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연착이 너무해

제주 올레길 3구간

by 슈히

금요일 새벽, 문자가 한 통 왔다. 청주 공항에서 9시 10분에 출발 예정이던 티웨이 항공이 연착된다는 소식이었다. 이제 막 집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그럼, 내 일정은 어쩌라는 거야......!'

같은 시각, 남자 친구는 벌써 청주 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비행기 연착 소식을 그에게 알리자, 난감해했다.

"청주 공항에 안개 안 꼈는데...... 다행히, 내가 탄 비행기는 연착 안 됐어. 지금은 제주 공항에 잘 도착했어."

"그러게 말이야! 게다가, 대한 항공은 9시에 출발했는걸? 안개 탓이라면 다른 항공사들도 비행 불가 아니야?"

"티웨이가 저가 항공이라서 그래. 대한 항공이나 아시아나는 비싸잖아. 그래서, 문제가 생겨도 조치가 빠르지. 그런데, 나 문제가 하나 생겼어."

"뭔데?"

"누나가 빌려준 캐리어, 파손됐어."

"뭐?! 왜?"

그에게 사연을 들은 즉슨, 수하물을 옮기는 과정에서 캐리어 아랫부분이 금이 갔다고 했다.

"사진 찍어서 보여줘."

"항공사 측에서 깨진 캐리어 이미 가져갔어."

"아, 디자인이 예뻐서 산 제품인데......"

"현금으로 고작 18,000원 준다길래, 새 캐리어로 교환하겠다고 했어."

"휴, 연말 기념 여행 첫날부터 이게 다 무슨 일이니?"

들고 간 얇은 책 한 권을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남자 친구로부터 전화가 두세 통 걸려왔다.

"아직도 출발 안 했어? 청주 공항이 원래 안개가 심하대."

"작년에 제주 6번이나 갔는데, 비행기 연착된 건 이번이 처음이야!"

약 2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행기는 가까스로 이륙했다. 제주 공항에 오후 1시경에 도착했다.

"어디야?"

남자 친구에게 전화했다.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는 키가 커서, 찾기 수월했다. 그런데, 그가 두 손으로 든 휴대전화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꽃 중의 꽃, 박서화.'

마치 연예인의 방문을 팬이 환영하는 듯했다.

'에이, 전광판이 너무 작잖아?'

그가 준비한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으며, 공항버스를 기다렸다. 어이없게 오전 일정을 통째로 날리고 말았다.

"휴, 올레길 3구간 걷긴 글렀네. 적당히 걷다가, 버스 타고 이동해야겠다. 일몰 전에 숙소 입실하자. 첫째 날부터 무리하면 곤란하거든."

짐은 운반 업체에 맡겼다. 이윽고 도착한 공항버스를 타고, 서귀포시로 달렸다. 가방에서 영양제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거 마셔."

"'라라올라? 힘이 바로 올라'로군. 이걸 왜 지금 줘?"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서, 어리둥절했다.

"밤에 자기 전에 마셔야지."

"됐거든?"

버스에서 하차해서, 환승했다. 목적지에 닿았을 무렵, 이미 오후 3시경이었다. 시간을 도둑맞은 게 억울하고, 분했다. 하지만, 달리 손 쓸 방도가 없었다. 즐거운 여행을 위해서 속히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올레길 3구간의 시작은 온평포구, 혼인지 마을이었다.



혼인지 마을 설촌 유래


제주의 시조인 고, 양, 부 삼선인은 삼성혈에서 태어났다. 그들은 수렵을 하다가 온평리에 이르러 바다로부터 떠내려오는 궤짝 세 개를 발견하였다. 건져 올려보니 세 명의 공주와 말, 소, 오곡백과 등이 들어있었다. 벽랑국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고 왕이 자기 딸들을 보낸 것이었다(중략).

삼공주를 맞이한 삼선인은 연못에 와서 정화수를 떠놓고 혼인을 하였으며, 그 옆 굴에 신방을 차렸다. 그들이 혼인했던 엿못은 혼인지라 부르며, 신방을 차렸던 굴은 신방굴이라 부른다(중략).

우리 마을은 온화하고 평화롭다 하여 온평리라 불린다.



"세상에! 딸들을 무작정 바다에 띄우다니, 굶어 죽으면 어쩌려고...... 작년 3월에 삼성혈 가봤어! 거기 벚꽃 명소야. 제주 건국 신화 애니메이션이 인상적이었어."

남자 친구에게 설명했다.

어느 집을 지나는데, 노란색 열매가 눈길을 끌었다. 댕유자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도민에게 묻자 하귤이라고 했다. 댕유자와 하귤의 차이를 인터넷에서 검색했으나, 확실한 분간법을 찾을 수 없었다. 길에서 마주치면, 별 차이를 못 느낄 정도였다.

걷다가, 애기 동백을 발견했다. 사진으로만 봤는데, 드디어 실물을 접하는 순간이었다.

"애기라고 하기엔 꽃이 거대하고 화려한데, 왜 아기라고 부른담?"

내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이 만약 있다면, 애기 동백이 아니라 숙녀 동백이라고 부를 작정이다.

예전에 해녀박물관에서 본 물허벅이 허름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어깨에 메는 체험하기네."

체험하기는 꺼려졌다. 고생하고 싶지 않아서, 보기만 했다.



물허벅- 물을 길어 나르는 물 항아리.


주로 제주도에서 많이 쓰인다. 제주도에서는 육지와 달리 물허벅을 바구니로 된 물구덕에 넣어 밧줄로 등에 져서 식수를 나른다. 제주도는 본래 바람이 세고 돌이 많은 고장이라, 물허벅을 머리에 이고 나를 경우 자칫하면 돌에 채거나 바람에 쓰러질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등에 져서 운반하는 것이다(중략).



제주의 시조 삼인과 벽랑국의 공주들이 혼인하는 동상을 훑고, 용천수가 솟는 만물을 지났다. 해변에서 오징어들이 줄 위에서 바람에 나부끼며 춤추고 있었다. 신이 나서, 옆에서 발레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본인의 어머니에게 꼴뚜기라고 불리는 누군가가 문득 떠올랐다.

용변이 마려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허름한 무인 서점이 눈에 띄었다. 귤 하나를 남자 친구와 나눠 먹고, 잠시 머물렀다. 그의 어깨에 다정히 기댄 보기 좋은 사진도 촬영했다.



앞괴바당


마을의 연인들이 연애를 하며 사랑을 싹 틔우던 장소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사랑이 영원하기를 빌어보시라.



온평 환해장성이라는 낯익은 단어가 보였다.

"응? 나 이거 다른 데서도 봤는데. 엄청 길구나! 음, 그땐 혼자 버스 타고 맛집 갔어."



온평 환해장성


환해장성은 제주도 해안선 200여 리(약 120km)에 쌓은 석성을 말한다(중략).



도대(옛 등대)


(중략)'도'는 입구를 나타내는 제주어이며, '대'는 돌을 쌓아 놓은 시설물을 말한다. 도대는 선인들의 해양문화를 증언해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야간에 선박이 입항할 때 각지불을 올려놓아 위치를 나타내었던 중요한 해양조형물이다(중략).



신산리 마을 카페에서 중간지점 도장을 올레길 수첩에 찍었다. 시간이 없어서, 김영갑 갤러리까지 버스로 이동했다. 오후 5시였다. 입장 마감 시간이 지나서, 안타깝게도 내부를 관광하진 못했다.

"올레길에 미술관, 박물관 참 많은데, 시간이 없어서 늘 못 봤어. 올레길 다 걸으면, 차 타고 편하게 유람해야지!"

김영갑 갤러리에서 곧장 표선의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천천히 걸으면서, 올레길 3행시를 지었다.



올, 해도 다 갔네

레(내), 맘 같이 되진 않았지만

길, 들여져서 좋네



남자 친구가 지은 시는 그럴싸했다. 마지막 행이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싱긋 웃었다.



올, 해 6월에 덫을 놨더니

레(내), 게 걸려든 너!

길, 이로 봐서 월척이네^^



"어때? 내가 더 잘 지었지?"

자신 있게 말하며 그에게 동의를 구했는데, 그는 뜻밖의 반응을 보였다.

"어떤 길이인지,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는걸!"

이것이 바로 남녀 관점의 차이인가 보다. 엉뚱해서 그만, 웃고 말았다.

신풍 신천 바다목장과 배고픈 다리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등장한 감귤밭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감귤색과 노을색이 조화롭네!"

주렁주렁 열린 감귤이 탐스러워서, 한참 바라봤다. 문득, 옥구슬 씨와 대화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제주에서 감귤 따기 체험하고 싶어요. 정해진 금액을 지불하면, 감귤 무제한으로 따서 가져갈 수 있다는데!"

"아니, 돈을 받고 감귤을 따야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슈히 씨 체험할 나이 아니에요. 그런 건 애기들이나 하는 거죠!"

"네? 아이고, 웃겨! 그런 생각은 못해봤네요. 아, 그러고 보니 돈 열심히 벌어야 하는군요? 아니, 근데 감귤 따기 체험은 젊은 연인들도 하던데......"

버스 정류장에서 50대로 보이는 부부와 잠시 대화했다.

"제주 토박이세요?"

남자 친구가 남편에게 물었다.

"성남 살다, 제주 내려왔어요."

머리칼이 희끗희끗한 남자가 대답했다.

"은퇴하셨군요."

남자 친구의 말에, 곁에 있던 아내가 한 마디 내뱉었다.

"은퇴한 나이로 보이나 봐, 당신."

부부의 발을 보니,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안 추우신가?'

다른 버스로 환승하기 위해서 정류장에 하차했는데, 남자 친구가 외쳤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 도착했어!"

"뭐? 그럼, 뛰어!"

순간,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적색으로 바뀌고 말았다. 아뿔싸! 전속력을 향해 질주하려 했으나, 갈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다급해진 나머지, 신호를 무시하고 냅다 달렸다. 두 팔을 들어 운전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몸짓을 했다. 당황한 남자 친구는 되돌아가려고 했으나, 함께 뛰었다. 다행히, 경적을 울리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출발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가까스로 건너편에 무사히 도착했다. 다행히 차에 치이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버스 정류장은 저기야!"

남자 친구가 소리쳤다. 더 달려야만 했다. 승객들이 승차하느라 버스가 잠시 멈춘 덕분에, 우리도 승차할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헉헉......"

가뿐 숨을 몰아쉬며 버스 기사에게 인사했다. 그는 젊은 남자였는데, 오만상을 찌푸리며 화를 냈다.

"겨우 15분 배차 간격인 버스 타려고, 신호를 위반하면 어떻게 해요?"

"죄송합니다......"

표선에 도착해 숙소에 닿았다. 우리보다 먼저 짐이 도착해 있었다. 입실 후 짐을 놓고, 외출했다. 괸당집이라는 상호가 보였다.

"괸당이 뭔지 알아?"

남자 친구에게 질문했다. 그는 모른다고 답했다. 아는 단어가 보여서, 반가웠다.

"예전에 제주에서 근무할 때 익힌 단어야. '혈연'이라는 뜻이야. 제주에서는 야당, 여당보다 강력한 게 바로 괸당이래."

흑돼지로 만든 돈가스를 맛있게 먹었다. 여자 한 명이 어린 자녀들을 넷이나 거느리고 앞 좌석에 앉았다.

"조카들 아니야?"

"다들 엄마라고 부르는데?"

내가 묻자, 남자 친구가 되물었다.

건너편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후식을 먹고, 내일 아침에 먹을 식량도 넉넉히 구매했다. 편의점 사장에게 올레길 걸어본 적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기 갇혀 있어서, 못 나가요."

안타까웠다. 제주도에서 살면서, 올레길조차 걷지 못하다니!

일정이 틀어져 속상했지만,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여행 첫날이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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