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경주 여행(1)

경북천년숲정원

by 슈히

원래 계획은 포항에서 등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폭우로 인해 모임 일정이 취소됐다. 산행이 취소되기 전에 숙소를 예약했으므로, 취소하게 되면 다소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곤란했다. 계획이 망가져서 속상했고, 비 때문에 집에 갇히는 것도 끔찍했다. 그런데, 예약한 숙소는 포항이 아닌 경주였다. 그 이유는 경북천년숲정원이 경주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금요일 오후, 점심을 거른 채 승용차에 올랐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수목원 폐관 시간이 17시이므로, 늦어도 16시까진 입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조급해서, 쉬지 않고 약 200km를 꼬박 달렸다. 허기를 인내하며 목적지에 도착하니,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졌다. 준비한 도시락을 열어 부리나케 요기하고, 우산을 펼쳤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행히 비는 곧 그쳤다.

입장하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 이동하던 중 발견한 안내판에서 경북천년숲정원이 경상북도에서 관리하는 제1호 지방장원이라는 정보를 접했다. 화장실에 들르지 않은 여행자는 알 수 없을 터였다.

'이런 중요한 안내판을 왜 후미진 곳에 이렇게 눈에 안 띄게 세워놨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금요일 늦은 오후, 수목원은 한산했다. 검은색 옷차림의 연인 한 쌍이 삼각대를 들고 촬영 중이었는데, 안경 쓴 마른 남자와 단발머리의 통통한 여자였다. 여자가 남자를 오빠라고 부르는 소리를 언뜻 들었다.

수변 정원으로 걸어가자, 연못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은 건 끝없이 펼쳐진 평야의 싱싱한 초목이었다. 채도 높은 녹색 식물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모습이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다. 그 모습이 마냥 보기 좋아서, 오래오래 바라보며 가슴에 담았다. 하늘은 먹구름이 짙게 드리웠으나, 서늘해서 활동하기 쾌적했다.

무궁화원으로 향하며, 노란 애키네시아 무더기를 발견했다. 꽃잎을 느러뜨린 모습이 마치 꼿꼿이 서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듯 보였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기생초도 드문드문 피어 있었다. 고개를 돌려 저만치 보랏빛 군락지가 일렁였다. 맥문동인가 예상하며 가까이 다가갔다.

보랏꽃은 난생처음 만난 식물이었고, 맥문동보다 키가 컸다. 멀리서 보면 꽃 한 송이가 크고 탐스러운데, 자세히 관찰하면 작은 꽃들이 여러 송이 모여 덩어리를 이루었다. 인적 없는 고요한 숲 속에서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맞닥뜨리자, 감격스러웠다. 반드시 인물 사진을 남기고 싶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근접한 거리에 나무가 몇 그루 있길래, 나뭇가지에 휴대전화를 올려놓고 타이머를 맞췄다. 처음엔 5초에 맞췄는데, 결과물을 보니 엉망이었다. 다음엔 10초로 설정하고 촬영했다. 어떻게 하면 만족스럽게 찍힐까 온갖 궁리했다. 혼자 촬영하려니, 힘겨웠다. 몇 번이나 뛰어다녔을까, 그럭저럭 괜찮은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이래서, 혼자 여행하면 안 돼. 사진사가 없으니 이 고생이잖아! 휴, 그나마 나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저 멀리 희멀건 물체가 보였다. 무궁화와 배롱나무꽃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가운데, 짐승 한 마리가 고요히 서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그 순간을 포착했다. 생물을 만나니, 반가웠다. 어차피 신기루처럼 사라질 걸 알기에, 숨을 죽이고 천천히 생명체에게 다가갔다.

목표물은 바로 가늘고 긴 부리와 구부러진 목을 가진 조류였다. 내가 다가가자, 흰 새는 내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는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고, 눈앞에서 아른거리며 고고한 자태를 뽐냈다. 그 모습이 우아하고도 여유 있어 보였다. 사슴이나 토끼에 비하면, 굉장히 침착한 모습이었다. 어쩌면, 고독을 즐기던 그를 내가 눈치 없게 방해한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넌, 왜 측면만 보여줘? 정면은 자신 없나? 아, 곁눈질밖에 못해서 그런가.'

새가 날아가 버릴까 봐, 애가 탔으나 새는 예상한 대로 눈앞에서 곧 사라졌다. 새가 날개를 힘껏 펼쳤다. 날아가는 뒷모습이라도 보고 싶어 힘껏 달려 좇았으나, 새는 온데간데 사라진 후였다.

'매정한 놈! 동무 좀 해주지, 그냥 가버리냐.'

30분 만에 출입구로 되돌아왔다. 규모가 작고, 볼거리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더 둘러볼 곳이 있나 기웃거렸다. 여자 2명이 나란히 걸어오길래, 말을 건넸다.

"그쪽으로 가면, 뭐 볼거리가 좀 있나요?"

"아뇨, 없어요. 꽃은 없고, 나무들만 있어요. 지금 시기엔 볼 게 그다지 없어요. 여긴 가을에 오면 예쁜 곳이거든요."

"아, 그래요? 가을에 어떤 식물 보러 오면 되나요?"

"단풍이 예뻐요. 사람들이 저기서 줄지어서 촬영하거든요."

"아, 그래요? 줄 서는 건 별로 안 반가운데...... 아, 보라색 꽃 이름 혹시 아세요? 이거요. 처음 보는 꽃이었어요. 예쁘던데!"

두 여자 중 젊은 쪽이 친절히 안내했다.

"이건 버들 마편초예요. 라벤더 일종이죠."

"오, 처음 듣는 이름이네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

잊을세라, 급히 기록했다. 관광객치고는 박식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관계자였다.

"혼자 여행 오셨어요? 인근에 통일전, 서출지도 가보세요. 특히 서출지는 지금 배롱나무꽃이 한창 예뻐요."

가깝다길래, 별 기대 없이 통일전을 방문했다. 관람 후 감상은 그야말로 기대 이상인 곳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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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8_버들 마편초.jpg 버들 마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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