠 보니, 그녀는 등산을 안 해본 눈치였습니다. 새벽 여섯 시, 무례함을 무릅쓰고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발전소 뒤편으로 가면, 등산로 있어요. 거기서부터 시작해요!"

  "왜 등산로 이정표가 하나도 없어요? 한참 허둥거렸어요!"


  발전소로 가기 전, 파헤쳐진 흙바닥을 보고 정신이 산만했습니다.

  '공사 중인가? 여기가 들머리일 줄 누가 알았겠어.'

인터넷 검색한 정보도 역시 불확실해서,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혹여 배를 놓치기라도 할까 봐, 쉬지 않고 부지런히 등산했습니다. 지치고, 힘에 부쳤으나 혼자이기에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했습니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었고, 설사 산짐승이라도 맞닥뜨리면 어쩌나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여호산 정상 이정목에 닿아 사진을 찍었는데, 여느 때보다 폭삭 늙은 것 같았습니다.

  '아이고, 고생 많았네!'  

  바닥에 짐승의 큼지막한 배설물이 있길래, 밟지 않게 조심했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이곳에선 를 방목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아까 본 건 아마도 소똥이겠군!'


  무사히 하산해서 주인아주머니와 함께 식사했습니다. 그녀와 대화하다 B의 영상을 보여줬더니,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 나도 사랑에 빠질 것 같아! 몸이 너무 좋은데요?"

  "그러게요. 이런 영상을 왜 보낸 건지...... 어차피 다른 여자랑 사귈 거면서 본인 몸매는 왜 과시하냐고요! 어장 관리인가? 괜히 헛물만 켜게 말이죠." 


  여서도에서 배를 타고 완도에 오후 한 시경 도착했습니다. 비가 쏟아졌습니다. 선원이 낡은 우산 하나를 건넸습니다.

  "좀 쓰다가, 그냥 버리세요."

  "고맙습니다."

모르는 낯선 이의 온정 덕분에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해안가를 따라 걷는데, '론볼', '골볼', '보치아' 등의 생소한 단어들이 보였습니다. 완도에서 장애인 체육 대회를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뼈해장국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완도를 떠났습니다. 완도 수목원에 갈까 생각했으나, 맑은 날에 좋은 이와 함께 가고 싶었기에 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주행 중에 옥구슬 씨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옥구슬: 그냥 안부 전화했어요.

  슈히: 토요일에 완도 갔다가, 지금 집에 가는 길이거든요?

  옥구슬: 오래 있었네.

  슈히: 완도가 추억의 장소거든요? 마음이 너무 아픈 거야. 곳곳에 막 추억이 묻어 있는데......

  옥구슬: 누구랑 추억이 있는데?

  슈히: B.

  옥구슬: 에이, 극복해야지.

  슈히: 마음이 미어터지는 거예요. 걔는 다른 여자랑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텐데. 그냥, 빨리 깨졌으면 좋겠어.

  옥구슬: 안 그래도, 그거 잘 이겨내고 있나 걱정돼서 전화해 봤어요.

  슈히: 마음의 병 때문에 감기 걸렸어요. 고생 중이에요.

  옥구슬: 돌아다녀서 그런 것 같은데.

  슈히: (웃음) 정신이 몸을 지배하잖아요.

  옥구슬: 처돌아다녀서.

  슈히: 완도에 생일도라고 있어요. B의 생일에 생일도에서 축하해주고 싶었어요. B와 처음 만났을 때, 그 애가 나를 보러 완도까지 와줬어요. '얼마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여자면 전남까지 혼자 차 끌고 올까?' 얘는 호기심이 생겼대요. 난 그 얘기 듣고, 마음이 열린 거지. '아, 나를 보러 여기까지 와줬어?'

  옥구슬: 생각보다 되게 순진해.

  슈히: 하하하하하하!

  옥구슬: 운동 열심히 하는 남자니까, 남성 호르몬 넘쳐서 그냥 여자 한번 만나러 온 거지.

  슈히: 여자라서, 남심을 알 수가 없어요. 빨리 잊어버려야 하는데, 술과 담배 안 하는 사람이 흔치 않아요. 얘 분명히 나한테 술, 담배 안 한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거짓말인 거야. '나 처음 만났을 때, 너 술 안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너한테 마음 열었던 건데.' 술 좋아한다고 하면, 이미 얄짤없어요. 관심도 없어. 나중에 얘한테 따졌더니, '누나, 사람 잘못 봤어요.' 이러는 거예요! 나, 당했다니까?

  옥구슬: 뭘 당해, 당하긴. 

  슈히: 거짓말했잖아요.

  옥구슬: 그 거짓말이 뭐, 어떡해. 걔 입장에선 '어쩌라고?'지.

  슈히: 빨리 깨졌으면 좋겠어요.

  옥구슬: 이런 말 하면 좀 그렇지만, 깨져도 슈히 씨랑 다시 잘 될 리는 없으니까.

  슈히: 맞아요. 거리에서 이미 밀리니까.

  옥구슬: 깨져도, 다른 여자 만날 거예요. B 입장에선, 슈히 씨 그냥 원나잇이에요.

  슈히: 하룻밤 사랑 치고는 좀 달콤했네요. 손 편지도 주고받고, 전복이랑 장어도 얻어먹고, 연락도 매일하고......

  옥구슬: 손 편지가 뭐야, 난 발 편지도 써줄 수 있어.

  슈히: (웃음) 

  옥구슬: 가질 수 없는 사람인 거지. 연애하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은 얼마나 황당할까? 이별하지 않았는데, 이별했네. 슈히 씨도 이상이 높아서, 글러 먹었어요.

  슈히: 아, 왜? 꿈은 클수록 좋은 거 아닌가? 아, 내 이상이 뭐 어때서요? 오르지도 못할 나무를 쳐다봅니까?

  옥구슬: 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눈을 낮추고, 가능할 것 같은 사람이랑 만나야지.

  슈히: 싫어요! 옥구슬 씨도 미혼이면서. 그런 말할 위치가 아니에요.

  옥구슬: 결혼은 결혼하고 싶어질 때쯤 옆에 있는 사람이랑 하거나, 찌그러지고, 모자라 보이는 사람이랑은 할 수 있어요.

  슈히: (웃음) 아, 왜! 못난 사람이랑 결혼해야 하냐고?

  옥구슬: 잘난 사람은 나랑 결혼 안 하니까.

  슈히: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면 안 돼요?

  옥구슬: 그게 안 된다니까.

  슈히: 결혼이 목적이 되면 안 돼요. 수단이어야지. 아까, 여서도에서 누가 명함을 주더라고요. 연락하라는데, 연락 왜 하라는 거야?

  옥구슬: 한번 해보자는 거지.

  슈히: 어르신인데?

  옥구슬: 어르신은 성욕 없나.

  슈히: 헐, 뭐야...... 무서워요.

  옥구슬: 왜 무서워?

  슈히: 남자의 관점에서 말하니까, 너무 무서워.

  옥구슬: 남심 단순해요.

  슈히: 사람들은 다들 밀당하래요.

  옥구슬: 뭔 소리야. 그냥, 여자가 안 예쁜 거지.


완도 타워
방가지똥
연하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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