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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찬란 Jun 05. 2024

결정적인 친구




셋째가 이렇다 저렇다 설명 없이 장문의 메시지를 캡쳐해 보냈다. 엄마가 셋째에게 보낸 거였다. 내용인즉슨, 혼자 가게를 운영하는 게 힘든 줄은 알지만 남자친구가 와서 도와주는 건 좋지 않다. 어쩌다 한 번이면 몰라도 자주 함께 있다 보면 남녀 사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항상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차라리 가게를 접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이게 뭔 소린가 싶은 찰나 전화가 왔다.


“언니, 봤어?”

“응. 뭐야?”

“말도 마. 나 퇴근해서 가게 앞에 차 대놓고 이거를 읽었는데 너무 승질나서 지금 일어나질 못하겠어. 뒷목이 뻣뻣하고 어지러워서 쓰러질 거 같다니까.”

셋째의 목소리는 격앙될 대로 격앙되어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혼한 딸의 남자친구를 경계하는 엄마 마음이야 짐작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이제 막 시작한 가게를 접으라니.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굳이 말했어야 했나 싶었다.     


“내가, 먹고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남자 만나 뭘 하겠냐고. 자식한테 힘내라고 응원은 못 해 줄망정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언니, 이거는 정말 학대야 학대!!”

셋째는 모든 남녀의 마주침을 남녀상열지사로 연결시키는 엄마에 대해, 학업과 연애에 바빠 가게 일을 돕지 않는 두 자녀에 대해, 특히 낯선 아저씨 등장에 제 엄마 얼굴조차 안 보려는 아들에 대해 서운함과 억울함을 한참 쏟아 냈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이혼 직후 나의 상황이 떠올라 덩달아 마음이 상했다.


길고 긴 통화를 마치고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이미 엄마의 걱정을 한바탕 듣고 셋째와 친구, 두 조카까지 만나고 온 후였다. “나한테만 말하고 고만하라니까 엄마도 정말…….” 언니 역시 답답해하며 혀를 찼다. 언니가 보기에 친구는 서글서글하고 괜찮더라고, 염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격정의 전화를 받은 마당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주말에 셋째에게 한 번 다녀오기로 했다.   

  

망원시장과 한강이 코 앞에 있어서 그런지 가게는 제법 사람들로 붐볐다. 일곱 시가 넘어가자 홀 손님과 붕어빵 손님이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셋째의 손이 바빠지고 역시나 나는 슬슬 멘붕에 빠지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우르릉, 소리와 함께 가게 앞에 폼나는 오토바이 한 대가 섰다.

“여기 오면서 맨날 뭔 놈의 BMW야. 야! 빨리 들어와. 손님 밀렸어.” 못마땅한 표정의 셋째가 재촉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토바이 주인은 한량 같은 걸음으로 들어와 가게 안을 쓱 훑어보고 물도 한 잔 마신 뒤에야 붕어빵 기계 앞에 섰다. 간단히 인사 나누고 한숨 돌리고 나자 피식, 웃음이 났다. 친구는 오토바이와도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도 한참 동떨어진, 마치 시장에서 몇십 년 자리를 지킨 맛집 사장님같은 구수함과 능숙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셋째야, 저분 친구 맞아?”

“어, 쟤 나랑 동갑이야.”

그 말을 듣고도 영 믿기지가 않아 나는 장사를 마감할 때까지 내내 깍듯이 존대를 했다.

     

성황리에 장사를 마치고 자정이 가까워서야 셋째와 친구, 나는 새벽까지 하는 삼겹살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언니, 뭘 존댓말을 해. 얘 나랑 친구라니까.”

“그래도...”

“진짠데요. 저희 대학 동기예요. 사진 보여드릴까요?”

친구가 지갑을 뒤져 오래된 증명사진을 꺼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앳된 모습이었다. 셋째가 킬킬대며 그나마 관리한 얼굴이 이 정도라며 놀려댔다. 그러자 친구는 한술 더 떠 어디에 무슨 시술을 했는지까지 소상히 설명했다. 대학 이후 이십여 년만에 우연히 만났다는 데도 둘은 세월의 간격이 무색하리만큼 허물없어 보였다.


친구는 마침 그 동네 토박이였는데 셋째가 급할 때 한 번씩 도움을 청하다 이제는 아예 대놓고 부른다고 툴툴댔다. 셋째는 셋째대로 네가 그 나이 먹도록 부모님 밥 얻어먹을 수도 없고 혼자 피씨방 가서 게임이나 할 바에야 친구 일 거들고 집밥도 먹고 얼마냐 좋으냐며 반박했다.


“게임은 내 취미 생활이잖아. 밥이야 사 먹으면 되고.”

“그래서 안 나오겠다는 거야?”

“매일 나올 수는 없다는 거지. 가끔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그럴 거면 아예 나오지 마.”

능글능글 약 올리며 튕기는 친구에게 셋째가 강수를 뒀다. 나는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둘의 실랑이를 안주 삼아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생각을 해 봐봐. 장사는 매일 해야 되는데 니가 나왔다 안 나왔다하면 어떻게 되겠어? 장사가 되겠어?”

“나도 회사가 있고 일이 있으니까.”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매일 니가 오나 안 오나 마음 졸이면서 기다리게 되잖아. 애초에 도와주질 말던가. 사람을 기대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안 그래? 이왕 할 거 내 일이다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하면 얼마나 좋아!”

“내 일이 아닌데 어떻게 내 일이다 생각해.”

“야! 그러니까 내 일이다 생각을 하라는 거잖아. 그래서 도와 줄 거야 말 거야?”

“생각해 볼게.”

“됐어. 생각할 거면 때려쳐.”

“쓰읍~저번에 그 해장라면 팔면 대박 날 거 같긴 한데...”

“그니까 나와서 만들어 보라니까.”

그렇게 둘의 실랑이는 끝날 듯 말듯 내내 이어졌다. 그러는 와중에 1차는 셋째가 2차로 간 맥줏집은 친구가 계산하고 사이좋게 헤어졌다.   

  

며칠 후, 은근히 걱정이 되어 셋째에게 카톡을 보냈다.

- 친구 나왔어?

- 엉. 오늘부터 안 빠지고 출근하기로 해서 내가 상무 달아줬어. 박상무야 이제ㅋㅋㅋ.

구멍가게에도 위계가 있고, 직책이 생겨야 책임감이 따라온다는 설명이었다. 과연 셋째답다 싶으면서도 나는 때맞춰 홀연히 나타난 귀인 친구가 무척 고마웠다.


이따금 가족보다 친구가 더 요긴한 순간이 있다. 나 역시 독립하며 위기를 겪을 때마다 도움을 준 친구가 있었기에 잘 안다. 그런 친구는 나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 가족처럼 기대도 하지 않고 실망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무슨 이유에선지 결정적인 순간에 옆에 있어 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대본에 의해 미리 짜여진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그런 걸 인연이라고도 전생에 쌓은 덕이라고도 할 테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에 꼭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나 싶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그저 결정적인 순간에 친구가 되어준 이에게 감사하고, 그 감사함을 언젠가 두둑이 돌려주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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