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광섭 Dec 31. 2018

어느 날 갑자기 전문가가 되었다

국제 적십자 워크숍에서 생애 첫 강연을 마치고


'김광섭 매니저님 맞으신가요?
여기는 아시아 태평양 재난 복원력 센터인데요!'


얼마 회사에 출근해서 가습기 물을 채우러 가고 있을 때였다. 퐁퐁퐁 올라오는 수증기를 보며 '오늘은 저 수증기처럼 무해하고 촉촉한 하루를 보내야지'생각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반대편의 목소리는 본인을 '적십자 아시아 태평양 재난 복원력 센터'(휴..길다)에서 근무하는 담당관이라고 소개하셨다. 평생 운이 좋게도 '재난'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와 적절한 거리를 두고 살아왔건만, 대체 왜 재난 복원력 센터, 그것도 아시아 태평양 지구에서 나를 찾는 건지 참 알쏭달쏭할 노릇이었다.


절 왜 찾으세요?


용건은 간단했다. 이번에 서울 명동에서 20개국 관계자가 모여 '국제 재난 복원력 워크숍'을 진행하는데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회적 가치 혁신'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고개를 든 생각은 '오 대박 재밌겠다'는 것이었고, 이어서 떠오른 생각은 '제가요?(혹은 저따위 가요?)'라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저.. 근데 제가 그런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하니 '지금 하고 계신 일 설명해 주시면 됩니다'라는 시원시원한 답변이 날아왔다.


나에게까지 연락이 오게 된 전말은 이랬다. 지난가을,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문재인 대통령님이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러 평양행 비행기를 타시던 주였다. (이 역사적인 사건 때문에 내 일정이 상당히 복잡해졌던지라 생생히 기억한다) 당시 몇 가지 행사를 의논하고자 대한적십자사 본사를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만나 뵈었던 대외 협력관님과 내가 최근 담당하고 있는 사업들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협력관님은 그때의 대화를 흥미롭게 들으시곤 이번에 나를 해당 주제의 강연자로 추천해 주신 것이었다.


당일날 컨퍼런스장에 도착해보니 수십 명의 외국 손님들이 눈앞에 옹기종기 모여 계셨다. 흐음, 내 안에서 지독한 영어 울렁증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절절히 느끼며 타박타박 발표자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맨 첫 번째 순서는 국제 적십자 연맹에서 나온 매니저의 발표였는데 나는 속이 울렁거리는 통이 사실 무슨 말인지 거의 알아 듣지 못했다. 곧이어 옆자리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에게 차례가 돌아다. 이제 그나마 알고 있는 일천한 지식과 그간 담당했는 사업들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을 시작순서였다.

그 내용이란 것은 대략 이렇다.

-  저도 4차 산업 혁명이라는 것을 잘은 모르지만 새로운 기술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만은 확신합니다.

-  미래의 기업은 이윤 추구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며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사랑받아야 합니다.

- 그래서 제가, 그리고 저희 팀이 그동안 만들었던 사례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주로 이야기할 내용은 '완전히 새로운 헌혈 시스템과 혈액 안전망'입니다.


울렁증에 시달리는 모습이다


발표를 마치자 구석자리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듣고 계시던 청중 한분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을 해주셨다. 본인을 RCY 청년부 리더라고 소개하신 그분은 신문의 지면에서 나에 대해 자세히 읽어봤다고 말씀하셨다.(충격) 더불어 직접 만나게 되어 무척 감동적(?)이라는 망극한 이야기까지 덧붙이셨다. (아마 올해 누군가에게 존재만으로 처음 감동을 준 것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여기저기 들쑤시며 시끄럽게 일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나를 알아봐 주는구나..' 싶어 무척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강연이나 컨퍼런스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이 푸석푸석한 세상에 무언가, 정말 촉촉한 가치를 만들어내는 단비같은 사람만이 그런 자리에게 이야기를 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막상 연단에 서고 보니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저 자기 일 하나를 찾아서 민달팽이처럼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하면 여기저기서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디어를 생각만 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짜로 해보고 넘어지며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이 그렇게 많지 은 덕분일테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감사장


나는 '사회문제 해결'이라는 하나의 '고된 길'을 떠올리면 '그건 저 사람을 먼저 찾아가 봐'라는 말이 지칭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고 싶다. 가장 넓은 시야로 어두운 길에 빛을 쏘아줄 수 있는 그런 등대 같은 거인 말이다. 이번엔 비록 회사 이름을 등에 업고 잠시나마 느꼈던 전문가 체험이었지만, 앞으로는 혼자만의 힘으로 더 바로 설 수 있길, 그래서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더 많이 비추는 그런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길 전문가 번데기로서 속닥속닥 다짐해본다.

작가의 이전글 휴가를 절반도 못 쓴 신입사원의 속사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