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공원에 주차했습니다. 주차 요원이 주차비를 징수했습니다. 다랑은 신용카드를 트렁크에 둔 모양이었습니다. 요금은 열두 시간에 육천 원이었습니다.
"누나가 결제할게. 믿음직스럽지?"
"믿음직스러운 게 아니라, 완전 믿지!"
그가 시원스레 대답했습니다.
식당 앞에서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거리며 먹이를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짐승은 실내로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가까이 다가갔으나, 동물은 쏜살같이 달아나버렸습니다. 승용차로 다시 돌아와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설악산 국립 공원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일곱 시, 반달곰 한 마리가 웃으며 방문객들을 환영했습니다. 낯익은 동상이었습니다.
"어, 나 여기 예전에 와봤어!"
몇 년 전, 케이블카를 타고 권금성에 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땐 흐리고 비가 와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날처럼 흐렸습니다.
"오늘도 곰탕이려나? 그럼 안 되는데!"
흑인 한 명이 두 손을 합장하며,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이른 시간에 홀로 산책 나온 모양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밝게 웃으며, 크게 대답했습니다.
탐방로 안내의 난이도를 살폈습니다. 비선대까지는 쉬움, 귀면암과 천당 폭포까지는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희운각 대피소까지 가는 육백 미터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과연 초반에는 평탄한 산책로가 이어졌습니다.
"이제, 등산 시작이야! 등산 스틱 꼭 써. 그래야 수월해."
다랑에게 주의를 줬습니다.
"맞아! 지난번 울릉도 성인봉 등산할 때, 스틱 안 써서 힘들었나 봐. 아는 형도 그러더라고. 스틱 써야 체력의 삼십 퍼센트는 절약된대."
며칠 전, 설악산 국립 공원에 전화해 등산로를 문의했습니다.
"희운각 대피소까지만 등산하려는데, 가장 짧은 등산로는 어딘가요?"
소공원에서 희운각 대피소까지 가는 데만 무려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데, 그나마 거리가 가장 짧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과연 설악이로군! 휴, 편도 다섯 시간이면, 왕복 열 시간이라는 건데. 하산 소요 시간은 등산보다 짧은 걸 감안해도 최소 네 시간 이상은 걸릴 테니까. 무더위에 장장 아홉 시간을 등산하려니, 눈앞이 캄캄하네......'
걱정스러웠지만, 감행했습니다. 등산 초보 멘티 다랑도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지난 유월부터 한 주도 쉬지 않고 함께 쭉 등산했기에,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열 시경, 허기를 느꼈습니다. 새벽 네 시에 기상해 첫 끼를 먹었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식사해야 하나? 아님, 짐을 줄이기 위해서 지금 좀 먹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너럭바위 위에서 등산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모여 있는 모습을 보니, 마치 신선이 수양 중인 것 같았습니다. 안내문에는 와선대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와선대의 비밀
옛날 마고선(麻故仙)이라는 신선이 바둑과 거문고를 즐기며 아름다운 경치를 바위에 누워서 감상하였다고 하여 와선대(臥仙臺)라고 부릅니다.
여기다 싶어서, 냉큼 자리를 잡았습니다. 준비한 도시락을 꺼내 다랑과 나눠 먹었습니다. 콸콸콸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니,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었습니다. 더할 나위 없는 안성맞춤 식사 장소였습니다. 지체할 여유가 없어,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조금 후에 비선대를 만났습니다.
비선대(飛仙台)
와선대에 누워서 주변 경관을 감상하던 마고선이 이곳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비선대라고 부릅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는 천불동 계곡을 지나 대청봉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금강굴을 지나 마등령으로 이어지는 본격적인 탐방로가 있습니다.
이곳도 역시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재작년 가을, 친구 한 명이 공룡능선에 가고 싶다고 해서 세 명이 등산을 왔습니다. 헤드 랜턴을 켠 채, 꼭두새벽부터 고생하며 금강굴을 지나 마등령까지 갔습니다. 비록 그 친구는 현재 곁에 없으나, 마등령 하산길에 바라본 공룡능선의 빼어난 경치는 지금도 생생합니다.
한걸음 한걸음 디뎌 앞으로 나아가던 중, 먼발치서 사람의 얼굴을 닮은 암벽이 보였습니다.
"저거 사람 옆모습 같지 않아? 사자 얼굴 같아 보이기도 하고."
다랑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바로 귀면암이었습니다.
귀면암(鬼面岩)
천불동 계곡에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 비선대와 양폭 사이에 있습니다. 생김새가 무시무시한 귀신 얼굴 모양을 하고 있어서 귀면암이라고 불립니다. 천불동 계곡의 입구에 버티고 서서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 닮았다고만 생각했는데, 귀신 얼굴이라고 하니까 무섭다! 아까 사진 찍을 걸 그랬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서 촬영해야겠다."
그러자, 다랑은 본인이 다녀오겠다며 사라졌습니다. 다랑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한 부부와 잠시 대화를 나눴습니다.
"일행은 어디 갔어요?"
"귀면암 사진 찍으러 내려갔어요."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귀면암 잘 보이는 곳 있어요. 굳이 안 내려가도 되는데?"
"아, 그래요? 그럼 괜히 돌아갔네요."
잠시 후, 다랑이 힘겹게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찍은 귀면암 사진들은 무성한 나뭇가지에 가려져서 귀면암의 형체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실망스러워서,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여기서 약 오십 미터만 오르면, 귀면암 잘 보이는 곳이 나온대. 가보자!"
그러나, 몇 분 뒤 그 말이 거짓임을 깨달았습니다.
"잘 보이긴커녕, 더 안 보이는데? 아까 그분은 왜 그렇게 말했지?"
아쉬움 마음에 자꾸 뒤를 돌아봤으나, 귀면암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하산할 때 귀면암을 꼭 다시 보리라, 굳게 다짐했습니다.
귀면암을 지나 양폭 대피소로 가는 길목에서 오련 폭포를 발견했습니다. 다섯 개의 폭포가 연이어 떨어져서 오련(五連)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와, 입수하고 싶다!"
양폭 대피소를 지나자, 아까보다 더 굉장한 폭포를 맞닥뜨렸습니다. 수직의 절벽에서 강한 물줄기가 콸콸 흘러내려 원형의 수영장으로 낙하했습니다. 찰랑거리는 맑고 투명한 물을 보자, 뛰어들고픈 마음이 샘솟았습니다.
"선녀탕에서 수영하면, 진짜 시원하겠다!"
이 폭포의 이름은 바로 천당이었습니다.
천당 폭포
천불동 계곡의 마지막 폭포인 천당 폭포입니다. 속세에서 온갖 고난을 겪다가 이곳에 이르면, 마치 천당에 온 것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동영상을 촬영하며, 다랑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지금 소감이 어떠십니까?"
"저는 천당 폭포 앞에 와있는데, 진짜 천당에 와있는 느낌입니다."
그 말을 듣고, 황당해서 물었습니다.
"천당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네."
"언제요?"
뭐라고 대답할지,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손을 입에 대고 작게 속삭였습니다.
"어젯밤에?"
그의 재치 있는 답변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어젯밤에 그가 뭘 했는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희운각 대피소까지 남은 약 육백 미터의 길은 과연 험난했습니다. 감당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으나, 여태 다섯 시간을 운동하느라 기력이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터덜터덜 지친 걸음을 억지로 옮기다가 바위에 걸터앉았습니다.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니, 백인 남성이 한 명 보였습니다.
"Where are you from?"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France."
그는 오십 대 이상은 돼 보였고, 대머리였습니다.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반바지를 보니, 안쓰러웠습니다. 프랑스인이 왜 설악산에 혼자 온 건지, 왜 등산화를 안 신었는지 이것저것 호기심이 일었으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남자는 파란 컨버스화를 신었습니다.
'어휴, 저걸 신고 등산하러 왔어? 큰일 날 사람이네!'
오 년 전 유월, 한라산 백록담에서 하산 중에 본 백인 여성이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원피스 차림에 플랫 슈즈를 신었습니다.
'그 여자도 혹시 프랑스인 아니야?'
원래 목표는 정오 전까지 희운각 대피소에 도착하는 것이었으나, 약 이십 분가량 지연됐습니다. 덥고 습해서, 땀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손수건과 얼음물을 넉넉히 준비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다랑은 무거운 배낭을 이고 지느라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가 모든 짐을 든 덕분에, 가뿐히 오를 수 있었습니다.
등산하는 도중 다람쥐들이 수시로 나타났습니다. 촬영을 시도했으나, 포착하기 어려웠습니다. 동물의 몸놀림이 워낙 잽싸서,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희운각 대피소에 도착하자, 다람쥐들이 끊임없이 출몰했습니다.
사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성은 자신이 먹던 빵을 조금 뜯어 다람쥐들에게 나눠줬습니다.
"지금이야, 어서 촬영해!"
다랑에게 소리쳤습니다. 빵을 낚아챈 다람쥐는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맛있게 먹었습니다. 동물 두 마리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습니다. 귀여웠습니다.
사십 대 남자가 찹쌀 도넛을 나눠 줘서, 허겁지겁 먹어치웠습니다. 다람쥐가 빵을 좋아하는 것 같았으나, 주린 배를 채우느라 나눠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대신 달고나와 달걀을 내밀었는데, 다람쥐들은 안 먹고 자취를 감췄습니다.
희운각 대피소에 사는 다람쥐는 비교적 기세가 덜했습니다. 삼 년 전 유월, 설악산 대청봉에서 본 다람쥐는 훨씬 대담하고 뻔뻔했습니다. 대청봉 다람쥐는 먹이를 줄 때까지 도망가지 않고, 자리에서 꿋꿋이 버티는 기질을 보였습니다.
등산보다 하산길이 훨씬 즐거웠습니다. 조금만 힘내서 걸으면, 곧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열심히 하산했습니다. 오후에 느지막이 산을 찾는 등산객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지금 오르면, 너무 늦지 않나? 고생하네.'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여자 한 명이 지나갔습니다.
'여자 혼자 등산하기는 위험하지 않나......'
펑퍼짐한 노란색 상의를 입은 소년을 한 명 마주쳤습니다.
'혼자 오다니, 용감하네! 상당히 어려 보이는데, 청소년인가? 이십 대라고 하기엔 키가 너무 작은데. 게다가, 저런 차림으로 등산하면, 굉장히 불편할 텐데......'
말은 걸지 않았습니다. 지쳐서, 말할 기운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가 적당하겠다. 잠깐 쉬자. 오, 물고기가 있어!"
다랑이 말했습니다. 처음엔 소수였는데, 얕은 곳에 발을 담그자 곧 엄청 많은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와, 여기 엄청 많아. 우글우글해!"
맑은 계곡에 모인 생명체들의 정체는 바로 버들치였습니다.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일급수종이라고 합니다. 물고기가 다가와 발을 톡톡 건드리는데, 처음엔 무서웠습니다.
"잡식성이라서, 각질을 뜯어먹나 봐. 닥터 피시랑 같네. 신기해!"
난생처음 보는 어종을 보고 탄성을 지르는 것도 잠시였습니다. 물고기를 사로잡고픈 욕망이 생겼습니다.
"물고기 잡아 보자!"
다랑에게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토시에 돌멩이를 넣고, 허리를 숙였습니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했습니다. 그의 머리에 찬물을 뿌렸습니다.
"으악!"
다랑이 소리쳤습니다.
"깔깔깔 깔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배꼽을 움켜쥐었습니다.
다랑은 몇 번의 시도 끝에, 빨대 만한 작은놈을 한 마리 잡았습니다.
"이번엔 내가 해보겠어! 과연, 누가 더 큰 놈을 잡을 것 같아? 주둥이 넓은 내 물병 하나 줘."
"입구가 크면, 물고기가 오히려 도망치지 않을까?"
그는 별 기대하지 않는 듯 보였습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한 후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다랑이 잡은 놈보다 훨씬 큰 놈을 노렸습니다. 이놈들이 눈치가 빨라서 생각처럼 포획하기 쉽진 않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큰 물고기 한 놈을 골라서, 망설임 없이 바로 확 낚아챘습니다.
"으하하하하! 잡았다, 요놈! 버들치 대왕님!"
가뿐히 해냈습니다.
"오, 크다! 금방 잡네?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너무 쉽게 잡았는데?"
"에헴! 대단하지? 다방면에 출중하신 멘토님이시다! 예전에 실내 낚시터에서도 낚시한 적 있는데, 굉장히 잘 잡히더라고. 낚시에 재능 있나 봐!"
"그럼, 배 한 척 사서 어업하자!"
다랑이 잡은 것과 크기를 비교하기 위해 바위에 몸을 숙이는데, 뒷덜미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꺅! 뭐 하는 거야?"
계곡물 공격이었습니다.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터라, 저항도 못하고 그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까 당한 것에 대한 다랑의 소심한 복수였습니다.
하산하던 등산객들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계곡 물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시원한 물속에서 즐겁게 고기잡이를 하며, 시름을 잠시 잊었습니다.
양말과 등산화를 도로 신으며, 낯선 식물을 발견했습니다. 빨갛고 탐스러운 열매는 주머니에 알알이 박혀 있었습니다. 다랑이 검색한 결과, 이 식물은 노박덩굴이라고 했습니다.
등산할 때 놓친 귀면암을 하산하며, 다시 마주했습니다. 원거리에서 바라본 귀면암은 으리으리하고 고풍스러웠습니다. 먹구름이 짙게 깔린 회색빛 하늘이 스산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과연 다른 이에게 추천해 줄 만한 장관이었습니다.
'멋있고, 신기해! 정보는 전혀 없었지만, 이 등산로로 오길 잘했지 뭐야?'
소나기가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했습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니 불안했습니다.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아 조바심이 났습니다. 우비를 입은 노부부가 한 쌍 지나갔습니다. 허리가 굽어서 구부정한 자세로 할머니가 앞섰고, 근엄한 인상의 할아버지가 뒤따랐습니다.
'설악산은 과연 명산인가 봐! 해외에서 온 외국인들도 흔히 보이고, 연세 많은 어르신들도 올 정도면.'
마침내, 무사히 하산을 마쳤습니다. 잠시 후, 엄청난 폭우가 들이닥쳤습니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번 산행은 예상하지 못했던 멋진 풍경과 신나는 계곡 물놀이, 동·식물들과의 즐거운 만남 등 즐거운 추억으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