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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Jul 16. 2019

전화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

얼른 세상이 발전해서 텔레파시가 나왔으면


일을 하다 보면 가끔, 내가 굉장히 잘못된 진로를 골랐구나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침에 노트북 까먹고 출근할 때, 메일에 첨부파일 안 넣었을 때, 옆 사람이랑 빈정대며 싸울 때, 모두 이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중 제일은 전화를 해야 하는 때다. 전화하는 것을 매우 매우(x100) 싫어하기 때문이다. 전화를 거는 것은 물론이고 받는 것도 싫어한다. 생각만 해도 울렁증이 생길 것 같다. 윽..

기획자가 전화를 싫어한다는 것은 굉장히 큰 결격사유다. 왜냐하면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기획자는 강아지로 치자면 마약 탐지견 같은 존재라, 항상 세상 돌아가는 꼴을 킁킁대며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돈 냄새’가 난다 싶으면 후다닥 달려가서 붙들고 늘어지는 게 임무다. 그러니까 전화를 싫어하는 기획자란 가방을 싫어하는 마약탐지견 같다고 해야 할까. 돈이 어딨는지는 아는데 잡지는 못하고 끙끙대는 모양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전화하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특히 모르는 사람과 통화하는 것은 거의 병적으로 피했다. 언제부터 이런 머저리가 되었을까.. 기억을 더듬어보니, 초딩 1학년 때 배운 슬기로운 생활이 발단이지 않았나 싶다. 슬기로운 생활은 ‘전화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현대 문물이 아직 익숙지 않은 꼬맹이에게 매우 엄격한 루틴을 지시했다. 1. 전화기 앞에 앉으세요, 2.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거세요, 3. 인사하세요 , 4. 내가 누구인지 말하세요, 5. 상대방을 확인하세요, 6. 이제 할 말 하세요. 가 그 순서였다. 정말 시험 같았다.


This is 공중도덕


당시 담임 선생님은 장교 출신으로 아주 실전적인 분이셨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지식은 반드시 몸으로 배워야 한다’는걸 온갖 방식으로 전파하셨다. 그래서 선생님은 수업 시간 중 짝꿍의 어머니께 전화하는 ‘훈련’을 만들었다. 당시 짝꿍은 엄청 재수 없는 애였는데, 걔네 어머니도 성격이 똑같았다. 조금만 틀려도 대놓고 사람을 나무랐다. ‘어.. 죄송한데.. 보경이 좀 바꿔주세요’, ‘내가 누구인지 먼저 물어봐야지, 아직 이것도 못하니?’ 대충 이런 식.  전화하기 싫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다.

이런 쫄보탱으로 살 때 가장 짜증 났던 것은 짜장면이 먹고 싶은 날이었다. 남들은 ‘아니 전화해서 동호수 말하고 짜장면 달라고 하면 되는걸 그걸 왜 못해? 멍청이야?’라고 하겠지만, 불행히도 멍청이가 맞기 때문에 그런 팩트를 던지면 얼굴에 맞고 주저앉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때 썼던 잔꾀는 동생을 부려먹는 것이었다. 10살짜리가 탕수육을 못 시켜서 7살 동생에게 전화기를 주는 꼴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꼴불견이다.

이런 행동이 계속되자 엄마, 아빠도 뭔가 눈치를 채셨던지 ‘너가 직접 해’라며 전화기를 쥐어주셨다. 이렇게 앞은 전화기, 뒤는 세 가족에 강아지까지 노려보는 진퇴양난이 되면 탈출을 포기하고 공책 한 장을 터덜터덜 뜯어왔다. 그리고 중국집 아저씨와의 대화를 알고리즘으로 만들었다. 기계처럼 단숨에 읽는 것이 목표였다. 남들은 배달의 민족이 처음 나올 때 성공 여부를 의심했다고 하는데 나는 ‘무조건 성공할 거라’ 확신했다. 왜냐면 내가 꼭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금 사람 구실을 하게 된 데는 군대가 큰 역할을 했다. 나는 공군사관학교에서 생도들 영어 교과 조교일을 했었다. 그때 사무실에 앉아있으면 온갖 사람들이 하루-온종일 전화를 걸어댔다. 강의실 못 찾는 1학년, 한국말 못 하는 몽골 생도, 시간표 바꾸려는 장교 등등. 한 6개월 정도 하루에 2시간씩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 보니 전화를 피해 다니는 일 자체는 없어졌다. 필요하면 꾹꾹 참으며 전화도 곧잘 걸게 되었다.

사람 만나는 것은 좋아한다. 심지어 몇백 명 앞에서 하는 발표도 깔깔대며 신나게 잘한다. 그런데 유독 전화만 생각하면 미식미식하다. 얼른 세상이 발전해서 텔레파시가 나왔으면 좋겠다. 아니면 바로 옆에서 말하게끔 순간이동이 나와도 좋을 것 같다. 어쩌다 서신과 텔레파시 사이, 애매한 시대를 태어나서 이런 울렁증을 앓아야 하는지! 전화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일하다가 전화하려니 드는 생각이었다.(또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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