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너무 무리한 도보를 한 바람에 둘째 날은 자고 일어나서도 몸이 무거웠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일정 확인 차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에서 받아온 지도를 펼쳤다. 예정했던 장소는 총 여덟 곳이었으나 전날의 행보로 미루어 다 가볼 수 없을 것도 같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광천동 성당과 시민아파트는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예정된 사적지 대부분이 지하철역 인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바람에 결국 광천동은 가볼 수 없었다. YWCA로 옮겨오기 전 항쟁 초반에 광천동은 들불야학의 근거지로 박기순, 윤상원 등 열사들이 투사회보를 만들던 곳이다.)
첫 사적지는 숙소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광주공원이었다. 밤에는 공원을 둘러싸고 포장마차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아침에 가보니 흔적도 없이 깨끗이 치워지고 없었다. 5.18당시 시민군들이 모여 전열의 가다듬고 총술 훈련을 했던 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는 ‘김군 비’가 있다.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계엄군의 총칼에 목숨을 빼앗겨야했던 당시 광주시민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비라고 생각되었다. 지금도 망월동에는 이름을 찾지 못한 시신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광주천을 따라 삼십여 분을 걸어 양동시장에 도착했다. 고립된 광주에서 시민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던 때, 상인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나르고 음료수, 떡은 물론 약까지 흔쾌히 내놓으며 하나 됨을 실천했던 장소이다. 생각보다 꽤 넓은 시장을 한 바퀴 빙 돌아 커다란 주먹밥 조형물에 이르는 동안 모두가 너나할 것 없이 하나로 뭉쳐 잔혹한 폭력에 대항하던 그날의 뜨거움을 떠올려 보려 애쓸 수록 막막함이 앞섰다.
양동시장을 지나 농성광장 격전지까지 또 다시 걷다보니 다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가는 길에 역시나 길을 헤맸는데 도착하고 보니 사적지가 지하철 농성역 1번 출구 바로 앞이었다. 금남로에서 지하철을 타고 각각 양동시장역과 농성역에 내려 사적지를 둘러보았다면 훨씬 편안하고 시간 절약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그러지 않기를 잘했다 싶었다. 이번 여정만큼은 차라리 몸이 고된 것이 마음 편하겠다는 알량한 자기위안 때문이었다.
나는 광주천과 양동시장, 농성광장 격전지를 따라 걷는 동안 되도록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귀를 세운 채 두리번거리며 어딘가 남아있을 것 같은 오래 전의 함성과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 매캐한 연기냄새를 찾아보려 애썼다. 그 길목 어딘가에서는 열일곱 명의 재야인사들이 시내에 남아있는 청년들을 지키기 위해 손을 맞잡고 그림자처럼 나를 지나치는 것 같았다.
국군광주 병원
505보안부대 안의 건물
국군병원 입구의 성당과 성모상
시 외곽 쪽으로 접근할수록 음습한 죽음의 그림자가 짙어지는 느낌이었는데, 505보안 부대와 국군병원, 상무대 같은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인적이 거의 없이 황폐하게 남겨진 장소들은 흉가처럼 무척 으스스했다. 특히 국군병원은 찾아가는 길도 쉽지 않은데다 나무와 수풀 사이 군부대 건물과 병원 건물이 유리와 문짝이 떨어져나간 채 서있어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공포감이 밀려왔다. 이 건물 곳곳에서 계엄군 사령부는 학살 계획을 짜고 시민들을 끌고 와 고문했을 것이었다.
당시 끌려온 시민들이 재판을 받고 영창에서 고문당하던 모습을 5.18자유공원에 재현해 놓았다고 해서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를 헤치고 찾아갔지만, 보수공사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의 방문에 실패하고 나는 결국 추워진 날씨와 지친 몸을 핑계로 이틀간의 오월길 답사를 끝냈다. 첫날에 비해 맥 빠지는 마무리였다. 덕분에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광주에 와야 할 이유가 남게 되었다.
칠십년 대 후반에 태어나 상도동 토박이로 살았기에 나에게도 민주화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이 남아있다. 초등학교 시절 하교하는 길에 근처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도로를 행진하던 모습과 바닥에 흩뿌려진 유인물 속 물에 퉁퉁 분 채로 눈을 감고 있는 학생의 사진(이제 생각해보니 그는 박종철 열사였던 것 같다)같은 것 이 그것이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하면 거리의 상인들은 급히 셔터를 내렸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나는 태연히 그 광경을 구경해가며 집으로 걸어가곤 했다. 그 후로도 티브이에서 수시로 데모 장면을 보았지만 꽤 오랫동안 그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 지 의미를 알지 못한 채 지내왔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대학 시절에는 내 미래에 대해 고민하느라 결혼하고 나서는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느라 주변을 둘러 볼 여유가 없었다. 그건 어쩌면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거나 모르고자 했기 때문에, 혹은 알 필요가 없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수시로 부끄러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자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가정으로부터 독립해 살게 되면서 비로소 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와 실핏줄처럼 얽혀있는 세계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내 힘으로 열심히 일구어왔다고 생각했던 세계는 사실 누군가의 핏줄을 타고 흘러 들어온 양분 덕에 유지되었던 것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과 아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답사를 마치고나니 아는 것과 공감하는 것 사이의 간극도 보인다. 생각에서 아는 것, 공감하는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도 부러 애쓰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연결이 유예된다. 생명체를 살아있도록 하는 기본 조건이 연결과 순환이라면 나 역시 그에대한 책임을 비켜갈 수 없다.
나를 위해서 또 나와 연결되어 있을 수많은 이들이 민주주의의 양분을 나눠 먹고 자유롭게 호흡하며 살 수 있도록 애쓰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