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혼자 제주도 여행을 갔다. 원래 애인과 둘이서 가기로 약속한 여행이었지만, 이별했기에 함께 갈 이유가 없었다. 산악회장 언니에게 여행을 제안했으나, 그녀는 한라산을 가고 싶어 하며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괜찮다고 대답했으나, 그 일정에 전 남자 친구가 합류했다.
기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고, 탑승 시간 전까지 소설을 읽으며 대기 시간을 보냈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허기를 느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전 남자 친구였다.
"여보세요?"
"나 어딨는지 찾아봐."
"어딘데?"
당황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봤으나, 눈에 띄는 인물은 없었다.
"모르겠어. 어디야?"
"난 누나 보이는데."
"......"
그는 창가 구석에서 쪼그리고 앉은 채 손을 들었다. 못 보던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분홍색이었다. 예쁜 색이었으나, 찜찜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장 언니가 사용하던 모자를 전 남자 친구에게 준 모양이었다. 새 상품을 선물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여자의 체취가 풍기는 물건이었다. 신경이 거슬렸지만, 이제 전 여자 친구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고, 우리는 좌석에 나란히 앉아서 대화했다. 전 남자 친구에게 음식을 권했다.
"난 19시 출발이야. 넌, 몇 시 비행기야?"
"난 한참 뒤."
"왜 벌써 왔어?"
"오늘 퇴근을 일찍 해서, 집에서 자다 나왔어."
'그래서 신수가 훤하군.'
"이발했구나. 깔끔하네. 공항에 뭐 타고 왔어?"
"주행해서 왔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 왜 벌써 왔어?"
그런데, 나를 보는 전 남자 친구의 눈빛이 유독 빛났다. 그건 바로 연애 초반에나 볼 수 있는 열정과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이었다.
'스스로 원하면, 얼마든지 이런 눈빛을 연기할 수 있는 능력자인가? 원래 이런 눈빛을 아무한테나 남발하나? 이제 나 말고 다른 여자 만나고 싶어 하면서, 왜 이러는 걸까?'
의문을 가득 품은 채, 웃으며 그와 작별 인사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에게 그날 태도와 표정에 대해 물었다. 그는 오랜만이라서 단순히 반가워서 눈이 빛난 거라고 대답했다. 아무리 오랜만에 재회해도, 반갑지 않은 상대가 더 많은 나로선 공감할 수 없는 자세였다.
일몰을 보며 비행했고, 제주 공항에 도착하니 깜깜한 밤이었다. 렌터카 회사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셔틀버스를 못 찾아서 한참 헤맸다. 다행히, 버스를 놓치진 않아서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다른 문제가 터졌다.
예약한 렌터카는 모닝인데, 주차장에는 투싼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경차가 주차하기도 편하고 경제적이라서 선택했는데, 어째서 사용자의 동의 없이 준중형으로 승격됐나 의아했다. 혹시 지정석이 아닌 엉뚱한 곳에 주차했나 싶어서 주차장을 빙 둘러봤으나, 그 어디에도 예약 차량은 없었다.
'투싼이 더 좋은 차이긴 하지만, 이대로 주행해도 되는 거야? 으, 그랬다 괜히 문제 생길라!'
퇴근 시간 후라서 직원도 달랑 둘 뿐이었다. 나 말고도 다른 손님들이 있었기에, 직원들은 분주했다. 직원에게 문제를 말하자, 별안간 누군가 등장해 모닝을 한 대 가져다 놓았다.
'이미 퇴근한 게 아니었나?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음, 인근에 직원 기숙사가 있나?'
모닝의 계기판을 보니, 약 12만 km를 주행한 차였다.
'오래 탔군. 시작부터 영 순조롭지 못한데, 이번 여행을 과연 잘 마칠 수 있을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