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작명 센스가 대단하다
요즘 누군가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주저 없이 넷플릭스의 ‘러브, 데스+로봇’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짧게는 5분, 길게는 20분 정도의 단편 애니메이션 18개를 꽉꽉 눌러담은 이 시리즈는 넷플릭스가 북미에서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선보인 화제작인데, 아직 한국에서는 그만큼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SF 판타지 덕후나 참신한 이야기 중독자들에겐 이미 입소문이 자자한 작품이기도 해서 점점 그 관심도가 올라가고 있는 상황이다.
시리즈는 짧은 템포의 단편 애니로 온갖 종류의 만담 혹은 괴담(?)들을 술술 풀어낸다. ‘오늘 아침 먹은 요플레가 세상을 지배한다면 어떨까?’처럼 귀여운 상상부터 ‘산골 농부들이 사실 전투 로봇 조종사들’이라는 허무맹랑한 설정, 그리고 ‘히틀러가 젊었을 때 사고사 했다면?’이라는 발칙한 가정에 이르기까지 ‘러브, 데스+로봇’은 작품마다 완성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그 상상력만큼은 톡톡 튀는 구성을 자랑한다.
이처럼 이 시리즈는 매편마다 감상문 한 장씩은 족히 써낼 수 있을 만큼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데, 사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시리즈의 제목(!), 곧 ‘러브, 데스+로봇’이다. 통일성이라곤 ‘엄청난 상상력’ 하나밖에 없는 이 시리즈는 대체 어떤 맥락에서 저런 추상적인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까? 언뜻 쉽사리 이해가 안 가는 이름이지만 그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제목은 정말 오랜 고민 끝에 나온 좋은 작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시리즈 이름의 첫 두 단어인 ‘러브’와 ‘데스’는 '이야기'(정확히 말하자면 Epic)를 상징한다. 사랑이면 사랑이고 죽음이면 죽음이지, 두 가지를 동시에 말하면 ‘이야기’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각자 그간 '읽은 것과 본 것'을 찬찬히 돌이켜보면 세상에 있는 온갖 종류의 이야기는 전부 ‘사랑’이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장 최근에 보았던 ‘어벤저스’(죽음)나 ‘알라딘’(결혼)이 그러하고, 오래전에 읽었던 전래동화가 그러하고,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위대한 고전들이 모두 이 구성을 벗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주인공과 기승전결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Epic), 특히 서양 서사시의 전통에서 ‘사랑과 죽음’은 모든 장르를 관통하는 거대한 두 기둥이다. 이 때문에 낭만주의 시대 영국의 대표 시인, 바이런 경도 ‘세상 모든 희극은 결혼(Love)으로 끝나고, 세상 모든 비극은 죽음(Death)으로 끝나지’라는 경구를 남기기도 했다. 더불어 아직까지 수많은 대학의 소설 수업 첫 번째 시간에는 다음과 같은 과제가 나간다.
[빈칸을 쓰고 싶은 만큼 채워보세요]
1. 아주 먼 옛날 잭과 제인이 살았습니다. [ ] 그들은 결혼하여 오래도록 행복하게 지냈답니다.
2. 아주 먼 옛날 잭과 제인이 살았습니다. [ ] 그들은 그렇게 죽고 말았답니다.
이 과제를 받은 새내기들은 이미 결말이 정해진 이야기를 본인만의 짧은 단편으로 각색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앞으로 인생에서 마주할 모든 이야기가 결국 저 두 문장의 변주(Variation)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랑과 죽음’의 뒤에 붙는 ‘로봇’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 여기서 ‘로봇’은 작가가 일상적인 이야기에 더하는 ‘상상의 장치’를 의미한다. 이 장치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풀어가고 싶은 이야기를 손쉽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거트가 세상을 지배할 때’ 에피소드에서는 인간보다 뛰어난 슈퍼 유산균(장치)이 사람들을 통치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장치는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한 것이지만 작가는 ‘평상시 정말 미개하다고 여겼던 존재가 사실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면?’이라는 상상을 ‘슈퍼 유산균’이라는 ‘로봇’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로봇’이라는 단어는 그 상상이 ‘단순한 마법’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로봇은 마법이나, 요술과는 달리 움직이기 위해 ‘일정한 물리 법칙’을 따라야 한다. 이는 달리 말해 로봇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는’ 상상만 취급한다는 뜻이다. 다시 ‘요거트가 세상을 지배할 때’를 예로 들면 이야기의 주인공인 슈퍼 유산균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마법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다. 작가는 재미있는 상상력에 약간의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유전자 변형 실험을 하다 슈퍼 유산균이 탄생했고, 그것이 보관 실수로 냉장고에서 살아남았다’는 ‘그럴싸한 설명’을 덧붙여 기가 찬(?) 상상력을 ‘마법’이 아닌 ‘로봇’으로 포장한다.
정리하자면 ‘러브, 데스+로봇’이란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에 그럴듯한 상상력을 더한 것’이라는 뜻이 된다. 넷플릭스는 이처럼 정말 단순하고(영어라곤 일절 써본 적 없는 어린아이조차 ‘러브’, '데스’, '로봇’세 단어는 알고 있다), 직관적이며,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좋은 시리즈 제목을 지었다. 제목이 의미하는 바처럼 앞으로도 이 시리즈는 ‘사랑과 죽음’에 ‘그럴싸한 상상력’을 담은 모든 시도를 끌어안을 수 있다. 모쪼록 ‘러브, 데스+로봇’이 계속해서 다양한 작가들의 괴랄한 상상력을 품어주는 좋은 토양이 되길 바라본다.
* 개인적인 추천 작품은 '요거트가 세상을 지배할 때', '무적의 소니', '목격자', '굿 헌팅', '행운의 13'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