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있는 특정집단 혹은 전문가들의 영역이라고 여겨진다. 최근 들어 그 문턱이 낮아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다가가기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인들에게 예술이란 친해지고 싶지만 낯설고 어려운 친구 같다. 낯선데 어렵기까지 한 친구에게 다가가기가 어디 쉬운가.
은평구 신사동의 스페이스55라면 조금 다를 것도 같다. 은평구는 골목골목 오래된 집과 빌라가 많은 주택가이다. 스페이스55 역시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전시 공간으로 낡은 빌라들 사이 좁은 골목에 있었다. 지하철 6호선 새절역에서 그리 멀지 않지만 입구가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데다 주변건물과 구분이 안 돼 자칫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사실 한번 지나쳤다가 돌아오긴 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런 아치형 입구 너머로 기하학적 모양의 철제 전시물이 보인다. 조금 떨어져 보면 고개를 갸우뚱한 얼굴 같기도 해서 마주 선 이의 고개도 살짝 기울어지는 것이 재미있다. 스페이스55의 전시 공간은 두 곳으로 반지하의 Factory gallery와 지상의 Window gallery가 있다. Factory gallery는 이전에 작가의 아버지가 봉제공장을 운영하던 공간이다. 층고가 낮고 빛이 적게 들어오는데다 벽면의 시멘트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다소 어둡고 거친 느낌을 준다. 이러한 공간의 특성상 영상 전시가 잘 어울려 2018년 토탈미술관과 함께 <현실비경>이라는 미디어 전시를 열었다고 한다.
반면 흰색의 전시 면과 넓은 창이 있는 Window gallery는 깨끗하고 현대적이다. 지상에서 몇 계단 올라간 곳이 작가와 가족들이 살았던 공간이다. 지금은 작가의 스튜디오로 사용하고 있다.
Factory gallery 입구
미싱이 그대로 올려진 작업대 한쪽에 전시 안내 엽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가깝고도 먼’이라는 주제로 이채은x제니스정 작가의 이인전이 열리는 중이었다. 두 작가는 세계적으로 번진 전염병 때문에 서로가 물리적으로 멀어지기도 하고, 펜대믹이라는 공공의 문제로 하나가 되기도 한 이 시대에 전시가 위로와 공감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작업했다고 한다. 한참 둘러보다 뒤늦게 전시장 한복판에 기둥처럼 세워진 작품을 발견했다. 디귿자 형 구조물 겉에는 스산한 묘지 풍경이 그려져 있고, 안쪽은 온통 금빛이었다. 그 안에 살짝 몸을 밀어 넣어 보니 마치 세워진 관 안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우리와 동시대의 고통을 겪는 이로 가깝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이토록 참신하고 따뜻한 전시라니, 누구든 와서 함께하면 좋을 것 같았다.
지상으로 나오면 벤치와 흔들의자, 테이블이 놓인 아담한 휴식공간을 사이에 두고 Window gallery가 있다. Factory gallery에 비하면 훨씬 좁지만 위아래로 높게 트인 두면의 벽이 있어 규모 있는 작품을 전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였다.
스페이스55는 입구부터 전시장까지 모든 문이 활짝 열려있다.
덕분에 마음 편히 들어가 전시를 관람할 수 있었다. 이는 예술로 은평구 주민들과 자유롭게 소통하고자하는 안종현 작가의 배려일 것이다. 그는 사진매체를 중심으로 작업하는 작가이자 전시 기획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자유로운 소통이야말로 그가 하는 활동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스페이스55의 ‘55’가 아들의 옹알이에서 착안한 소리로, 이곳을 어떠한 뜻이나 정체성이 분명한 단어로 밀고나가지 않고 작가들과 만남을 통해 계속 더해지고 새로워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 말했다. 작가 생활의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일까, 그는 특히 전시가 처음인 젊은 작가들의 전시 기획을 돕거나 아트마켓을 통해 그들의 작업을 주민들에게 선보이기도 한다. 그의 스튜디오에 마련해 놓은 아트마켓은 상설전시 형태로 언제든 관람이 가능하고 구매도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이따금 관람객과 작가가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는데 요즘 같은 시기에는 그런 이벤트가 불가능해 아쉽다. 대신 온라인 팟빵을 통해 스페이스55의 전시 작가와 만나는 작업이야기, 화가 홍학순과 함께하는 미술창작토크를 몇 회 올려두어 청취가 가능하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미덕인 시기인 만큼 토요일에도 전시장을 찾는 사람이 적었다. 덕분에 차분하고 느긋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지만, 열심히 작업한 결과물을 보여줄 기회를 놓친 작가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서로가 서로를 멀리해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누적된 고독과 피로감이 사회 곳곳에서 실질적인 문제로 터져 나오고 있다. 이런 때, 예술이야말로 말하지 않고 포옹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최고의 친구가 될 것이다. 스페이스55에는 그런 친구가 살고 있다.
*이 글은 2020년 은평문화재단 《지역문화네트워크 프로젝트》 '우리동네 숨은 명소 발굴하기'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