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광섭 Dec 18. 2018

휴가를 절반도 못 쓴 신입사원의 속사정

'이 많은 연차는 누가 남겨 놓았을까?'


제목만 보면 '아니 세상에, '주 52시간'이란 역사적 사명이 엄정하게 지켜지는 워라밸의 시대에 감히 어떤 회사가 쪼꼬미의 휴가를 불허 한단 말이오!' 하며 분노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이 글을 '무뢰배 회사'를 비판하려는 성토 글이 아니라, 그동안 재충전을 게을리했던 스스로를 성찰하는 글이다. 다만 나 외에도 비슷한 사유로 휴가를 '못' 또는 '안'쓰는 산업 역군들이 계실 것 같아, 작은 공감대를 하나 형성해 보고자 한다. (나만 그런 거라면 조금 슬픈 일이겠다.)




우리 회사는 나 같은 저 연차 쪼꼬미 직원들에게 1년에 총 16일의 휴가를 준다. 연차가 쌓이면 휴가가 늘어난다고 하던데, 그렇게 먼 미래는 아직 생각해보지 못했으니 논외로 해야겠다. 현재, 그러니까 2019년 1월 1일까지 근무일을 고작 9일 정도 남겨둔 이 시점에, 나에게는 무려 9일(!)의 휴가가 남아있다. 쉽게 말해서 나의 올해 근무는 끝난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다음 주에도 사무실 의자에 앉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어야 한다.


휴가를 못쓴 이유는 팀장님 때문이 아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나름(?) 꽤나 선진적인 인사 제도를 갖추고 있어서, 자기가 휴가를 가고 싶으면 '가고 싶음'이라고 체크하고 그냥 가면 된다. 팀장님께 허락을 받을 필요도 없다. 물론 예의상 오래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말씀을 넣어 놓는 배려 정도는 필요하지만 사유까지 밝히며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더군다나 훌륭한 인품을 지닌 상사께서는 언제나 '놀면서 해, 쉬엄쉬엄 해, 천천히 해'라는 말을 달고 사신다.


그렇다고 연차보상비(휴가를 안 가면 보상으로 주는 급여)를 받기 위해 휴가를 안 간 것도 아니다. 일단 기본급이 낮은 쪼꼬미 직원은 그 돈을 받더라도 그리 큰 액수가 못 되기도 하거니와, (즉 집에서 노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당사자인 내가 금융이나 재무, 즉 돈에 큰 관심이 없다. 태생적으로 돈을 못 모으는 팔자를 타고난 덕인지,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아낀다'가 생활신조처럼 굳어져 있어서 '휴가=돈'이라는 공식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쓰고 보니 조금 한심..)


그렇다면 대체 '이 많은 연차는 누가 남겨놓았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범인이 두 명 있다. 첫 번째 범인은 '무계획성'이다. 그동안 나는 사업을 끊임없이 벌인다고, 코앞의 미래만 보면서 허겁지겁 일해왔다. 나름 정신없이 달린 것만은 사실이지만, 6개월 뒤, 1년 뒤, 3년 뒤 사업의 미래를 보는 안목은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체계적인 연간 계획이 부족했고 휴가를 갈만한 시즌이 와도 일이 쌓여 있어서 때를 놓치기 일쑤였던 것이다. 남들이 모두 제주도다, 동남아다 여행을 가는 여름이 되자, 그때서야 나는 화들짝 놀라 이틀 휴가 내고 후쿠오카에 다녀왔다. (그마저도 미팅 일정이 꼬여 마음 편히 가지 못했다)


두 번째는 '쓸모없는 책임감'이다. 책임감이란 보통 긍정적인 것인데 왜 굳이 이 책임감을 '쓸모없다'라고 격하했는가 하면, 굳이 가지지 않아도 될 책임감이었기 때문이다. 사회 공헌 사업 하나를 총괄하고 있는 나는 휴가를 가면 행여 무슨 일이 생길까, 너무 불안했다. 주변 동료들이 쉬어도 왠지 나만큼은 남아서 일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래서 장판파를 지키는 장비마냥 '네 이놈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이 곳은 절대 못 지나간다!'며 일을 겁박하곤 했다. 그렇지만 사실 그건 책임감이 아니라, 그냥 돌발 변수를 다루는 능력이 부족한 데서 오는 불안감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휴가를 안 가는 행동은 결코 잘하는 짓이 아니다. 올 10월, 그러니까 우리 한반도가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음료 선호를 개편할 무렵, 나는 완전히 탈진해서 번아웃될 뻔했었다. 8월까지는 주말에도 출근하며 불철주야 일했었는데, 어느 순간이 딱 지나고나자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없었다. 짧은 메일 한편 쓰는데도 2시간이 넘게 걸렸으니 완전히 깡통로봇이 된 것이었다. 다행히 세심한 팀장님께서 이 깡통을 유심히 관찰하시곤 심리상담을 해주셨다. 그렇게 한바탕 서러움을 쏟아내며 며칠 쉬고 오니 다행히 정상궤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는 것도 부지런한 사람이 잘 논다




내년에 꼭 지켜야 할 목표 중 하나로 '연차 알뜰살뜰 잘 쓰기'를 적어 보았다. 잘 쉬는 것은 '몸과 마음'을 위해서 그리고 '더 룰루랄라 일하기'을 위해서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휴가가 9일 남은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다 먹어치우는 건 무리겠지만 올해 안에 '이 많은 연차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실천할 수 있도록!! '저는 오늘 쉬겠습니다!' 이만 총총.

작가의 이전글 올 한 해 나의 브런치를 돌아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