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분이라면 이 영화를 좋아하실 겁니다.
아주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상]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촉망받는 정치 신인 '구명회'(한석규)는 해외출장을 갔다 집으로 돌아온다. 오랜만에 현관문을 여니 진동하는 피 비린내, 차고로 들어가 보니 그의 아내는 알 수 없는 남자의 시체를 처리하고 있었다. 죽은 남자는 '구명회'(한석규)의 아들이 뺑소니 사고를 낸 후 당황한 나머지 집으로 데려온 희생자였다. 교통사고 당시 그는 살아있었지만, 서둘러 치료를 받지 못해 남의 집 차고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이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이 위기에 처했음을 직감한 '구명회'(한석규)는 아들을 '단순 뺑소니'로 자수시키고 서둘러 피해자의 아버지, 유중식(설경구)에게 용서를 구한다. 하지만 유중식(설경구)은 사건이 그저 '뺑소니'가 아니며 뭔가 이상하다는 점을 깨닫고 진실을 찾기 시작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희생자의 아내 '련화'(천우희)이지만 그녀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종적을 감춘 상태. 정치 인생을 걸고 진실을 막으려는 남자(한석규),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캐내려는 아빠(설경구), 그리고 보통 여자는 아닌듯한 며느리(천우희)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진다.
이렇게만 쓰고 보니 이 영화는 발가락이 오들오들, 손마디가 짜릿짜릿한 스릴러 영화일 것 같지만, 음, 전혀, 현실은 정 반대다. 아무 생각 없이 영화관에 들어선 관객은 이과 시험지를 받아 든 문과생 마냥 가자미 눈을 뜨며 혼란스러워지는데, 오-직 선택받은 일부 관객만이 이 영화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그럼 과연 어떤 '선택받은 소수'가 영화를 보는데 적합한 사람일지 찬찬히 탐구해보기로 하자.
당신이 하얼빈 사투리 마스터라면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다. 한국에서만 나고자란 '범인(凡人)'은 애초에 영화에서 나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비유적으로 '너의 말이 사리에 맞지 않아 못 알아듣겠어'라는 뜻이 아니고, 문자 그대로 '너의 말(언어)'을 몰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우상'에는 천우희 님을 비롯해 등장인물의 1/3 정도가 중국 하얼빈 출신 조선족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철저한 현실 반영이 장점인 이수진 감독님답게 배우 분들이 아주 유려한 하얼빈 사투리를 구사하신다. 문제는 듣는 관객들이 하얼빈 사투리를 전혀 모른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영화의 중간에 천우희 님이 '어쩌구-저쩌구 (하얼빈 사투리 계속)- 내 약속은 지켰습니다 아버님'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관객들이 알 수 있는 건 '음, 천우희가 뭔가 약속을 했었구나'라는 것뿐이지, 무슨 약속을 한 것인지 도통 알쏭-달쏭이다. 이런 대사가 지나가고 나면 고요해야 할 영화관이 조금씩 웅성댄다. 관객들은 저마다 옆자리 사람에게 자그만 목소리로 '뭐래..?'라고 속닥거리고 있다. 이쯤 되니 객석에 앉은 사람들은 오히려 중국어로 말하는 장면을 기다리게 되는데, 적어도 그 장면만큼은 자막이 달려있는 까닭이다. 이건 마치 에스토니아 영화관에서 러시아 영화를 봤을 때와 매우 비슷한 기분.
숨은 의미 찾기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우상을 아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영화가 온갖 종류의 '상징'과 '복선'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거미', '수로', '목욕탕', '낙엽', '브래지어', '보따리' 등등이 있으니 '영화적 장치'에서 의미 찾는 것을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이만 치리 풍성한 영화도 없는 셈이다. 영화를 보다가 '음.. 저거 뭐가 있을 거 같은데'라고 하면 반드시 뭐가 있으니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보시길.
문제는 친절한 영화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이 이렇게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장치'들을 볼 때 짜증이 난다는 것이다. 보통 영화를 보면서 '아 저게 저거였어?'라는 순간이 있다면, 쉽게 말해 '소오-름', 좀 고상하게 말해 '잘 짜인 개연성에 탄복'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아니.. 저것도?'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 나중이 되면 '설마 저건 아니겠지'라는 장면이 '설마'인 것을 보면서 기함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장치를 많이 넣을수록 상을 주는 대회가 있다면 '우상'이 최우수상을 시상할 수 있을 듯. (영화가 끝나고 나면 '감독님이 영화제에서 정말 수상하고 싶으셨나 보다' 하는 생각만 든다)
본인이 범죄 프로파일링에 자신이 있다, 범죄자의 심리를 무당처럼 맞추는데 능하다, 하시는 분이 있다면 이 영화를 추천한다. 왜냐하면 일반인의 사고로는 등장인물의 범죄 심리를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의 '구명회'(한석규)는 분명 정치꾼이긴 하지만 일말의 양심은 있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런 그가 나중에는 납치범, 살인마 등등 온갖 범죄자의 심리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며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하니 관객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더욱이 중간중간 '구명회'(한석규)가 보는 환상까지 영화에 변죽을 올리면서 대환장 파티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그 와중에 '곡성'식 무속 신앙도 관중 난입을 시도한다. 영화의 중간, 대뜸 얼굴도 안 나오는 점쟁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의 목을 따라'는 해괴망측한 말을 하니, '유중식'(설경구)이 폭탄 테러로 이순신 장군 동상의 목을 땅에 떨어뜨린다. 이런 순간순간마다 관객들은 팔걸이를 잡고 '아니 또 갑자기 왜 그러세요..'. '내가 못 알아들은 하얼빈 사투리에 저런 얘기가 있었나'하며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는 것이다. 웬만한 심리 추적자가 아니라면 영화를 보며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니 부디 삼가 주시길.
배우분들의 연기만큼은 믿을 수 있다. 한석규 님은 한석규다운, 설경구 님은 설경구다운,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우희 님은.. 우리나라에서 천우희만 가능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 소름 끼치고 서늘한 눈빛이 특히 그렇다. 더불어 중간중간 조연 역할을 맡은 유승목 님(변호사), 현봉식 님(형사), 강말금 님(명회의 아내)의 연기 역시도 차분하고 매끄럽다. 참 이렇게 생각해보니 영화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싶기도 한데, 연기만은 그리고 배우들 만큼은 감탄할 수 있다.
[우상]은 내 첫 번째 무비 패스 영화였고, 첫 번째 시사회였던 만큼 무지개 빛 긍정 안경을 끼고 영화를 보려 했다. 정말 웬-만하게 즐겁게 보고 나와야지. 그런데 휴 아닌 걸 맞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영화는 너무 불친절하고, 독선적이며 마지막까지 현학적이다. 분석할 수 있는 것을 한 보따리 던져주지만 분석하고 싶어 하는 관객이 있을까 싶다. 글쎄.. 무비 패스 메일을 받고, 차마... 연락할 겨를이 없어 후다닥 혼자 다녀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