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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Oct 21. 2023

군산 관리도 깃대봉과 시간 여행(2)

  설상가상이었다. 화창한 토요일, 이대로 귀가할 순 없었다. 군산의 갈 만한 곳을 서둘러 검색했다. 가장 가깝고, 현재 식사가 가능한 맛집을 찾았다.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길을 나섰다.

  식당 상호는 한옥과 일본식 가옥을 뜻했다. 팔십 년 이상의 오래된 건축물이었다. 사십 년 전통의 어머니 가업을 이어가기 위하여 일본식 가옥을 복원한 건물이라고 했다.

  주말답게 식당은 대기 손님들로 넘쳤다. 한참을 기다렸다. 지루했다. 옆 좌석에 앉은 아가씨를 흘깃 봤는데, 치마 아래로 맨다리가 보였다. 봄 햇살이 찬란히 비쳤지만, 아직 이월이었다.

  ‘청춘이네, 청춘이야! 안 춥나? 곧 후회할 텐데!’

  오전 시간을 다 까먹었다. 시간이 아까웠지만, 배부터 채워야 하기에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드디어 차례가 왔고, 대표 음식인 소고기 뭇국을 주문했다. 군침이 돌았다. 인터넷에서 본 후기는 칭찬 일색이었으나, 막상 먹어 보니 과한 평이었다.

  ‘이걸 먹으러 군산까지 온 사람도 있구나.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냥, 집에서 끓여도 이 정도 맛은 나지 않나?’

  열심히 검색한 결과, 군산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잔재가 여태 보존된 도시라고 했다. 갈 만한 곳들을 동선에 맞게 추렸다. 식당에서 가장 가까운 군산 항쟁관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충분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서, 가볍게 운동할 겸 걸었다.     


  구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 관사(등록문화재 제 칠백이십육 호, 천구백사십 년 건립) 

    

  구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 관사는 천구백사십 년대에 'ㄱ' 자 형태로 지은 이 층 건물이다. 일제강점기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청 뒤쪽에 있던 이 관사는 판사와 검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다다미(마루방에 까는 일본식 돗자리), 불단(족자를 걸거나 꽃이나 장식물 등을 꾸며 놓을 수 있도록 바닥을 한층 높게 만든 붙박이형 구조물), 반침(큰 방에 딸린 조그만 방) 등으로 구성된 관사의 내부는 일본식 주택의 특징을 보여 준다.

  이에 반해 관사의 외부를 이루는 지붕 구조와 현관의 캐노피, 이 층 현관 유리창에 쓰인 스테인드글라스, 오르내리창(두 짝의 창문을 서로 위아래로 오르내려서 여닫는 창), 벽난로, 연도 시설(연기를 빼내는 시설), 지하실 등은 서양 주택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일본과 서양의 주택 양식이 혼합된 이 관사는 군산지청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 주는 곳이다.


     

  까치발을 들어 굳게 닫힌 철문 너머를 살펴보니, 낡은 서양식 주택이 보였다. 주변은 온갖 잡동사니들이 뒹굴고 있었다. 잠시 천구백사십 년대로 돌아갔다.

  ‘지저분해 보이지만, 근현대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로군. 그 시절에는 분명 호화로운 건물이었을 테지.’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수탈한 역사를 떠올리니, 사뭇 분통했다.

  군산 항쟁관에 도착했다.

  ‘점심시간입니다. 오후 한 시부터 관람 가능합니다.’

굳게 닫힌 입구에 안내문이 걸려 있었다.

  ‘이럴 수가! 어쩌지?’

허탕 치고 돌아가는 방문객들이 더러 있었다. 발을 동동 굴렀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휴, 점심시간 지난 뒤에 다시 와야겠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찾은 군산 항쟁관은 협소했습니다. 일 층 벽면에는 태극기에 대한 영상이 재생 중이었습니다. 잠시 머물렀습니다.     


     

  군산항 미곡야적장(천팔백구십구년 오월 일일 개항)   

  

  군산 내항은 개항 이후 광복 전까지 호남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이 일본으로 반출된 곳이었다. 이곳은 일본으로 실어갈 쌀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곳이다. 쉽게 하역하기 위해 삼기의 부잔교도 설치했다.

  일제의 식민정책은 한국을 식량 및 원료 생산지로 또, 일본 공업 제품의 판매 시장으로 만들고자 산미 증산 계획에 역점을 두었다. 정미소 열 개가 밤낮없이 가동됐다.

  일본인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강제 징수로 빼앗은 곡물은 모두 군산으로 집결되어 군산 부두에는 쌀이 산과 같이 쌓였다.

  천구백삼십사년에 생산된 천 육백 칠십 이만 석 가운데 약 육십 퍼센트에 해당하는 팔백구십 일만 석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송출됐다.

  그중 삼백만 석 이상은 전라도 지역에서 생산된 미곡이었다. 당시 내항 창고 삼동에는 쌀 이십사만 가마를 동시에 보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옛 군산 경찰서 터(삼일 운동 만세)    

 

  천구백십구년 삼월 오일 군중과 학생 등 천여 명이 군산 경찰서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삼오 독립운동을 계획했던 영명 학교 학생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군산 시내로 행진했다.

  중도에서 보통 학교 학생과 군산 교회 교인들이 행렬에 참여하여 시위 대열은 오백 명으로 증가했다. 평화동과 영동을 거쳐 본정 큰 거리를 지나 경찰서에 이르렀을 때, 천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군산 경찰서 앞에서 구속된 영명 학교 교사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당시 검거된 사람은 구십여 명에 이르렀다.

  또, 이곳은 노동과 농민 운동을 비롯한 사회 운동가 및 독립 운동가를 체포하고 구금한 탄압 장소이다. 군산 경찰서는 천구백십 년에 신축됐고, 천구백이십이년 구월 육일에 증축됐다.


     

  ‘어휴, 먹고살기 각박한 시대였네. 한국인은 대체 뭘 먹고 살았나? 지금 생각해도 울분이 터진다! 만약,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과연 어떻게 살았을까? 독립운동을 했을까, 아니면 친일 운동을 했을까?’

  우측의 가파른 나무 계단을 타고 이 층으로 올라가면 애국지사들에 대한 설명을 담은 액자들과 고문 기구들이 몇 점 있었다.        


  

  유관순 열사(천구백이년∼천구백이십년)

     

  일제에 의해 학교가 휴교에 들어가자 만세 시위를 지휘하기 위해 바로 귀향했다.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방문하면서 시위 계획을 세웠다. 그해 음력 삼월 일일 아우네 장터에서 삼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됐다. 이때 부모님이 일본 헌병에게 살해당하고, 집은 불탔다.

  삼 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서울로 이송되고,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일본인 검사에게 걸상을 던져 법정 모독죄가 가산되어 칠 년 형을 선고받았다. 서대문 감옥에 갇혀서도 계속 독립 만세를 부르며 동지들을 격려하다가 갖은 악형을 받고 옥사했다.


     

  영화 <항거>가 떠올랐다. 유관순 열사가 서대문 감옥에서 고문을 받다 옥사하기까지를 그린 내용이다. 영화에서 본 낯익은 고문 기구들을 보자, 끔찍해서 발걸음을 차마 옮길 수가 없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게 행운이구나!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안중근 의사(천팔백칠십구년∼천구백십년)

     

  조선 말기의 교육가, 의병장, 의사이다. 동의회를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담당했다. 천구백구년 하얼빈 역에서 침량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했다.

  저격 후, 안중근은 러시아어로 ‘코레야 우라(한국 만세)!’라고 크게 외쳤다. 그는 곧바로 러시아 제국 공안들에게 체포되어 일본 정부에 넘겨졌다. 뤼순 감옥에 갇혀 사형 선고를 받았다. 천구백십년 삼월 이십육일 처형되어 순국했다.       


   

  영화 <영웅>을 생각했다. 안중근 의사의 순국 전 일 년을 담은 이야기이다. 국민 영웅의 최후가 너무 안타깝고 분해서, 눈물을 펑펑 쏟으며 봤다. 마지막으로, 드라마 <각시탈>을 떠올렸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대립 관계와 복잡한 심리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군산 항쟁관은 좁은 공간이 무색하게 충분히 가치 있는 곳이었다. 나라 잃은 비통함을 온 가슴으로 느끼며,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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