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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Jul 15. 2019

롱 샷: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노팅힐이 수작임을 알게 해 준 영화


인생을 살다 보면 그때는 그게 행복인지 몰랐는데 돌이켜 보니 좋았던 경우가 종종 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봤을 때는 평작이었는데, 지금 보면 걸작인 작품이 있게 마련이다. 이번에 브런치 무비패스, ‘롱 샷’을 보고 한가지를 깨달았다. 중학교 때 본 ‘노팅 힐’이 엄청난 수작이었다는 것.


‘롱 샷’과 ‘노팅 힐’은 꽤 많은 모티프를 공유한다. 우선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 엄청난 인물(우주대스타 & 국무장관)이 여주라는 점, 여주와 남주가 완전 우연히 일로 엮인다는 점, 여주가 남주 때문에 큰 위기를 맞는다는 점, 남주가 우정 짱짱 친구들과 위기에 처한 여주를 구하러 간다는 점 등등. 두 영화는 스토리 전반에 유사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니 ‘롱 샷’의 줄거리를 따라가자면 이게 ‘노팅 힐’의 리메이크인가 싶을 정도로 기시감이 든다.


다시 보니 정말 명작이다 또륵


하지만 이 북미식 B급 로코 '롱 샷'은 ‘노팅 힐’과 완전히(강조) 다르다. 또 이름처럼 '롱 샷', 즉 가망이 없어서, 보는 내내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났지만 좀 따져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를 만난다면 이 네 가지 말은 꼭 해주고 싶다.



갑자기 왜 그래요?


‘롱 샷’은 감정은 있는데 감정선이 없다. 그래서 모든 장면이 대충 빚어서 냄비에 휙휙 던진 수제비 같다. 찰기가 없이 뚝뚝 끊긴다. 사람이 기뻐하거나, 놀라거나, 화를 내는 데는 전후 맥락이 필요하다. 그런데 ‘롱 샷’의 인물들은 너무 갑자기 좋아하고, 너무 갑자기 화를 낸다. 이런 단점을 오직 등장인물들의 화끈한 성격 탓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장면이 그렇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프레드의 연기에서 이런 단점이 도드라진다. 프레드는 극 중에 ‘열혈 기자&연설 보좌관’ 역할을 맡는데 ‘열혈’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기자’나 ‘보좌관’의 감정선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침울할만한 상황에서도 바로 고공 텐션을 회복하니 관객이 그의 감정을 따라갈 겨를이 없다.


저도 좀 같이 신나요



조연은 바비인형이 아니에요


이 영화는 캐릭터를 너무 함부로 쓴다. 특히 조연의 경우가 그렇다. 대개 로코물에는 주인공 곁에 반드시 개그 캐릭터가 하나씩 존재한다. 예를 들어 노팅 힐의 경우 괴짜 동거인 웨일스가 그 역할을 맡았다. 주인공의 절친인 웨일스는 ‘나사 빠진 예술인’의 임무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뻘소리를 하며 관객들의 긴장을 풀어주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잠수복을 입고 씨리얼을 먹는..치명적인 똘끼


롱 샷에도 이 역할을 하는 ‘재밌고 시원시원한 타인종의 친구’가 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처음에는 ‘의리 있고 성공한 매니저’이다가 나중에는 ‘공화당원’, 종국에는 ‘기독교인’ 역할까지 혼자서 턱턱 맡게 된다. 이미 중요한 과업을 지고 있는 캐릭터가 ‘다양성을 포용하세요’라는 PC 메시지를 위해 이도 저도 아니게 희생된다.


이런 친구 캐릭터를 좀 더 잘 살렸어야 했다



여기서 미사일이 날아온다고?


‘롱 샷’은 개연성이 부족하다. 사촌 동생이 장난감을 어지르듯 스토리를 신나게 하늘로 던진다. 예를 들어 가장 기함했던 장면을 하나만 꼽자면 동남아 어딘가 호텔에서 미사일이 날아오는 장면이었다. 세상에 두 주인공이 멀쩡하게 TV를 보다 대뜸 사랑에 빠지더니, 창밖에서는 내전이 일어난다.(입틀막)

이 장면은 헐리우드식 폭발 액션을 보여주려는 의도 같았다. 하지만 차라리 이럴 시간에 남주와 여주가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을 좀 더 천-천히 밀도 있게 풀어냈으면 어땠을까 싶다. (영화는 고작 5분짜리 인터뷰 문답으로 사랑을 만들어(?) 내니 말이다.) 영화가 스토리를 던지는 방식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클럽에서 마약하다 협상장으로 불려 가는 국무장관이라니.. 그 상상력만큼은.. 인정.


로맨틱 -> 정신없음 -> 로맨틱



이제 와서 B급 영화라는 거예요?


이 영화가 가장 얼척없는 부분은 '자기 필요할 때만 B급 인척' 한다는 것이다. 환경, 차별, 꿈처럼 온갖 좋은 주제는 다 가져다 쓰고 웃음 포인트를 찾을 때만 B급 유머에 기댄다.  웃기려면 아예 웃기고, 메시지를 주려면 메시지를 줘야 하는데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다 보니 둘 다 애매하다.

웃기기라도 하면 괜찮았을 것이다. 문제는 웃기지도 않다. 유일하게 재미있었던 장면을 꼽으라면 북유럽 전통의상을 입는 장면뿐이었다. 영화는 2시간의 러닝타임 내내 온갖 몸개그를 시도하는데, 보면 ‘와하하’하는 몸개그가 아니라 ‘질끈’하게 되는 몸개그다. 너무 대놓고 하기 때문인 듯하다.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는 요상한 성적 농담은 덤이다.


대충 혼란스러운 표정




추천하라고 보여준 시사회에 악평을 달자니 마음이 편치 않다. 하지만 영화에서 주인공 프레드가 가르쳐 준 것이 딱 하나 있다. 그는 글을 쓸 때 거짓말은 쓰지 말라고 했다. 진실이 담긴 글만 힘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래서 그냥 느낀 대로 쓴다.


지난번에 봤던 ‘수영장으로 간 남자들’과 비교해서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프다. 별 기대 안 했던 영화는 대박이었고, 두근두근 추천했던 영화가 이렇게 되다니. 집으로 돌아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복잡한 기분으로 남은 팝콘을 축냈다. 다음번 무비패스 신청 때는 신중 또 신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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