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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Dec 28. 2023

성탄 이브엔 하동 지리산 삼도봉(1,550m)

블랙야크 백두대간 70좌 달성!

  멘티 다랑과 주말마다 등산을 다닌 지, 벌써 반년이 됐다. 몇 주 전, 성탄 이브에 등산 갈 것을 다랑에게 제안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성탄절인데, 등산 말고 다른 거 없을까?"

  "묘안이라도 있음?"

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는지 그는 결국 아무것도 제안하지 못했다. 우리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주말에 산으로 향했다.

  추워서, 북쪽으로 가긴 싫었다. 블랙야크 백두대간 인증지 중, 남쪽 지방에서 가지 않은 곳은 단 하나가 남은 상황이었다. 바로 하동의 지리산 삼도봉이었다. 계획은 이미 오래전부터 세웠으나, 엄두가 나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던 중이었다. 왜냐하면, 거리가 길고 고난도라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리산 국립공원에 문의했을 때, 삼도봉에 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직원은 쉬운 등산로를 안내했으나, 어려운 곳을 택했다. 그 이유는, 수월한 길은 예전에 블랙야크 명산 100을 인증하며 이미 가본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한 번 간 장소를 피해, 낯선 세계로 발을 디뎠다.  

  토요일 밤, 구례에서 하루 묵었다. 다랑이 지리산 인근 숙소를 알아봤으나, 수도가 얼어서 숙박이 불가했다. 구례에서 묵은 숙소는 게스트하우스였는데, 실내가 굉장히 추웠다. 화장실은 더 추웠다. 씻기 위해 탈의했을 때, 덜덜 떨어야만 했다.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속옷과 겉옷을 입었는데도, 여전히 추웠다. 

  새벽 5시,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마치고, 6시경 숙소에서 출발했다. 직전 마을을 지날 때,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글램핑장이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서, 산속의 작은 집들과 불빛이 운치 있어 보였다. 평화로웠다.

  들머리 인근에 민박집과 식당들이 밀집해 있었다.

  "원래 숙소를 여기로 정하려고 했어. 가깝지만, 동파돼서 통과. 여긴 여름에 성수기래."

  "계곡이 있으니, 여름에 시원하겠다."

  "여름에 다시 와 봐야지."

  다랑이 말했다.

  "난 안 올 건데?"

  딱 잘라 말했다.

  "그럼, 나 혼자라도......"

  "안 보낼 건데?"

  "왜?"

  "넌 날 보조해야지! 심복!!"

  다랑은 좀 컸다고 멘티 손아귀를 벗어날 심산인가 보다.

  가는 도중, 눈보라가 거셌다. 내심 걱정스러웠다. 혹시나 싶어, 지리산 국립공원에 문의했다. 다행히, 입산 가능하다고 했다. 원래 7시부터 등산할 생각이었으나, 다랑이 피곤해했다. 잠시, 눈을 붙였다. 해가 떠서 주변이 밝았다. 화장실 앞 공터에 차 4대가 나란히 서있었다. 우리보다 늦게 온 사람들이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혼자 온 남자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우연히 봤는데, 처음엔 썰매를 등에 멘 줄 알았다. 그건 썰매가 아니라, 방수 덮개를 씌운 배낭이었다.

  다랑은 요즘 야간 근무를 해서, 피로가 누적된 모양이었다. 짐이 많다며 툴툴거렸다. 장거리 산행이라서, 식량을 든든히 챙겼기 때문에 중량이 무거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용물은 보온 도시락 2개, 보온 물병 4개, 계피차를 담은 페트병 2개, 아이젠 2개, 휴대전화 2개, 모형틀 2개, 랜턴 등이었다. 배낭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큰 배낭 챙길 걸 그랬나...... 다음에 장거리 등산할 땐, 각자 배낭 메자."

  "헤드 랜턴은 챙겼어?"

  "차에 두고 왔어."

  "야등 할 수도 있는데......"

  계곡에 옹기종기 모인 바위를 덮은 흰 눈이 소담스러워 보였다. 바위틈에서 물이 콸콸콸 힘차게 쏟아져내렸다. 마치, 작은 폭포 같았다. 흐르는 물에 반사된 빛이 흰 눈을 어려 푸른 기운이 느껴졌다. 여름에 오면, 정말 시원하겠다 싶었다. 기온은 영상이었다. 별로 안 추워서, 견딜만했다.

  피아골 대피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등산객은 한 명도 못 만났다. 다들 우리보다 서둘러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을 사용하지 않은 채 걸었다. 바위로 이루어진 길이라서, 아이젠을 쓰지 않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삼홍소(三紅沼)

  단풍에 산이 붉게 타는 산홍(山紅)

  붉은 단풍이 물에 비추어 물까지 붉게 보이는 수홍(水紅),

  산홍과 수홍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붉어 보이는 인홍(人紅)이 있어 삼홍소(三紅沼)입니다.      



  가을에 과연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하며 다리를 건넜다. 기념으로 다랑과 사진 촬영했다. 삼홍소를 지나자, 웅장한 고드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엄청나다! 이렇게 고드름이 많은 건, 처음 봐!"

탄성을 질렀다.

  "부러뜨려서, 사진 찍을까?"

  다랑이 제안했다.

  "아서라, 자연 훼손이야."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좋은 사진 나올 것 같아! 나 먼저 찍어 줘!"

  "자연 훼손이라더니......"

  다랑이 꼬집었다. 큰 고드름을 부러뜨려, 손으로 감쌌다. 마치, 트로피를 들고 있는 듯한 자랑스러운 기분이었다. 또, 작은 고드름을 두 개 쥐고 칼처럼 휘둘렀다. 재밌는 결과물이 나왔다. 다랑은 큰 고드름으로 총 쏘는 흉내를 냈다. 군인처럼 용맹스러운 모습이었다.

  피아골 대피소까지는 약 2시간이 소요됐다. 정비가 잘된 길이어서, 비교적 수월했다. 식사하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었으나, 준비한 도시락을 먹었다. 지난번 거창 무룡산 삿갓재 대피소를 떠올리며, 취사장이 있는지 살폈다.

  "사람도 없고, 문도 모두 잠겼어요."

  먼저 온 다른 등산객들이 일러줬다. 맹추위는 아니었으나, 가만히 앉아 있으니 곧 한기가 몰려들었다.

  '대피소 운영을 왜 안 하지?'

나중에 국립공원 측에 문의하니, 지리산 산악 구조대가 운영 중이라고 했다. 지리산 산악 구조대에게 전화로 문의하니, 겨울을 제외한 다른 계절에만 운영한다고 했다. 그 이유는, 난방 시설이 취약해서였다.

  '지리산이 국립공원 제1호라더니, 과연 낙후하군.'

그도 그럴 것이, 화장실이 푸세식이었다. 역한 냄새가 풍겼다. 서둘러 마스크를 썼다. 창문은 환기를 위해서인지, 활짝 열어 놓은 상태였다.

  모형틀로 오리와 하트를 만들었다. 싸라기눈이라서, 잘 안 뭉쳤다. 힘없이 금방 부서지고 말았다.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나름 즐겁게 촬영에 임했다. 오리를 덮칠 듯한 익살스러운 몸짓을 짓기도 하고, 품에 안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또, 새가 날아와 머리, 어깨에 앉은 것 같은 연출도 했다.

  피아골 대피소에서부터 아이젠을 착용했으나, 조금 오르자 길이 질퍽했다. 기온이 따뜻해서, 눈이 녹은 곳이 초반에 더러 있었다.

  "안돼, 눈이 녹고 있어!"

  한편으론, 추위로 인해 고생하지 않아서 좋았다.

  높은 고도에 이르자 아름다운 눈 세상이 펼쳐졌다. 앞서 간 이들의 흔적 덕분에 수월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안경 쓴 남자가 혼자 하산 중이었다.

  "어디 다녀오세요?"

  다랑이 물었다.

  "원래 반야봉까지 가려고 했는데, 해가 일찍 저물 것 같아서 그냥 하산해요. 어디까지 가세요?"

  "삼도봉까지 가요."

  "아, 거기까진 가능하겠네요."

  아무래도 그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등산객들을 몇 명 더 마주쳤다.

  "어디 다녀오세요?"

  "반야봉에서 오는 길이요."

  "다들 반야봉에서 오네."

  "거긴 여름에 가야 돼. 뱀사골 계곡이 끝내 주거든! 블랙야크 명산 100 인증지야. 예전에 여름에 가서, 발 담갔어. 시원하고, 좋아!"

  "아, 나도 가보고 싶다."

  다랑이 말했다.

  "잘 가요! 난 안 갈 거니까."

  삼도봉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주목이 많았다. 대체적으로 나무들 키가 매우 컸다. 지난주에 거창 무룡산에서 본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다랑은 영상 촬영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별안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후후, 내가 뭔가 보여줄게. 기대해!"

  신이 나서, 율동하며 숫자송을 불렀다.



  일, 초라도 안 보이면

  이, 렇게 초조한데

  삼, 초는 어떻게 기다려

  사, 랑해 널 사랑해

  오, 늘은 말할 거야

  육, 십억 지구에서 널 만난 건

  칠, Lucky 야

  사랑해 요기조기 한눈팔지 말고 나를 봐

  좋아해 나를 향해 웃는 미소 매일매일 보여줘

  팔, 딱팔딱 뛰는 가슴

  구, 해줘 오 내 마음

  십, 년이 가도 너를 사랑해

  언제나 이 맘 변치 않을게



  다랑은 처음엔 웃으며 노래를 따라 불렀으나,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다. 기대에 못 미쳤다.

  '잉? 좋아할 줄 알았는데, 별로 안 좋아하네?'

  나중에서야, 그 원인을 알았다.

  "숫자송 노래 가사가 누나 진심일 거라고는 생각 안 했거든." 

  "노래는 그냥 노래일 뿐이야. 본심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잖아."

  오후 2시 30분, 목적지인 삼도봉에 도착했다. 등산만 6시간 30분 소요됐다. 사진과 영상을 찍느라 천천히 간 탓에, 예상 시간보다 약 30분 늦었다. 삼각형 모양의 조형물에는 한 면마다 글씨가 쓰여있었다.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가 만나는 경계라서, 삼도봉이라고 이름 지었나 봐! 영동 민주지산에도 삼도봉 있는데, 거기도 그런 맥락인가?"

 조형물 뒤에서 높이 뛰었다. 처음엔 무릎을 접고 두 발을 모으고, 두 번째는 걷는 것처럼 한쪽 다리를 앞으로 내딛으며 솟구쳤다. 마지막으로, 정면을 보며 다리 찢기를 하며 힘차게 올랐다.

  다음날, 산악회 단체 대화방에 점프샷을 공유했다. 높이 뛰었다고 다들 칭찬했다. 흐뭇했다. 그간 연습한 보람을 느꼈다.

  "기온이 영상이었던 것처럼, 슈히 님 기분도 영상에 있네요."

  시간을 계산하니, 하산할 때 아무리 서둘러도 5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터였다. 빠르면 저녁 7시, 늦으면 8시쯤으로 예상했다. 다시 찾은 피아골 대피소에서 간식을 먹는데,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해가 지고 있어. 야등 당첨이네. 네 헤드 랜턴이 필요한데, 왜 안 챙겼어?"

  다랑에게 톡 쏘아붙였다. 배낭에서 헤드 랜턴을 꺼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날씨가 추워서, 단추가 안 눌려. 굳었어. 고장 난 건 아니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물건인데, 구식이라서 성능도 후졌다. 반면, 다랑의 헤드 랜턴은 빛이 밝고 선명하다. 굳이 새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까닭은, 다랑에게 좋은 소유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소지품을 차에 두고 왔다. 처음엔 화를 내지 않았으나, 갑자기 짜증이 벌컥 일었다. 가는 나뭇가지가 얼굴에 닿아서, 진로를 방해했다. 

  "너 요즘, 통 내 말 안 들어. 표정도 어둡고. 못마땅해! 우리가 처음 등산 시작한 6월에, 분명 난 각자 배낭을 메자고 했잖아. 그걸 굳이 네가 혼자 다 들겠다고 했고. 그런데, 이제 와서 나도 짐을 들으라고? 9번 잘해주다 1번 실수하면, 엄청 욕먹어! 우리 1월엔 당분간 만나지 말고, 거리를 두자."

  다랑을 제친 채, 눈 덮인 다리 위를 저벅저벅 앞서 걸어갔다. 다랑이 좇아왔다.

  "누나!"

  그는 앞장서며, 휴대전화를 꺼내 바닥을 비췄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저녁 7시 무렵이었다. 등산하기 전에 쌓였던 눈은 모두 녹아서, 흔적을 감췄다. 우리보다 늦게 왔던 등산객들의 차들도 모두 사라진 후였다. 시간의 경과를 느꼈다. 무사히 하산했으나, 심기가 불편했다.

  남원의 숙소로 이동했다. 실내는 냉기가 흘렀다. 입실 후, 온천수로 씻으며 몸을 덥혔다. 그가 데워 온 도시락을 먹는데, 속상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다랑이 무릎을 꿇으며, 사과했으나 그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일단, 기다려 볼게. 너 하는 거 봐서."

대화 끝에, 좀 더 관계를 지켜보기로 했다.

  "1월에 안 만난다고 한 건, 사형 선고로 들렸어. 남원에서 시작해서, 남원에서 끝날 뻔했네."

  다랑이 우물쭈물 말했다. 우리는 지난 6월, 넷이서 남원 수정봉을 등산한 적이 있다. 그게 우리의 첫 산행이었다.

  문득, 시상이 떠올랐다.

  "피아골로 3행시 지어 볼게. 운 띄워 봐."

  "피."

  "피, 곤해."

  "아."

  "아, 깐 □□ 안 한다며."

  "골."

  "골, 때리네." 

  연하를 애인으로 두려면, 자나 깨나 체력이 좋아야 한다. 성탄 이브다운 밤이었다.

  다음날, 다랑이 품에서 별안간 양말 한 쌍을 건넸다.

  "이게 뭐야?"

  "성탄 선물."

  "팜트리 양말이잖아. 이거 비싼 건데! 2만 원은 족히 할걸? 여자들이 많이 신던데! 이걸 어떻게 알고 샀어?"

  "누나, 나 말고 다른 루돌프 구하면 안 돼. 알았지?"

  서로 사랑하라는 성탄의 의미에 걸맞은 선물이었다. 그를 미워했던 감정이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성탄 케이크를 사기 위해 간 빵집에는 긴 대기줄이 있었다. 지루했지만, 과연 성탄절이구나 싶었다. 다랑이 말했다. "케이크를 사려고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 만큼 누나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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