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에 오들오들 떨며, 장미동에 도착했다.
‘이렇게 강풍이 부니, 관리도행 배가 결항됐군. 휴, 역사 공부하는 기회로 생각해야겠다!’
근대 역사박물관은 최근에 새 단장을 마쳤는지, 재개장 기념으로 입장료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은 근대 미술관, 근대 건축관, 진포 해양 테마 공원 등이 모인 역사 문화 단지이다. 인근에 식당과 카페 등도 언뜻 보여서, 군산 내에선 꽤 번화하다고 느꼈다.
‘군산 안에서나 번화한 거지, 거리 풍경이 산뜻한 맛은 영 없어.’
소설 <탁류>에 대한 글을 발견했다. 학창 시절 문학 시간에 접한 작품인데, 읽어본 적은 없었다. 작가 채만식의 소개와 소설의 줄거리를 살펴봤다.
‘작가가 군산 출신이구나!’
천구백삼십년대 최고의 풍자 소설가였던 채만식의 <탁류>는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식민자본주의의 탁류에 빨려 들어가는 초봉의 비극을 통해 당대 사회의 부조리함과 인간군상의 타락상을 특유의 풍자로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미두에 손을 댔다가 몰락한 정 주사의 큰딸 초봉은 가난한 의사 지망생 남승재에게 평소 호감을 가졌다. 그러나, 부모의 강요로 인해 고태수와 결혼한다.
고태수는 겉보기에 잘 나가는 은행원이지만, 실은 공금을 횡령해 미두와 주색에 탐닉하는 난봉꾼이다. 고태수는 하숙했던 쌀가게의 주인 한참봉의 아내 김 씨와 간통했고, 결혼 후에도 김 씨를 만났다. 친구 장형보의 밀고로 고태수는 한참봉에게 맞아 죽는다.
꼽추 장형보는 고태수와 친구인데, 추악한 용모와 탐욕스러운 성격을 지녔다. 고태수가 죽음을 맞이하던 즈음, 초봉은 장형보에게 겁탈당한다. 아버지의 친구인 박제호의 첩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장형보의 아내가 된다. 결국, 초봉은 그를 맷돌로 살해하고 만다.
한편, 초봉에 대해 연민을 느끼던 남승재는 의사가 된다. 그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초봉의 동생 계봉과 사귄다. 언니 초봉의 딱한 사정을 듣고, 초봉을 돕기로 마음먹지만, 이미 장형보를 살해한 초봉과 만나게 된다. - 군산 장미공연장 정원에서 본 안내문.
‘다양한 인간상이 나오는구나! 흥미롭다. 초봉은 이 남자, 저 남자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결국 살인자가 되고 마네. 안타깝다!’
초봉과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동생 계봉에 대한 소개가 눈길을 끌었다.
에스 여학교에 다니며, 똑똑하고 야무진 성격이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남자들에게 끌려다니는 언니와는 다르다. 서울에 올라와 백화점 점원이 되어 진취적으로 삶을 개척한다.
승재에게도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해 연인 사이가 된다. 자신의 소신과 의지를 가진 꿋꿋한 신여성으로 그려진다. - 군산 장미공연장 정원에서 본 안내문.
‘와, 이게 바로 참된 여성! 멋지다.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했네!’
시간을 내어 소설도 읽고, 조만간 채만식 문학관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어야 할 책과 갈 곳은 무궁무진하다. 세상은 참 넓다.
장미(藏米) 공연장과 미즈 카페
이 건축물은 천구백삼십년대 조선 미국 창고 주식회사에서 쌀을 보관했던 창고였다. 일제강점기 쌀 수탈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이천십이년도에 다목적 공연장으로 개보수했다. 이 일대는 천구백십년부터 천구백사십오년까지 쌀 수탈의 거점이 됐고, 일본인들의 무역 회사와 상업 시설이 독점하는 거리로 전락했다. 건물들을 이전, 개축하며 근대 문학 소통 공간으로 개보수했다. - 군산 장미공연장 정원에서 본 안내문.
‘장미동 이름 자체에 수탈의 의미가 담겼네. 쌀을 감춘다는 의미로구나!’
생소한 한자어를 검색하며, 뜻을 익혔다. 카페에 들어가 내부를 살폈다. 다다미가 깔린 방에서 손님들이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선, 한 시도 있고 싶지 않은데. 기분 나빠, 어서 탈출해야지! 과거 수탈의 현장에 머무르고 싶지 않은걸!’
걸어서 몇 걸음 거리에 근대 건축관이 있었다.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
당시 이곳의 주요 업무는 군산항을 통해서 반출되는 쌀 수익금을 예치하고, 농지 매입을 위한 자금을 융자해 주는 일이었다. 현재는 민간에 매각된 이후 화재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건물을 새롭게 단장해 군산 근대 건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곳은 군산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로,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도 등장한다. - 군산 장미공연장 정원에서 본 안내문.
한 모녀가 함께 내부에 들어섰는데, 그들은 아무 정보 없이 그냥 온 모양이었다.
“근대 역사박물관에서 한 번 발권하면, 다른 박물관들도 통합 입장 가능해요.”
친절히 안내했으나, 딸인 듯한 여자는 설명을 듣기 싫은 태도였다.
‘입장료 아끼라고 기껏 설명해 줬더니만, 태도 좀 보소. 쯧쯧…….’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이 금고가 채워지기까지 우리 민족은 헐벗고 굶주려야만 했다.’
벽에 적힌 각진 문장을 보고, 생각했다.
‘남에게 나라를 빼앗긴 건 억울하지만, 분명 헐값에 팔아넘기고 잇속을 챙긴 작자들이 있잖아. 그런 한국인이 있었다는 게 정말 창피하다…….’
건물을 나와 매서운 바람을 뚫고, 진포 해양 공원까지 둘러봤다. 최무선이 화약을 발명한 이야기가 그나마 가장 인상적이었다. 애니메이션도 봤으나, 흥미를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뭐야, 시시해! 고작 다야? 아, 지루해! 오늘 간 곳 중에서 가장 볼 게 없네.’
빠듯한 일정에 지친 몸을 이끌고, 꿋꿋이 삼일 운동 기념관으로 향했다. 드디어, 마지막 관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