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은 어디에나 있다

by 이찬란




7시에 눈을 떠서 10시가 다 되도록 침대 위에서 꾸물거렸다. 서둘러 일어날 이유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밤새 나의 체온으로 데워진 이불을 공기주머니처럼 목까지 덮고 어제 저녁의 짧은 산책을 되새김질했다.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길게 늘어선 가로수와 인도에 수북이 쌓여 바스락대는 낙엽들, 토요일 저녁답지 않게 고즈넉한 거리, 따뜻한 공기.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만나선지 유독 많은 말이 오고 갔던 독서 모임을 마치고 배부르게 식사까지 한 뒤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일행 중 한 명이 길이 끝도 없이 아득하게 이어진 것 같다고 했고, 집에 가기 싫다고도 했다. 나는 낙엽이 잔뜩 쌓인 곳만 골라 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발밑에서 바삭바삭 마른 잎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가을이 몰라보게 깊어져 있었다.


사실 지난 주말에도 멋진 풍경을 보고 왔다. 낮에 일하고, 밤새 글 쓰고, 아침에 자는 생활을 한동안 이어간 끝에 겨우 출판사와 약속한 기한에 맞춰 원고를 보낸 바로 다음 날이었다. 곧 또 수정 원고에 매달려야 하겠지만 일단은 어디라도 뛰쳐나가 한숨 돌리고 싶었는데 고맙게도 무주로 여행 갈 기회가 생겼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기막힌 여행을 만들어준 마을상점생활관 너무 소중해!)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으로 몸만 달랑 얹혀간 여행에서 나는 그동안 책상 앞에 묶여있던 시간의 보상이라도 받는 듯 쉴 틈 없이 보고, 듣고, 움직이고 먹었다. 하마터면 놓칠 뻔한 가을을 실컷 누리며 너무 예쁘다, 행복하다, 를 연발했다. 그러고 돌아와선 독서 모임에서 이야기할 책을 읽느라 한 주를 빠르게 보냈다.


무주의 가을은 활기차고 풍성했고, 어제의 가을은 고요하고 아늑했다. 올가을은 이걸로 끝이려나. 여전히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생각했다. 에이, 좀 아쉬운데……. 팔을 쑥 뽑아 휴대폰을 찾았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비 예보가 있던 날씨가 맑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가볼까? 어제 나갔다 왔으니까 오늘은 청소하고 집에 있을까? 아니야, 나갈 수 있을 때 나가자, 이번 주 지나면 추워지고 낙엽도 다 떨어져 버릴 거야, 청소는 평일에 하면 되지. 그러곤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천으로 이사 온 지 벌써 9개월짼데 혼자 근방을 돌아다닌 게 몇 번 안 되는 것 같았다. 나간 김에 여기저기 걸어볼 생각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모자에 에코백을 덜렁 들고 나섰다. 아! 그런데 웬걸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무시무시한 모래바람이...순간 몇 초간 도로 들어갈까 싶었지만 오늘이 아니면 안되겠다 싶어 도서관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처음 가본 이천시립도서관은 언덕 끝에 있었는데 생각보다 오르는 길이 예뻤고 책도 제법 많았다. 오늘은 그냥 둘러보기만 하고 근처 공원까지 산책할 생각이었는데 마침 눈에 띄는 책이 있어 결국 한 권을 대출했다. 공원까지는 걸어서 이십여 분, 제법 큰 공원이라 사람들로 붐볐다. 중앙의 큰 호수를 따라 걷는 동안 사진 찍는 사람들을 피하느라 자주 멈췄다. 연인, 노부부, 아이와 부모, 친구들...저마다 가을을 처음 본 듯 달뜬표정이었다. 그들을 조심히 지나쳐 책 읽을만한 벤치를 찾아 앉았다. 호수에 반사된 햇빛을 받으며 무주 여행에서 선물 받은 책을 읽었다. 생각보다 주변이 왁자하고 바람이 세서 오래 읽지는 못했다. 공원 입구에서 산 커피를 마시는 동안만 책을 읽다 터덜터덜 밖으로 나왔다. 그래도 지도를 찾아가며 낯선 길을 헤매서 그런지 집에 돌아올 때쯤엔 다 저녁이 되어 있었고 급격히 허기가 몰려왔다.


뭔가 얼큰하고 공격적인 저녁 식사를 하고 싶어진 나는 참치캔과 두부, 소주 한 병을 샀다. 그러면서 소주를 사다니! 뭔가 터프해, 멋있어! 하며 혼자만 알 수 있게 고독한 표정을 몰래 지어보았다. 냉장고에 남아있는 묵은 김치에 참치와 두부, 라면스프를 넣고 최대한 자극적인 김치찌개를 끓였다. 이런 날엔 소주에 김치찌개지 하며 제법 호쾌하게 상을 차렸으나 역시 소주는 썼고 하필 넷플릭스에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추천 영화로 떴다. 뭐야, 하면서도 나는 젊디젊은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이 운명 같은 사랑 어쩌고 하는 대사를 어느새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시작은 터프한 고독녀였으나 김치찌개와 소주는 밀쳐 놓고 뜬금없이 사과를 깎아 먹으며,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밸런타인데이 하트가 떠오르는 장면을 보며, 가을이네, 가을이야 하면서...

그래, 올가을은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다. 여행지에도 거리에도, 내 식탁과 영화에도 가을엔 어디에나 가을이 있게 마련이었다.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5화이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