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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히 Dec 20. 2023

별세계 거창 무룡산(1,491m)

다랑의 소원 풀이

  2010년, 멘티 다랑은 군 입대 전에 혼자 한라산을 올랐으나, 아쉽게도 설경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시간이 흘렀다. 다랑은 그간 많은 일들을 겪었고, 20대를 훌쩍 넘겼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에게 한라산 설경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나 보다.

  2023년, 다랑은 여태 설경을 보지 못한 채였다. 그는 다시 한번 한라산을 가고 싶어 했으나, 여건이 안 돼서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던 차였다.

  "한라산, 네 번이나 갔다. 한라산 설경은 못 봤지만, 안 가고 싶어. 설경은 사진으로 보는 게 단연 최고야! 설산 가면, 엄청 고생하거든. "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그에게 전했다.

  블랙야크 백두대간 남은 인증지 중, 오직 두 개만 남쪽이고 나머지는 죄다 북쪽이다. 너무 추워서, 북쪽은 가기 꺼려졌다.

  '강원도는 반드시 여름에 가야 해! 지금 가면 얼어 죽겠지......'

  남쪽의 남은 인증지 두 개는 거창 무룡산과 하동 지리산 삼도봉이다. 천지 온천을 즐기기 위해서, 거창 무룡산을 먼저 가기로 결정했다. 마음먹은 시점에는 분명 일기예보에 비나 눈 소식은 없었다. 주말이 다가오자, 급격히 기온이 하강하더니, 대설주의보가 내렸다.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확인하니, 지리산은 통제 중이었다. 불안했다. 거창 무룡산의 관할인 덕유산 국립공원에 전화로 문의하니, 당일이 돼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오전 아홉 시에 전화 주세요."

  발을 동동 굴렀다. 

  "휴, 안타깝지만 그냥 온천 관광만 해야겠네. 그래도, 혹시 몰라. 이럴 경우, 이판사판이다! 일단 등산 장비는 다 챙겨 가자."

  토요일 밤, 가조 호텔에서 온천을 즐겼다. 미끌거리는 물의 감촉이 신기하고, 기분 좋았다. 지난 추석 연휴에 방문한 제주 추자도의 수질과 느낌이 비슷했다.

  일요일 새벽 네 시경, 지리산은 통제가 풀렸다고 했다. 다랑이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공지사항을 확인했다.

  "오, 그럼 우리도 가능성이 있는 건가?"

그건 좀 더 기다려야만 알 수 있었다. 오전 아홉 시경, 덕유산 국립공원에 전화했다.

  "거창 무룡산, 등산 가능한가요?"

떨리는 마음으로 문의했다.

  "네, 가능합니다."

  "고맙습니다!"

  서둘러 채비를 마쳤다. 준비한 음식을 전자레인지로 가열하기 위해 공용 주방에 들렀다. 한 투숙객과 잠시 대화했다.

  "등산 가시나 봐요?"

  "네, 눈꽃 산행 가요!"

  "눈이 별로 안 왔는데......"

  그랬다. 호텔 주변에는 눈을 전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무룡산 들머리인 황점 마을 주차장까지는 약 한 시간 거리였다. 한산한 도로를 달리는데, 멀리서 설산이 보였다.

  "우와, 우리가 갈 곳이 바로 저긴가 봐!"

그때부터 설레기 시작했다. 참 오랜만에 느끼는 기대감이었다.

  황점 마을 주차장에 주차하지 않고, 주행해 임도를 따라 약 600m를 더 올랐다. 마을 입구에서 힘겹게 빙판길을 오르는 승용차 한 대와 마주쳤다. 여자 운전자였는데, 세 번이나 시도했으나 바퀴가 헛돌았다. 결국, 그녀는 우리에게 길을 양보했다.

  다랑은 마침 중고 SUV를 한 대 장만한 터였다. 우리가 탄 사륜구동은 힘들이지 않고 가뿐히 경사로를 지났다. 다행이었다. 좁은 임도를 따라가니, 공터에 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주차하고, 하차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이 뽀드득, 하고 정겨운 소리를 냈다. 흰 부츠를 신은 채, 다랑과 발 사진을 찍었다. 눈 오는 날, 더없이 잘 어울리는 신발이었다.

  혼자 온 남자가 우리의 뒤를 따랐다. 휴대전화를 차에 놓고 온 다랑이 되돌아갔다가, 남자와 함께 올라왔다. 그는 국립공원 직원이라고 했다. 근무자 교대를 위해 삿갓재 대피소로 가는 중이었다.

  "삿갓재 대피소는 오후 2시부터 통제돼요. 곳곳에 CCTV가 있어요."

  통제라는 말에 흠칫 놀랐다. 시간제한이 있다니,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정상에 닿지 못한다면 굉장히 억울할 것만 같았다. 국립공원 직원의 눈치를 살피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안내 산악회에서 단체로 온 어르신들이 앞에서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었다.

  "먼저 지나가도 될까요?"

  다랑이 예의 바르게 물었다. 그들은 길을 비켰고, 우리는 앞섰다.

  삿갓재 대피소에 가까워질수록, 눈꽃 세상이 펼쳐졌다. 연신 감탄을 연발했다.

  "우와, 장관이네! 여태 본 설경 중 최고다!"

  과거에 본 어떤 산의 상고대 보다 무룡산의 눈꽃이 으뜸이었다. 온통 흰색 스프레이를 칠해놓은 것만 같았다. 아낌없이 팍팍! 실처럼 가녀린 나뭇가지에 눈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모습이 마치 튀김옷 같았다.

  "꼭 오징어 튀김 같지 않니? 맛있겠다! 오, 저건 영락없는 불가사리네!" 

  하늘의 푸른빛과 눈의 흰빛이 조화로웠다.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여름에만 청색과 백색을 선호하는 줄 알았는데, 최근 들어서도 그 색들이 유독 눈에 띈다. 물아일체로 자연과 동화되는 착각에 빠졌다. 즐거웠다. 

  장갑 낀 두 손으로 눈을 한 움큼 집었다. 입으로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눈이 흩날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하나 잡아당겼는데, 눈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눈이 눈에 들어가서,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즐거웠다. 눈 오는 날에 신난 강아지처럼, 즐겁게 촬영했다.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건넸다.

  "스패츠 끈 풀렸어요."

  "끈이 짧아서, 안 묶여요. 등산화를 교체했거든요. 신발이 커요."

같은 질문을 계속 받아서 상당히 귀찮았지만, 상냥히 대답하려고 애썼다.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삿갓재 대피소에 도착하니, 등산객들로 붐볐다. 오후 한 시였고, 여유로웠다. 취사실에서 식사했다. 김밥은 굳어서 식감이 좋지 않았으나, 열량을 내기 위해 부지런히 섭취했다. 우유, 계피차도 마셨다. 든든했다. 라면을 끓여 먹는 이들이 있었는데, 다랑은 부러운 모양이었다. 창문을 통해 하늘이 손바닥만큼 비죽 보였다. 눈이 잔뜩 창문을 가리고 있었다.

  삿갓재 대피소에 이르기 전의 등산로는 숲이 우거져서, 비교적 온화한 편이었다. 고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상까지 가는 길은 능선이라서 칼바람과 맞서야만 했다. 경치는 아름답고도 황홀했으나, 고비였다. 극한의 추위와 맞닥뜨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서 내려다본 마을은 평화로웠다. 논과 밭이 흰 이불을 덮은 모습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마음에 담았다. 별세계였다. 꿈결 같았다.

  눈썹에 얼음이 맺힌 상태로 마침내, 정상에 닿았다. 빨간 옷을 입은 여자 세 명이 나란히 서서 기념촬영을 하는데, 보기 좋았다. 단체로 온 어르신들은 종주를 하기 위해 직진했다. 우리는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후발대 몇 명과 마주쳤을 뿐, 오직 다랑과 둘 뿐이었다. 방해꾼이 없어서, 좋았다.

  다랑은 추위를 못 견뎌서, 사진도 찍는 둥 마는 둥 했다. 그가 쓴 빨간 모자 위에 눈이 수북이 내렸다. 

  '마치, 쑥을 버무린 떡 같군.'

  추워도, 열심히 촬영했다. 추억을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서였다. 눈밭에 누워 팔을 휘저어 나비의 날갯짓을 했다. 다랑도 곁에 누워서, 사진을 찍었다. 아쉬웠다.

  '턱을 당겨야 얼굴이 갸름하게 잘 나오는데. 콧구멍이 나오게 고개를 쳐들고 찍으면, 저팔계 같다고!'   

  멘티에게 앞으로 가르쳐야 할 것들이 아직, 너무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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