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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Dec 25. 2021

광주 오월길 답사기

- ⓵ 걷는 길

광주역과 광장


용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오전 10시쯤 송정역을 거쳐 광주역에 도착했다. 몇 년간 벼르기만 하다 드디어 온 광주는 주말임에도 무척 고요했다. 이곳에 오기 몇 주 전 망월동 묘지를 먼저 다녀왔는데 그때문인지 아니면 자료조사를 하는 동안 읽고 보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내에서 광주역으로 부챗살처럼 연결된 다섯 갈래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1980년 5월 20일 밤, 별다른 무기가 없던 시민들이 광주역을 탈환하기 위해 휘발유통 실은 차량에 불을 붙여 돌진했던 통로이다. 나는 작은 각오를 하는 사람처럼 역의 현판과 시내 쪽을 바라본 후 전남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계획한 곳을 모두 돌아보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할 것이었다.      

일정은 1박 2일 첫날에 광주역에서 시작해 금남로 일대 시내의 사적지를 돌아보고, 둘째 날 지하철 노선도를 따라 시 외곽 쪽 5.18자유공원까지 다녀오는 루트였다. 각각 오월길의 횃불코스, 광장코스를 참고하였다.

( 링크참조 http://518road.518.org/)

생각보다 5.18이나 광주의 지리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료를 조사하고 지도를 따라 일정을 짜는 데 꽤 많은 공을 들였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관련 영상과 문서를 찾아보며 열흘간의 항쟁을 날짜와 시간, 장소별로 공부하듯 요약하다보니 저절로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여 잠시 숨을 고르기도 했다.  

   

전남대 전경과  금남로 주변 지하도 입구

광주역에서 항쟁의 시작점인 전남대까지는 도보로 20분 정도 걸렸다. 벌써 40년이 지나 거리의 모습은 많이 변했을 테지만 계엄군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한 학생들이 맨발로 도망치던 길이라는 생각에 곳곳이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전남대 안에는 5.18을 기리기 위한 민주길(총 세 코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만 시간상 둘러보지 못하고 다시 광주역, 시외버스 공용 터미널 옛터로 걸었다. 지도 어플을 켜놓았어도 워낙 초행길이라 많이 헤맸다.


광주역에서 터미널로 오는 길에 5.18최초 발포지인 광주고 앞과 대인시장을 들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점심 먹으며 지도를 확인하다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소방서 옆길을 따라 도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왔다.

많이 걸을 것을 예상해 바닥이 튼튼한 워커를 장만했는데 길들이지 않은 새것이라 발목부근의 살이 딱딱한 신발에 쓸려 상처가 났다. 오래 걸을 때는 여러 번 신어 내 발에 잘 맞춰진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는 걸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급한 마음에 너무 빠르게 걸어 이틀 내내 발이 몹시 괴로웠다.    

 

5.18민주화 기록관의 전시물(가운데-아낙들이 주먹밥을 담아 시민군에게 나누어줄 때 사용했던 양은그릇)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은 이전의 가톨릭센터로 YWCA, YMCA 와 더불어 항쟁의 거점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곳에서 운 좋게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의 현장을 기록한 사진과 빨간 줄로 도배된 신문기사, 취재수첩, 일기장, 5.18이후의 기록들까지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했지만 모든 것을 다 기억에 담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5.18 1년 후 학생들이 당시에 대해 남긴 기록이다. 하나는 무고하게 희생당한 시민들의 입장에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은 집에만 있어서 아무 것도 모르며5.18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글이었다. 정말로 몰랐을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는 어쩐지 학생의 안위를 걱정한 부모님의 당부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없는 일로 할 뿐 아니라 보고 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해야만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시대였기에 학생의 글이 이기적이라기보다 안쓰럽고 마음 아팠다. 글의 말미에 ‘다시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겨우 흘려 쓴 글씨가 어쩐지 겁에 질려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6층 4전시실은 5.18기록관이 들어서기 전 가톨릭센터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윤공희 대주교의 집무실이 있다. 당시 주교는 집무실의 창 밖 거리에 피 흘리는 청년을 보고도 두려워 내려가지 못했다고 한다. ‘진실의 눈’이라 이름 붙여진 창을 통해 나도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나라면 뛰어 내려갔을까? 라는 질문은 차마 하지 못했다.     

윤공희 대주교의 집무실과 창밖으로 보이는 금남로

한 시간 반 정도 5.18기록관을 둘러 본 후 금남로 일대의 사적지 여덟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故홍남순 변호사 가옥 ▷ 광주MBC옛터 ▷ 녹두서점 옛터 ▷ 광주YWCA옛터 ▷ 광주YMCA ▷ 5.18민주광장 ▷ 상무관 ▷ 전남도청)

YWCA옛터                    녹두서점 옛터                           광주MBC옛터

홍남순 변호사 가옥과 상무관, 전남도청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표지석 만으로 겨우 알아볼 정도로 남아있는 게 없었다. 길찾기 앱을 켜고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니면서 그냥 지나쳤다가 되돌아오길 여러 번 되풀이하는 동안 그 점이 아쉬웠다. 거리 전체가 사적지라 할 정도로 많은 희생이 있었기에 모든 장소를 보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사적지로 지정된 곳을 찾기 쉽도록 안내판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 앱에 사적지 이름을 그대로 치면 정보를 찾을 수 없다는 안내가 떴고, 내가 가진 안내 책자에 사적지 주소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누군가 블로그에 올린 위치정보를 일일이 확인해가며 찾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이왕이면 오월길 전용 네비게이션 어플이 있으면 좋겠지만 워낙 디지털 무식자라 그런 게 가능한 지 모르겠다.    

  

전일빌딩 내부와 옥상에서 내려다 본 도청,민주광장

일정의 마지막은 전일빌딩이었다. 원래 계획은 전일빌딩 옥상에서 도청과 금남로를 내려다보며 민주광장 시계탑에서 오후 5시 18분이면 울리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듣는 것이었는데 그날따라 연말 페스티벌을 하느라 무대를 설치하고 내내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제대로 듣지 못했다. 광주에 의미가 큰 그 순간만이라도 행사를 잠시 멈춰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즐거워하는 그들이 야속했다.

전일빌딩은 전남매일신문사 빌딩을 줄인 말로 5.18당시 헬기 사격을 당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또, YWCA건물과 바로 맞붙어 있기도한데, 때문에 당시 편집국이 있던 3층에서는 5월 27일 새벽, 전일빌딩 속 계엄군과 건너편 YWCA시민군의 치열한 교전이 벌어져 탄흔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당시 교전상황을 재현해 놓은 모형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 오래 바라보기 힘들었다.

돌아보는 곳곳에서 매번 비명과 죽음, 공포를 떠올려야 한다니...

5.18의 진실이 숨겨져있는 문(전일빌딩)과   숙소에서 내려다 본 광주천, 광주공원

무리한 도보로 지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숙소로 가는 길에 마음이 한없이 착잡해졌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감정이 쌓였을지 모르지만  깊이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일단 그대로 두었다. 그저 옛 장소를 돌아본 것만으로도 온 몸이 다 아프고 괴롭다는 사실을 절감하며 이전에 읽었던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의 한부분을 떠올렸다. 주인공이 제대로 볼수록 고통스러운 사진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날은 작가가 말한 ‘제대로 본다’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고통을 견뎌야 하는 과정인지 내가 아직 가늠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겨우 미쳐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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