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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이름은 살롱 도스또옙스끼

- 살롱 도스또옙스끼

by 이찬란
20~30년 전


그러니까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을 때까지만 해도 책은 사람들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거의 독보적인 매체였다. 동네마다 알토란같은 작은 서점이 한두 군데씩 꼭 있었고 조금 더 시내로 나가면 약속장소로 정하기 좋은 큰 서점들도 많았다. 이따금 필요한 책을 구하지 못하면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돌며 보물찾기하듯 책더미를 뒤지기도 했다. 그런 기억들은 어느덧 까마득한 옛일이 되고 사람들은 이제 궁금한 것이 있으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한다. 하나의 검색어에 수천 개의 글과 그림, 동영상이 주루룩 딸려올 뿐 아니라 영리하게도 궁금해할만한 연관 정보까지 미리 알려주니 참 편리한 세상이다. 이런 시대에 동네 헌책방을 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 5월 은평구 신사동에 헌책방을 연 김도언 대표는 ‘옛것에서 지혜를 구할 수 있고 아름다움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시와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무려 12종의 단행본을 출간한 작가이자 편집자, 웅진문학 임프린트 대표까지 지낸 이답지 않게 순연(純然)하고 낭만적이다. 헌책방 이름은 ‘살롱 도스또옙스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하지만 정작 책방 안에 도스또옙스끼의 책은 얼마 없다. 누군가 그 이유를 따져 묻는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게 내가 그의 소설을 통해 배운 것이라고. 요컨대 치명적인 모범이나 짐작되는 상식을 배반하는 것이 도스또옙스끼의 가르침이라고.’



새절역 4번 출구로 나와 큰길 따라 조금 걸으면


상가건물 벽면에 명랑한 글씨체의 간판이 눈에 띈다. 계단 입구에 세워놓은 노란색 접이식 입간판에는 살롱 도스또옙스끼와 대표에 대한 소개가 빼곡하다. ‘사소하고 이상하고 재미있는 곳, 헌책방+빈티지샵+아트샵+프리마켓+갤러리, 언제든 구경하러 올라오세요. 글쓰기/입시 백일장/ 대입논술지도…….’ 간판에서부터 느껴지는 에너지와 열의는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더욱 확연해진다. 쾌활한 목소리로 방문객을 맞는 목소리와 잘 정돈된 책들, 독특한 소품, 세련된 색감의 그림들까지. 한꺼번에 소화하기 힘들 정도로 다채로워 설레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켜가며 한쪽 구석에서부터 차근차근 둘러본다.

입구 양옆의 벽은 헌책으로 꽉 채운 책장이다. 아직까지는 대표가 소장하고 있던 책이 대부분이며 가까운 지인에게 증여받은 것이 일부 섞여있다고 한다. 문학계에 몸담으며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모아온 책들이니 그 안에 담긴 추억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어쩐지 펼쳐든 책 한권의 무게가 남다르게 다가와 차분히 책장을 넘겨가며 마음 가는 것을 몇 권 골랐다.


실내 중앙에는 크고 작은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있는데 그중 몇은 신간 코너였다. 손글씨로‘문학의 명가 열림원 신간’, ‘인문서의 명가 삼인출판사 신간’ 이라고 적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특히 삼인출판사는 김도언 대표가 근무했던 곳이라 위탁판매 상설매장으로 계속 운영할 생각이라고 한다. 제목만 언뜻 봐도 흥미로운 책이 많은 것은 좋은 책을 찾아내는 그의 믿을만한 안목 때문이리라. 실제로 그가 페이스북을 통해 큐레이션하고 있는 책들은 하나같이 읽어볼만한 양서이며 그중에는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들도 꽤 된다. 나에게 맞는 책을 고르기 어렵거나 구매할 책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매장에 방문하기 전 그의 페이스북을 먼저 들러 보는 것도 좋겠다.

책과 함께 다양한 소품들이 진열된 테이블도 재미있다. 도자기 접시 옆에 푸우 인형, 철제 마스크와 액자 식으로 배치가 자유로운 덕에 어지간한 벼룩시장 나들이 못지않은 기분이다. 소품들을 한참 구경하다 출입문 바로 옆에 있어 무심코 지나친 진열장에 새삼 눈길이 갔다. 쪼르르 달려가 소니엔젤과 바비인형, 유리잔 컬렉션을 한참 들여다봤다.


책과 소품만으로도 풍성한 이곳을 다 둘러봤나 싶은 순간 또 하나의 보석같은 공간을 발견했다. 지금은 갤러리로 사용 중이라는 이곳은 흰색의 한쪽 벽면에 현재 서현종 작가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가 끝난 벽면은 스크린으로 삼아 정기적인 영화나 뮤직비디오 감상회를 열 계획이라고 하니 벌써부터 무척 기다려진다. 살롱 도스또옙스끼의 대표 역시 그림을 그린다. 그가 파란 배경에 그려 넣은 기린을 보니 눈도 시원하고 마음도 시원해진다. 한 점 사서 책상 앞에 세워두고 머리 아플 때마다 바라보면 좋을 것 같다. 구경하느라 무거워진 다리를 쉬일 겸 그림 감상도 할 겸 테이블 앞에 앉았다.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공간이 참 아늑하고 편안했다. 그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람들과 모여 영화보고 음악도 들으며 책도 읽을 것이다. 나도 그 틈에 한자리 차지하고 앉는 즐거운 상상을 잠깐 해 본다.


헌책방을 구석구석 살펴볼수록 입구에 세워둔 입간판에 김도언 대표가 빼곡히 적어놓은 것이 단순한 홍보용 글이 아니었음이 실감되었다. 이제 누구도 먼지 냄새를 맡아가며 헌책을 뒤질 필요가 없어졌지만 이곳, 사소하고 이상하고 재미있는 살롱 도스또옙스끼를 방문할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부디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그가 잘 벼려놓은 문학과 예술의 기운을 흠뻑 들이켜는 대신 마음에 쌓인 시름을 먼지처럼 툴툴 털고 돌아가게 되길 기대한다.


*이 글은 2020년 은평문화재단 《지역문화네트워크 프로젝트》 '우리동네 숨은 명소 발굴하기'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https://www.efac.or.kr/mobile/sub06/sub09_1.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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