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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Jun 26. 2019

너는 이름이 왜 그 모양이야?

[넷플릭스: 블랙미러] 주인공 이름의 유래를 알아보자


세상 모든 이름에는 뜻이 있다.


미국 소설 수업시간이었다. 그날은 헨리 제임스가 쓴 ‘여인의 초상’을 읽는 날이었는데, 마침 맨 앞자리에서 딴짓을 하다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앗, 이런..;’이라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교수님이 뜬금포 질문을 던지셨다. ‘광섭아, 이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 이름이 뭐니?’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시험인가 싶어 곧바로 대답했다. ‘교수님, 제가 영어를 아주 잘하진 않지만 알파벳 정도는 읽을 줄 압니다. 이사벨 아처라네요‘ 그러자 교수님이 또 한 번 물으셨다. ‘그러면 얘 이름은 왜 ‘아처’니?’ 나는 한층 더 심각한 표정이 되어 대꾸했다.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 작가가 그냥 짓지 않았을까요?’


버르장머리 없는 제자가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자 교수님은 껄껄 웃으셨다. ‘그래 너 말이 맞다. 너희가 그걸 어떻게 알겠니? 그렇지만 애들아 작가는 절대 주인공의 이름을 그냥 정하지 않는단다. 모든 이름에는 뜻이 있지. 너라면 앞으로 1년 동안 원고지에서 볼 이름을 아무 의미도 없이 지을 것 같니?’ 이 말을 듣고 나니 왠지 교수님 말에 수긍되는 부분이 있었다. 교수님은 그대로 말을 이어가셨다. ‘너희들도 알겠지만, 아처는 궁수라는 뜻이다. 여자 궁수 중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 누구니?’ 한 친구가 손을 들고 대답했다. ‘기보배?’, 교수님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손을 들었다. ’아르테미스?’ ‘빙고!’ 교수님이 기뻐하셨다. ‘아르테미스는 달과 사냥 그리고 처녀들의 여신이다. 이 소설을 읽을 때 그 점을 생각하며 읽어보도록 하렴’


이 날 이후로 나는 ‘이름 습관’이 생겼다. 그러니까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건 등장인물 이름의 뜻에 대해 한번쯤 고민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습관은 학교를 졸업한 지금까지 도무지 없어지질 않아서 아마 앞으로도 평생 가져갈 사고방식이 되지 않았나 싶다. 이번에 때마침 브런치에서 넷플릭스 과제를 하나 내주셨기에 오늘은 이 오랜 습관을 [블랙미러 시리즈, ‘레이첼, 잭, 애슐리 투’라는 작품]에서 풀어볼까 한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영화의 제목이 곧 등장인물들의 이름이기도 해서 더욱 의미 있는 해석 사례가 되겠다.




’레이첼, 잭, 애슐리 투’ 사례를 통해 알아봅시다.


레이첼 고긴스 (Rachel Goggins)

애슐리 투가 그렇게 좋니..

가장 먼저 우리의 주인공인 레이첼. 사실 레이첼은 영미권 여성의 이름으로 굉장히 흔한 경우이고 80년대에는 미국을 풍미했던 이름이기도 하다. 더불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독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이름이기도 해서 교포 중에 레이첼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도 굉장히 많다. 이 ‘레이첼’은 고대 히브리어로 ‘암양’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파생된 의미로 ‘순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 레이첼은 애슐리 오가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인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그녀는 심지어 애슐리 투가 해주는 칭찬만 믿고 무대 위에 춤을 추다 개망신을 당하기까지 한다. 레이첼의 이런 순진한 태도는 자신의 ‘우상’을 졸졸 따라가는 ‘어린양’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재클린 고긴스 (Jacqueline Goggins)

이 언니 츤데레인게 맘에 든다

두 번째는 레이첼의 언니 잭이다. 물론 잭이라는 이름은 엄연히 남자 이름이지만, 여자들 중에서 재클린을 줄여 잭이라도 부르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영화에서 잭은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거친 척 연기하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따뜻한 언니이자 딸이다. 그녀는 동생이 상처 받는 것이 싫어서 애슐리 투를 숨기기도 하고, 매번 아버지에게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그의 직업 정신만은 존중한다. 더불어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가장 침착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춘기 소년의 앞면과 따뜻한 소녀의 뒷면을 동시에 가진 캐릭터에 잭이라는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 


애슐리 오 & 투 (Ashley O & Too)

누나, 욕 너무 잘하는거 아니에요..

다음은 진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애슐리 오와 애슐리 투다. 재미있는 점은 사실 ‘애슐리’라는 이름이 잭 못지않게 중성적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이름은 미국에서 여성에게 사용되지만 영국에서는 남성의 비율이 더 높은 이름이다.(한국은 이랜드의 뷔페(읍읍...)) 영화에서 애슐리는 ‘희망을 노래하는 여성 팝스타’ 임과 동시에 ‘쌍욕을 아무데서나 내뱉는 센 언니’이기도 한데,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이 이런 중성적인 이름에 잘 녹아있다. 더불어 애슐리의 이름 뒤에 붙은 라스트 네임인 O는 팝스타로서 그녀의 모습이 실제로 공허한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한편 그녀의 지능을 본떠 만든 ‘애슐리 투’ 로봇은 영어 스펠링으로는 Too이지만 실제로는 Two(둘)의 의미로도 쓰여 애슐리의 두 번째 자아가 있음을 보여준다.


캐서린 오티즈 (Catherine Ortiz)

샘통이다 진짜

한참 착한 사람들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엔 악역이다. 바로 캐서린 오티즈의 경우인데, 여기서는 그녀의 라스트 네임이 재미있다. Ortiz는 Orti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 Orti가 바로 Fortunate(운이 좋은)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 의역하면 ‘운 좋은 사람’ 정도? 영화에서 캐서린은 조카인 애슐리 오에게 ‘우리가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게 된 것은 다 내덕’이라며 소리를 지르는데, 사실 관객들은 모두 그녀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는 때마침 음악 천재의 고모였기 때문에 현재의 생활을 모두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욕심이 지나쳐 파멸에 이른다.


고긴스(Goggins) & 베어(Bear)

이름 너무 대충지었다

이제 주요 인물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조연들의 사례다. 혼수상태에 빠진 애슐리 영을 구하기 위해 고긴스 자매가 애슐리의 자택으로 침입하자 베어라는 인물이 이 둘을 가로막는다. 일단 아저씨의 풍채를 보면 왜 사람들이 그를 베어라고 부르는지는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두 소녀의 성인 ‘고긴스’가 웨일스어 어원으로 ‘사냥개’라는 뜻을 가졌다는 것이다. 애슐리 영을 구하기 위해 침입한 ‘사냥개 두 명’이 ‘곰탱이’을 무찌른다는 설정이 이야기 깊숙이 숨어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멍크 박사(Dr. Munk)

의사라는 녀석이 나쁜놈..

마지막은 애슐리 영에게 환각제를 먹여 강제로 노래를 짜내게 하는 악당(!) 멍크 박사다. 그의 이름인 Munk는 영단어 Monk와 같은 어원인데 의미를 풀자면 ‘수도승’이라는 뜻이다. 중세에 수도승들은 종교지도자이자 동시에 의사로서 농노들의 정신과 몸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약을 ‘완전 유기농’이라고 속이며 애슐리 영을 피폐하게 만드는 그의 행동에 딱 적합한 네이밍이 아닐 수 없다.




고작 한 시간짜리 단편 영화 하나에도 이렇게 다양한 인물이 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모두 자기에게 찰떡인 이름을 갖추고 있다. 이처럼 세상에 ‘그냥 짓는 이름’은 없다. 의미를 ‘그냥 넘기는 관객’이 있을 뿐. 앞으로 보게 될 모든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의 이름을 꼼꼼히 따져보는 습관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지. 그러면 아마 모든 이야기가 한결 더 재미있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거라 확신하며 오늘의 문학 작명소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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