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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Aug 05. 2019

브런치 성적표를 받아보았다

데이터 분석으로 살펴본 나의 브런치


어느새 1주년이다. 작년 8월, 브런치에 첫 번째 글을 쓰고 그새 한 해가 지났다. 아기는 태어난 지 1년이 되면 돌잔치를 하고, 치킨집도 개업 1주년에는 할인 행사를 연다. 음.. 이 구멍가게 브런치도 뭔가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 그렇다고 혼자 '[경] 김광섭 브런치 탄생 1주년 [축]' 꼬깔을 쓰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언가 재밌고 참신한 기념식이 필요했다.


참신한거..뭐 없을까


그때 스친 생각이 '브런치 성적표 만들기'였다. 20년 가까이 성적표로 갈무리되는 인생을 살았는데, 회사에 들어오니 성적표 받을 일이 없어졌다. (올해는 받겠지만 작년에는 신입사원이어서 면제였다.) 결국 성적표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된 인간은 (끔찍) 자기가 받을 성적표를 자기가 만드는 기묘한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 야구 모자를 뒤집어쓰고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디멘터처럼 집을 나섰다. 그리고 동네 앞 엔제리너스 제일 구석자리에 가서 브런치 웹 페이지 구조를 슥슥 살펴봤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래서 짧은 파이썬 코드를 툭툭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브런치에 올라와있는 내용을 엑셀 파일로 정리해 차곡차곡 쌓아둘 수 있었다.


총 56편의 글을 이렇게 정리했다


엑셀에는 글의 제목, 부제, 날짜, 좋아요 수, 공유 수, 댓글 수, 글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자료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구조를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그렇게 짧은 분석 결과, 총 8가지 키워드를 뽑았다. 그렇다면 2018년 8월부터 2019년 7월까지 김광섭의 브런치 성적표는 어떤 키워드를 담고 있을까.


1. 월간 김광섭


지난 12달 동안 한 달에 최소 한 편의 글을 썼다. 오락가락 부침은 있었지만 명맥만은 지켰다. 이런 눈물겨운 글쓰기 노력에 소심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짝짝) 언뜻 '야! 한 달에 한 편 쓰는 게 뭐가 어려워!' 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태생이 나무늘보 혼혈인 사람에게 이 정도 꾸준함은 꽤 치하받을 일이다. 대학 기말 레포트도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안 내던 늘보가 무려 일 년간(!) 자발적으로(!) 글을 썼으니 교수님도 못하신걸 브런치가 해냈다.


매달 올린 글의 수, 최대 8개 최소 1개다


위 그래프는 김광섭이 매달 몇 편의 글을 썼는지 보여준다. 자세히 보면 지난 4월, 작은 위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 달 동안 딱 '한 편' 썼다. 세상에! 이 무렵은 회사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하루에 4시간씩 메일만 쓰던 암흑기였다. 키보드만 봐도 울렁증이 왔다. 에세이를 쓰는 시기가 아니라 에세이의 소재가 만들어지던 시기. 그 와중에 생일날, 강아지를 산책시키다 '글책감'에 꾸역꾸역 써낸 문장이 '4월 생일의 좋은 점'이었다. 어지간히 글쓰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출처: 일간 이슬아)


이 게으른 그래프를 보고 있자니 하루에 한편씩 글을 써서 보내셨다는 '일간 이슬아' 선생님이 생각났다. 그분은 얼마나 엄청난 작업을 하신 것일까. 내가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매일 글을 써야 한다면 한 5일 차쯤 글의 제목이 '이력서'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꾸준한 글쓰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 같다.


2. 하얗게 불태웠어


월간 지표를 주간 지표로 세분화하면 좀 더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내 글쓰기는 매번 '하얗게 불태웠어' 식이다. 그러니까 한 몇 주 정도 삘(!)을 받으면 온갖 주제를 주야장천 써댄다. 그리고는 '야호, 이제 소재 고갈이야!' 생각이 들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 하지만 몇 주가 지나면 또 무언가 쓰고 싶어 근질근질한 상태가 되고, 이 루틴이 계속된다.


글쓰기 패턴 aka 운동 패턴


이것은 마치 피트니스 센터에서 1년권을 결제하고 첫 주는 아침저녁, 보디빌더처럼 운동하다가, 다음 주부터 기력이 쇠하는 다이어터의 패턴 같다. 특히 그래프에 노란색으로 표시한 영역은 이런 '번아웃형 글쓰기 패턴'을 제대로 증명하고 있다. 그야말로 황량하다. 이제는 한주에 한편을 쓰더라도 꾸준히 쓰는 습관을 익혀야겠다. (고 다짐해 본다.)


운동도 글쓰기도..꾸준히...


3. 주간 생체리듬(?)


예전에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말을 했었다. '괴로움이 곧 인생'이라고. 그때는 진짜 변태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그래프를 보니 조금 알겠다. '괴로움이 곧 인생'은 아닐지 몰라도, '괴로움이 곧 글쓰기'인 것은 맞다. 적어도 나는 괴로운 순간에만(!) 열심히 글을 썼다.


나쁘게 말하면 ‘게으름’ 좋게 말하면 ‘인간미’가 놀라운 수준


이 그래프는 내가 지난 일 년 간 무슨 요일에 글을 올렸는지 보여주는 자료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나의 '주간 불행지수'와 업로드 수가 ‘완전히’ 정비례한다는 것이다. 회사 다니는 분들은 쉽게 공감하시겠지만, 일단 직장인은 일요일 저녁이 되면 기분이 안 좋아진다. 월요일, 화요일은 회사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수요일이 되면서 서서히 마음의 평화를 찾는다. 금요일, 토요일에는 뭘 해도 행복하다.


격한 공감이 담긴 짤방


김광섭 작가는 지가 놀러 가는 금, 토에는 글을 쓸 생각도 안 하고, 일요일 저녁부터 월, 화에만 열심히 글을 썼다. 이런 걸 보면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쓴다'는 핑계가 희대의 망언임을 알 수 있다. 게으름뱅이는 시간이 생기면 포카칩을 먹으며 뒹굴댈 뿐, 고통이 있어야 글을 쓴다. 도스토예프스키 선생님, 이제야 선생님 그림자라도 바라보겠습니다. (심지어 이 글도 월요일 업로드다)


4. 공유는 어려워


다른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읽다 보면 한 분야의 대가들을 종종 발견한다. 전문가 분들은 자기 인생을 오래도록 우려낸 총명탕을 브런치에 꼼꼼히 달여주신다. 아침저녁 브런치를 마시는(?) 나는 하루에도 몇 개씩 보약을 먹는 기분이다. 다른 분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신지, 이런 대가들의 글은 수백 번씩 공유되는 일이 예사다. 에세이도 마찬가지다. 나만해도 팬질하는 에세이 작가님의 글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열심히 퍼 나른다.


세로축은 그동안 쓴 글, 가로 축은 제목, 좋아요, 댓글, 공유 유무다


반면 내가 쓴 글은 공유가 잘 안 되는 편이다. 하긴 이렇게 하고 싶은 말 다 쓰는 개방형 일기장을 누가 공유하시겠냐만, 표로 보면 좀 더 확실하다. 위 표는 나의 브런치 데이터를 프레임 형태로 정리한 요약도다. 검은색 영역은 데이터가 있는 것이고 하얀색은 비어있는 공간이다. 슬쩍 보아도 공유(Share) 영역은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것이 보인다. 이제는 단순한 뻘글보다 선한 영향력이 담긴 글을 써야겠다.(고 이 역시 다짐해 본다.)


5. 모두들 나에게 힘을 모아줘


글을 쓰는 작가분들은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누가 내 글을 좋아해 주면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처음 브런치에 글을 썼을 때 얼굴도 모르는 분이 좋아요를 눌러준 순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고 화장실에서 가그린을 우물우물하고 있을 때였다. 그 순간은 마치 대형 출판사에서 연락이 온 것처럼 기뻤다. 옆에서 양치하는 친구를 붙잡고 '야야!, 나 글 잘 쓰나 봐'하며 자랑까지 했더랬다.


꾸준히 늘어나는 평균 좋아요 갯수


위 그래프는 지난 2018년 8월, 글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현재까지 각각의 글마다 얼마큼 좋아요가 있었는지 보여준다. 반쯤 털어낸 옥수수처럼 울퉁불퉁한 모양새다. 그래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모든 글의 좋아요가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착하고 너그러운 독자분들이 등을 툭툭 두드려주시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갑자기 좋아요 300개가 넘는 글이 생겨서 그래프 모양이 조금 이상해졌다.)


좋아!


브런치 좋아요를 보면서 종종 느끼지만 '좋아요 수'가 많다고 꼭 좋은 글은 아닌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내가 지난 1년간 소위 ‘제일 잘 썼다’고 생각하는 글은 ‘그래요, 인문학은 참 예쁜 장식품이에요’인데 이 글은 좋아요 개수가 17개뿐이다. 반면 얼마 전 사기꾼을 만나고 분노해서 쓴 ‘브런치 글을 도둑맞았다’는 클릭 수가 지금도 무궁무진 늘어나는 중이다. 앞으로 글을 2년 정도 더 써서 데이터가 충분히 쌓이면 ‘좋아요 수 예측 모델’도 만들어보고 싶다.


6. 인싸


나는 원래 SNS를 거의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흔한 인스타그램도 없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온라인으로 알게 된 관계가 밍숭맹숭하게 느껴지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SNS에 다른 사람들 노는 걸 보면 나도 놀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런치에서 나는 한 명의 작가가 가진 생각에 깊이 공감할 수 있고, 그 사람이 노는 모습뿐 아니라 어려운 상황, 슬픈 감정도 모두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 계속 는다는 생각이 든다.


좋아요 보다 증가세가 훨씬 뚜렸하다


브런치에서 ‘인싸력(?)’을 보여주는 방증은 독자와 작가가 교환하는 댓글이 아닐까 생각한다. 무슨 댓글이건 서로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니까. 위 그래프는 내 글에 지난 1년간 댓글이 얼마나 꾸준히 늘어났는지 보여준다. 앞서 살펴봤던 좋아요 수보다 훨씬 뚜렷한 증가세를 관찰할 수 있다. 다만 이런 댓글은 주제 별로 굉장히 큰 차이가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 리뷰는 댓글이 거의 없는 편이고, 나의 일상에 관한 에세이는 댓글이 많다. 20대 후반, 요상한 사람이 보내는 하루는 댓글을 달기 굉장히 좋은 소재인 듯하다.


요상한 인싸 1


7. 하루 100 단어


그렇다면 이제 양적인 의문이 생긴다. 위와 같은 분석이 나오기 위해, 나는 대체 하루에 몇 단어를 써온 것일까? 그래서 그동안 썼던 모든 글을 합쳐 줄줄이 젤리처럼 나열해 보았다. 단어 수를 세어보니 총 39,825개였다. 이 엄청난 숫자를 1년 365일로 나누어 보았더니 하루에 109개의 단어를 썼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에 2 문단 정도를 꾸준히 쓴 셈이다.


39825개 입니다


특별히 글을 열심히 썼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는데, 막상 1년이 지나니 꽤 많은 양의 문장이 되었다. 지하철을 오고 가며 쓴 브런치가 어느덧 커다란 실뭉치가 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팔만대장경과 피라미드가 모두 사람이 만들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습관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8. 사람에 대한 말과 생각


마지막으로 내가 그동안 무슨 글을 써왔는지 살펴보았다. 1년 동안 단어를 무려 3만 개나 써왔으니 그 단어를 분석하면 분명 평상시 ‘김광섭’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내 글에 자주 등장하는 키워드 탑 10을 뽑아보았다. 그 결과가 아래의 그래프와 같다. [사람-353회, 생각-296회, 말-275회, 나-248회, 세상-114회, 영화-112회, 글-105회, 이야기-98회, 지금-95회, 친구-86회]


늘 이런 그래프를 그리면 맨 앞 5-7개의 키워드가 월등히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걸 한 문장으로 묶어보면, ‘[나]는 [사람]와 [세상]에 대한 [생각]을 [지금]까지 [말]과 [글]로 [이야기]했고, 그 주제는 [영화]나 [친구]에 관한 글을 많이 썼다’는 것이 된다. 불용어(의미 없는 단어, 예: 것, 하나, 정말 등)를 처리하는 것 외에 키워드 조작은 딱히 하지 않았는데, 결과가 이렇게 나오니 무척 신기하다. 이처럼 사람 냄새나는 키워드로 글을 썼다는 게 어쩐지 뿌듯하다. 하지만 동시에 특정 ‘전문 분야’ 글은 거의 없다는 게 심심한 점이다. 다시 한번 이 결과를 워드 클라우드를 표현해 보면 아래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새로운 형태의 뇌구조 판독기




여태껏 짧고 간단한 브런치 분석이었다. 이렇게 데이터로 지난 1년을 살펴보니 아주 당연한 결과도 있었지만 생각지 못한 특징도 종종 등장했다. ‘나는 꾸준히, 하지만 굉장히 들쑥날쑥 글을 썼다. 더불어 놀러 갈 때는 키보드와 격조했고, 공유가 될만한 글은 못썼다. 하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응원해주고 있고, 친분이 생긴 작가님도 생겼다. 이때까지 매일 100 단어 정도를 썼으며, 그 단어는 ‘사람’에 대한 ‘말’과 ‘생각’이었다.’


이 분석은 앞으로도 매해, 더 정교하게 해 볼 생각이다. 올해는 고작 간단한 통계 분석이 다였지만, 데이터가 좀 더 쌓이면 한층 신기한 모델이 나오지 않을까. 30년 정도 뒤, 다락방 서재에서 '[경] 김광섭 브런치 30주년 [축]' 분석을 할 수 있다면 꽤 성공한 인생일 테다. 마지막으로 지난 1년간 좋은 영향력을 나눠준 작가, 독자 선생님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고맙습니다!



*분석 코드는 조만간 git에 올려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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