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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May 29. 2024

구의 일기장





구는 1949년 5월 24일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 첫째로 태어났다. 구의 아버지는 술과 노름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살림할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결혼하며 물려받은 논 몇 마지기를 금방 날려 먹고 남의 집 방 한 칸을 얻어 접방살이를 했다. 구는 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잔칫집에 가 배를 채우곤 하던 걸 어렴풋이 기억한다.   

  

짧으나마 구에게도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아마 여섯 살 무렵일 것이다. 아버지가 도벌로 돈을 많이 벌게 된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산에서 소나무를 베어다 쌓아놓으면 화주인 구의 아버지가 군용 트럭으로 싣고 나갔다. 그러면 하룻밤에 쌀 한 가마 정도 되는 돈을 너끈히 벌곤 했다. 아버지는 구를 트럭에 태워 다니며 “우리 아들 대학교까지 가르치겠다.”고 큰소리쳤다. 구는 영특했기 때문에 그깟 대학교 시험쯤 얼마든 통과할 자신이 있었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구의 아버지는 아들과의 약속을 쉽게 잊었다. 주머니 가득 돈이 차면 식구들 먹을 쌀만 조금 팔아주고 읍내 술집과 노름판을 돌았다. 쉽게 번 돈은 모래알처럼 쉽게 빠져나갔다. 그래도 금세 돈이 다시 채워졌으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나라에서 도벌을 강력하게 단속하지 않았더라면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벌이 사회 5대 악 중 하나로 규정되자 집은 몰락했다. 구의 나이 여덟 살 때였다. 저금해 놓은 돈도, 사 놓은 땅도 없어 아버지와 땔나무를 해다 부잣집에 팔고 화전을 일구었다. 개간한 밭에서 난 고구마와 곡식으로 아쉬우나마 식구들의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무렵 술과 노름의 맛을 잊지 못한 아버지가 다시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빚이 생겼다. 일구어 놓은 화전은 주인에게 뺏겼다. 구는 한겨울에도 나무를 해다 팔아 생활비를 마련했다. 속없는 어머니는 구가 주는 돈으로 읍내에 나가 군것질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동생들이 자꾸 태어났다.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결국 국민학교 2학년 1학기, 책값인 쌀 할 말을 내지 못해 구는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 후로 다시는 교문을 넘지 못했다.  


늘 배가 고팠다. 길에 떨어진 고구마 껍질을 주워 구워 먹었다. 이웃 작은집에서는 음식을 먹다가도 구의 가족이 보이면 감추고 문을 닫아 걸었다. 구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마을의 방죽 쌓는 현장에서 흙을 지어 날랐다. 칡넝쿨을 걷어다 저울에 달아 팔고, 땅에 묻힌 송진을 캐서 쌀과 바꾸었다. 여름에는 10킬로미터 거리를 왕복하며 아이스케키 장사를 했다. 케키값으로 병도 받고, 곡식도 받았다. 갈 때보다 더 무거워진 통을 어깨에 메고 컴컴한 산길을 넘어올 때는 힘들고 무서워 눈물이 났다.

“어린 네가 무슨 죄냐.”

오촌 할머니는 구를 만날 때마다 그렇게 말하며 밥도 주고 절구에 찧은 곡식도 한 되씩 주었다. 할머니는 수저를 주면 잘산다는 말을 들었다며 며느리 몰래 수저 한 벌을 사서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 그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노름빚은 자꾸 늘어갔고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구는 마음이 아팠다.

     

“내가 갚을게요!”    

 

일 년 치 품삯으로 쌀 두 가마니를 받고 구는 머슴이 되었다. 친구들이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새끼 꼬고, 새벽에 일어나 물을 길어 놓고 소죽 끓여 소에게 먹였다. 그러고 밥상 앞에 앉으면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에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구는 자기가 먹을 것을 숨겨 놓았다가 밤에 몰래 집에 가져다주었다. 일곱째 막내 동생이 태어나고 그새 도로 쌓인 빚 때문에 머슴살이를 더 하게 됐을 때 그는 생각했다.


 ‘사는 게 죽는 것 같다.’  

    

죽을 것 같지만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구의 마지막 돌파구는 서울행이었다. 1969년 4월 19일 새벽 영등포에 도착한 구는 곧바로 샷시 공장에 취직했다. 한 달 월급 6,000원. 명민한 구는 4개월 만에 선배들을 제치고 혼자 50원 월급 인상을 받았고, 하숙하는 여관에서 동료들 밥을 해주고 수고비를 받으며 돈을 모았다. 1년도 안 되어 7만 원을 모았고 6년이 되자 40만 원이 넘었다. 오래 눈독 들이던 해군병원 옆 60만 원짜리 초가집이 곧 손에 잡힐 듯하던 어느 날 고향에서 연락이 왔다.

“동생들과 살 집이 필요하다. 네가 사 다오.”

아버지의 그 한마디가 구의 시간을 와르르 허물었다.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처럼 구는 말끔히 비워졌다. 만약 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가난한 총각은 결혼도 못 하느냐.”며 덥석 딸을 내준 장모님이 없었더라면 그는 더 이상 파도에 맞서지 못했을지 모른다.    

 

구는 윤과 함께 여섯 명의 동생을 차례차례 서울로 불러올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출가시켰다. 아무리 갚아도 사라지지 않는 부모의 빚도 갚았다. 그러느라 정작 자신의 세 딸들에게는 필요한 걸 제때 주지 못했다. 사는 동안 내내 그게 미안했다. 자신의 배고팠던 어린 시절처럼 딸들 마음에 허기가 생길까 겁이 났다. 뒤늦게 태어난 아들을 보고 눈물이 난 건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새빨간 얼굴로 바락바락 우는 또 한 생명에 대한 걱정, 미안함, 책임감... 오래전 컴컴한 산길을 혼자 넘던 날처럼 구는 눈물을 훔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온전치 못 한 맞춤법으로 간간이 일기는 쓰는 것.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구는 문득 일기장을 떠올렸다. 일기는 십 년 전, 아들의 대학 입학식 일시를 적은 것을 끝으로 멈춰있었다. 한 장씩 펼쳐 휴대폰으로 사진 찍고 가족 단톡방에 전송 다.

알림음이 여러 번 울린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딸 하나가 멈춰 서서 휴대폰을 확인한다. 딸은 아빠의 글씨체가 낯설다. 낯선 글씨체로 적은 일기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하얗고 잘생긴 아빠의 얼굴을 떠올린다. 자상하고 유쾌한 웃음과 재주 많은 손, 손을 쫙 펼치면 손톱 하나가 뭉개진 손가락이 보이는. 왜 그렇게 됐는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잊고 말았다. 사진을 하나씩 읽어나가며 그 사이 언제쯤에 아빠가 손가락을 다쳤을까 생각하다 멈칫한다.

     

나는 고생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     


순간 목장갑을 낀 채 기계에 말려 들어가는 손이 보인다. 아프고, 무섭고, 뜨거워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렇지만 길게 울지 못한다. 출근 시간이 다 되어가기 때문이다. 얼른 눈물을 닦고 아빠에게 짧은 답장을 쓴다.

“아빠, 아빠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우리 네 여자한테 평생. 알지요?”

곧이어 다른 세 여자와 아빠를 꼭 닮은 아들에게서 쓰나미처럼 답신이 쏟아진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림음과 함께 출근하며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오래 걸리긴 했지만 구는 기어이 몰아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끌어안았다. 그의 일기는 회한이 아니라 자랑이었고, 이제야 자식들에게 훈장처럼 꺼내 보이고 싶었던 거라는 걸 말이다.


구는 이제 행복하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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