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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Aug 16. 2019

경기도 사람은 고향이 없나요

사투리를 쓰는 대단한 고향은 아니지만


'너는 고향이 어디야?' 대학교 새내기 시절이었다. 같은 반에 엄-청 예쁜 선배와 함께 있었는데, 대뜸 저런 질문이 날아왔다. 그때만큼 고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순간은 없었던 것 같다. 잠들어 있는 순발력을 잽싸게 깨우고 지금 당장 신통한 대답을 내놓으라 보챘다. 하지만 별달리 뾰족한 해답이 나올 턱이 있나. 그저 조그맣게 '아 저는.. 경기도 안양 살아요'하고 답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선배는 '야! 니, 서울 사람이었나!' 하고 감탄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요상한 대화였던 셈인데, 부산 출신인 선배가 보기에 난 그냥 서울(근처)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선배에게 이실직고(?) 한 것처럼 나는 이날 이때껏 경기도에서만 자랐다. 그것도 안양에서만 20년을 넘게 살았다. 그러다 보니 원래부터 특별히 '고향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선배의 질문으로 좀 더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지방 사람에게 내가 '무연고'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우리 동네는 이름도 깔끔한 평촌 신도시였으니 산 넘고 물 건너오신 분들이 내 고장을 '고향'으로 봐주실리 만무했다. 그렇게 '서울 근처 거기', 회색지대에 살던 나는 고향 없이 자랐다.


회색 지대..치고는 좀 초록색


이처럼 애매한 정체성 때문인지 나는 지역색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또 부러워했다. 그 사람들의 고향이 예쁜 포인트 컬러쯤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특별히 한 지역 출신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전라도는 낙낙한 노란색, 경상도는 싱싱한 초록색, 강원도는 분분한 분홍색처럼 각각 또렷하고 딴딴한 색깔이 그 사람을 화사하게 칠해준다고 생각했다. 또 그런 색깔의 백미는 사투리였다. 지방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표준어만 쓰는 사람은 사투리를 도통 배울 수가 없다. 사투리란 외국어와 달라서 '네이티브'가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하루는 고향이 갖고 싶었던 내게 누군가 솔깃한 제안을 해줬다. 수도권에서 태어난 사람은 부모님 고향이 곧 자기 고향이라는 것이었다. 우리집은 친가와 외가 모두 경상북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 논리대로라면 나도 '명예 경북인'이었다. 하지만 '위대한 영남혈통'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명절에나 가끔 내려가던 사람이 경상도민을 사칭하는 것도 기가 찰 노릇인지라 곧장 그만두었다. 그렇게 나는 서른 살이 다되어 가도록 고향을 갖고 싶지만 고향이 없는 사람으로 지내야 했다.


12촌(...)을 보던 큰집,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짱 싫다


그러다 얼마 전 20년간 살던 동네를 떠나 또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갔다. 신입사원(나)이 3달 동안 회사 연수원에 갇혀있는 사이, 전격적으로 진행된 이사였다. 부모님은 이삿짐센터가 찾아오던 주에  '아들! 우리집 이사가!'하고 전화를 주셨다. 순간 내가 옆집 아들인가 싶었다. 엄마도 어처구니가 없으셨는지 나와 함께 깔깔 웃었다. 그렇게 나는 20년 동안 살던 집과 작별인사 한번 하지 못하고 낯선 동네에 옮겨 심어졌다. 예전 우리집이 초등학생 남자애 둘을 새로운 식구로 맞았다는 것만 어렴풋이 들었다.


부모님은 새로 옮긴 보금자리를 퍽 마음에 들어하셨다. 아파트는 새것에, 전통 시장은 3분 거리, 편의점도 코앞에 있으니 이만한 입지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도무지 이곳이 '우리집'으로 느껴지질 않는다. 가끔 새벽에 눈을 뜨면 남의 집에서 일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나아질 줄 알았건만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동네가 영 어색하기만 하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새로운 집의 배경에는 내가 기억을 색칠할 곳이 한 군데도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예전 동네에는 모든 장소에 기억이 겹쳐 보였지만 여기서는 그저 장소만 보인다. 연필로 아크릴판에 그림을 그린다면 이런 느낌일까.


생각해보면 고향은 사투리처럼 거창한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름 풀밭 반딧불이 같아서 작지만, 반짝이며 여기저기 흩어져있다. 내 고향에는 '학교를 지각할 때 뛰어넘던' 문방구 담벼락이 있었다. '여름철 송충이 폭탄을 맞고 꽥꽥대던' 산책로가 있었고, '한입도 못 먹은 컵볶이를 쏟았던' 분식집도 있었다. 너무 당연해서 신경조차 안 쓰던 배경과 그 기억이 나에게 반딧불이였음을 이제야 안다. 동생도 지방 기숙사로 떠나고 없으니 이 적적한 마음을 나눌 가족이 우리집 강아지밖에 없다. 얘도 거기서만 12년을 살았으니 분명 나만큼 그곳의 기억이 그리울 테지.


송충이 폭탄 출몰지


나는 경기도 사람이지만 고향이 있다. 우리 고향은 사투리도 없고, 명물도 없고, 그 흔한 향우회도 없지만 내 기억에 작고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요즘 누가 고향을 물어보면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똑똑히 이야기할 수 있다. '제 고향은 경기도 안양이에요. 저는 거기서 눈감고도 다녀요. 어느 정도냐면 신호등 바뀌는 시간까지 전부 안다니까요.'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일 수 있다. '저는 거기 있는 장소마다 이야기를 써서 하나씩 포스트잇도 붙일 수 있어요. 왜냐하면 곳곳에 숨은 제 기억을 생생하게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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