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는 중학생이 되기 직전까지 나와 함께 잤다. 낮에는 제 방에서 문을 닫은 채 춤추고, 친구와 통화하고, 슬라임을 만들며 놀다가도 잠잘 시간만 되면 “딱 하루만!” 하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반은 졸며 반은 흐느끼며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딸과의 싸움에서 나는 거의 매일 밤 질 수밖에 없었다. 단호하게 쫓아 보내야지 마음을 다잡았다가도 이 아이가 예민한 건 뱃속에서부터 내 불안과 분노와 눈물을 고스란히 받아먹으며 자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면 무너지고 말았다.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는, 생의 위협을 가한 사람으로서의 죄책감이 울음 소리를 신호 삼아 내 안에서 너울너울 일어났다.
고민 끝에 4~5년간 열 번도 사용 못 한 어린이용 이층침대를 처분하고 어른스럽고 차분한, 사춘기 청소년에 걸맞은 침대와 책상, 화장대를 들여놓았다. 제 방의 변신에 기뻐하면서도 딸은 독립 수면을 두려워했다. 애써 감추었지만 나 역시 두려웠다. 이 방과 저 방 사이가 천 리 먼 길도 아닌데 까마득히 먼 곳으로 아이를 유배 보내는 심정이었다. 자는 동안 아이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그런데도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알아채지 못하면 어쩌나.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온갖 불길한 상상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이를 지키지 못한 부모가 되어 울고 있는 내가 보였다. 병이었다. 마음의 병.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불안을 극대화하는 습관과 평탄치 못했던 결혼생활, 우울감, 그럼에도 지키고 싶은 자존심, 지나친 방어본능이 똘똘 뭉쳐 만들어낸…….
다행히 딸과 나는 각자의 두려움을 잘 극복했다. 느리지만 안정적인 속도였다. 얼마간은 딸 침대에서 둘이 함께 잤고, 다음엔 딸이 잠들고 나서 내가 안방으로 옮겨왔다. 그러다 수면등을 켜 놓고 잘 자라고 인사 해주었다. 자는 동안은 서로의 방문을 활짝 열어두기로 했다. 우리끼리만 통하는 암호같은 인사도 만들었다.
딸이 내게
“안주(안녕히 주무세요) 재꿈(재미있는 꿈 꾸세요) 사랑(사랑해요).”
하고 말하면,
나는
“잘주(잘 자) 행꿈(행복한 꿈 꾸고) 사랑(사랑해).” 하고 대답했다.
종종 아이 아빠도 인사를 따라하며 끼어들었다. 우리는 서서히 멀어지다 문을 닫고도 잘 자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스무살이 되도록아주 가끔, 일 년에 한두 번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딸이 내 품으로 파고들 때는 마음이 아팠다. 독립을 앞두고 가장 걱정되었던 게 그거였다. 아빠와 둘이 살게 될 딸이 새벽에 놀라서 깨어도 내가 없을 테니 말이다. 고맙게도 딸은 걱정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누군가 어린 시절 가장 인상 깊었던 기억을 말해 보라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엄마와 함께 낮잠 잤던 일을 떠올렸다. 주말이었고 아마 예식장 같은 곳을 다녀온 후였던 것 같다. 무슨 이유에선지 집에 엄마와 나 둘뿐이었다. 나는 모로 누운 엄마 팔을 베고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었다. 다이얼식 텔레비전에서는 ‘맥가이버’가 방영 중이었고 엄마는 호피 무늬 홈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나는 짙은 풀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었고, 우리는 장미 무늬가 그려진 밍크요를 덮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순간의 모든 게 아직도 선명하다. 방 안의 공기와 밝기, 이불 안의 온도, 엄마 냄새, 너무 흡족하고 따뜻해서 잠들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떴던 것까지. 엄마는 아빠와 심하게 다투고도 잘 때는 어김없이 한 이불을 덮었기 때문에 우리가 엄마를 차지할 기회가 흔치 않았다. 심지어 나 혼자 엄마를 독차지하다니. 기억하기론 그날이 엄마와 단둘이 잤던 유일한 날이었다.
나이가 들고 결혼해 출가하고, 내 아이가 크는 동안에도 엄마는 늘 아빠와 함께 잤다. 그런데 얼마 전 명절엔 엄마가 내게 함께 자자고 청했다.
“아빠는 어디서 자고?”
내가 묻자 “몰라, 요즘엔 거실에서 자더라.” 하고 픽 돌아선다.
“니 엄마 새벽에 잠 안 온다고 텔레비전 틀어놓고 밤을 샌다.” 아빠가 무심하게 한마디 하더니 미안했던지 “나도 코를 심하게 골고…….” 라며 얼버무린다.
“새삼스럽게 왜들 이래. 이혼한 딸 앞에서 사랑싸움하는 거야? 그냥 둘이 자요.”
나는 엄마와 함께 자는 게 영 어색해 거실에서 버팅기다 결국 안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엄마가 보송보송하고 폭삭한 이불을 끌어 올려 나를 덮어주었다. 우리는 비스듬히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마침 추억의 한국 영화가 방영되는 중이었다. 이제는 꼬부랑 노인이 되었을 배우들이 파릇한 모습으로 애절한 사랑을 연기했다.
“엄마, 저 사람들 살아 있을까?”
“글쎄. 남자는 무슨 병으로 죽었다는 거 같어.”
“저렇게 젊고 잘생겼는데도 다 늙고 죽는다, 그치?”
“그러게. 나도 자식들 속 썩이지 말고 곱게 가야 할 텐데.”
“가긴 뭘 가. 아직 아빠랑 사랑싸움하는 거 보니 팔팔하구만.”
“응, 사실 죽는 건 좀 무서워.”
이불 안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꼭 아이 같았다. 내가 이렇게 작은 사람에게 안겼었구나 생각하니 불쑥 안쓰럽고 애틋해졌다.
“엄마, 엄마는 행복해?”
“몰라, 그런 거. 젊었을 때는 돈도 없고 기댈 데도 없으니까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만 살았지. 그러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가버렸네. 요즘엔 하루가 그냥 길어.”
“하고 싶은 건 없어? 다른 사람들처럼 뭣도 좀 배우러 다니고 그래.”
“아유 싫어. 난 사람 사귀는 것도 싫고 밖에다 돈 쓰기도 싫어. 그럴 돈 있으면 내 새끼들한테 쓰지 뭣하러.”
“참~내, 어렸을 때나 그렇게 생각해 주지. 아빠한테 인사 안 했다고 그렇게 잡도리를 하더만.”
“야! 집에 들어왔으면 나한테는 안 해도 아빠한테는 인사를 해야지.”
“나 그때 아팠다고오~. 애가 말이 없으면 무슨 일이 있는지 먼저 물어봐야지. 그저 아빠 타령만.”
“그래, 나는 니 아빠가 좋아서 살았다. 나한테는 엄마나 마찬가지였어.”
거기까지 말하고 엄만 까무룩 잠들었다. 잠이 안 온다더니 코까지 작게 골며 새근새근 잘도 잤다. 그 소리를 들으며 영화를 끝까지 봤다. 가난한 남자 주인공이 자기를 기다리다 병에 걸려 죽은 연인을 리어카에 실어 장례 치러주며 영화가 끝났다. 엄마가 좋아할 만한 결말인데 나만 보게 되어 아쉬웠다. 텔레비전을 끄기 전 잠든 엄마의 아이처럼 볼록한 이마와 하얗게 센 머리를 몇 번 쓸어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무서운 엄마, 아직도 혼자서는 못 자는 우리 엄마, 자고 일어나면 엄마의 두려움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길 빌며 나는 엄마의 엄마라도 된 듯 작은 몸을 이불째 꼭 한번 안았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