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심심해도 놀러 오세요! 제발요~
40년 넘게 충실한 소비자로 살다가 갑자기 공급자가 되니 세상이 달라졌다. 실은 세상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내 관점이 달라졌다. 겨우 바코드 찍고 계산하는 것만 익힌 상태에서 첫 고객을 응대하던 날이 아직도 생경하다. 얼마나 떨리던지. 누군가가 물건을 구매하는데, 그 돈을 내가 받는 상황이 이상했다. 나는 늘 돈을 내고 물건을 가져가던 사람인데, 내 물건을 누군가에게 주고 그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는다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돈의 무게를 느낀 날이다.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던 가벼운 그 종이 한 장이 돌덩이처럼 느껴진 순간, 내 정체성은 공급자로 바뀌었다. 먹고사는데 느껴지는 돈의 무게와 또 다른 그 돈의 무게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돈을 받고 판 물건이 제값을 해야 하는데. 물건을 사입하고, 추천하면서도 모든 기준은 제값 할 물건이다. 고객이 자신의 돈과 교환한 물건에 대한 책임은 공급자인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렇게 어색하던 공급자 역할이 날이 갈수록 익숙해졌다. 매일 돈을 받다 보니 적응이 된 것도 있고, 단골손님이 늘며 내가 사기꾼이 되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자신감으로 바뀐 것도 있다. 또 어떤 물건들이 제값을 톡톡히 하는지, 어떤 물건은 제값이상을 하는지 알게 된 것도 나를 편하게 해 주었다. 특히 고객 중에 지인을 데리고 와서 자신이 구매한 화장품을 추천해 줄 때면 뛸 듯이 기뻤다. 내가 그 화장품을 만든 사람도 아닌데, 뿌듯했다. 좋은 물건을 골라서 팔고 있는 우리 가게가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다시 찾을 정도로 고객이 만족해하니 더없이 기뻤다.
화장품 가게를 시작한 지 어느덧 8개월이 지났다. 사람으로 치면 이제 길 줄 알게 된 아기다.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고 팔다리를 바둥거리던 시절을 지나 뒤집기를 하고 목을 치켜들며 처음으로 세상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그 시선이 살짝 위로 올라와 그래도 내가 원하는 대로 스스로 이동할 수 있어서 참 재미있다. 가면 안 되는 곳을 가서 아슬할 때도 있고, 너무 많이 기어 다녀서 무릎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도 있지만, 자율성을 얻은 게 아주 만족스럽다. 모두 고객들 덕분이다. 고객의 질문 덕분에 내 상품에 대해 공부하게 되었다. "저한테 뭐가 더 좋을까요?" 수많은 화장품 중에 어떤 제품이 그 고객에게 효과가 있을지 짧은 시간 동안 수만 가지 생각을 한다. 돈값을 할 화장품이 무엇일까 신중하고 신속하게 답을 찾는다. 고객의 요청사항 덕분에 문제해결력이 생겼다. "카드 2개로 나눠서 계산해 주세요." 애써 웃으며 알겠다고 했지만, 입술 끝이 경련이 일어나며 손과 눈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흔들린다. 초능력을 발휘해서 포스기에 있는 글자를 사진처럼 읽어낸다. 덕분에 카드가 몇 개가 되었든 분할해서 척척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고객의 불만 덕분에 성분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지난주에 가져간 화장품 바르니까 얼굴에 뭐가 나."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하며 전성분을 들여다본다. 고객과 심층 인터뷰 끝에 어떤 성분이 문제가 되었는지 추측한다. 다음엔 그 성분이 들어있는 화장품은 각별히 주의한다.
아직 돌도 안된 우리 가게가 매일매일 크고 있다. 고객들이 찾아와 줄수록 크는 속도가 빨라진다. 커갈수록 공급자로서 다른 고민을 하게 된다. 고객 만족을 넘어 감동을 주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다. 지나가다 우연히 들린 고객이 재방문할 방법을 연구한다. 그래서 우리는 화장품보다 인생 얘기를 더 많이 한다. 근황에 대해 안부를 묻는다. 가족들 건강과 안녕에 관심을 갖는다. 소중한 우리 고객님의 작은 변화도 민첩하게 알아보려고 주의를 기울인다. 고객이 존재하기에 공급자로서 내가 존재한다. 걸음마를 떼고, 유아기, 아동기를 지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우리 가게의 모습을 어떨까 상상해 본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성숙하길, 내일보다 모레가 더 빛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고객의 도움이 절실하다. 심심하든 안 심심하든 우리 가게에 놀러 와주는 고객들과 함께 성장할 우리 가게! 많이들 놀러 오세요! 제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