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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Sep 18. 2019

을지로 구보씨의 퇴근

구보의 시계가 저녁 7시를 가리킨다


과장은 구보가 저의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싸는 모습을 본다. 구보는 신발을 고쳐 신고 맥북을 꼼꼼히 싸매고는 추적추적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오늘 고생 많았다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문을 닫은 구보는, 혹은 팀의 막내는 자기 말을 듣지 못하였는지도 모른다. 과장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대체 구보는 매일, 어디를, 그리 황급히 가는겐가’ 그것을 가만히 생각해본다. 구보는, 저 헛웃음 많은 90년대생은 지난 연말부터 과장의 작은 걱정거리였다.

구보는 로비를 나와 미래에셋 앞 청계천으로 향하며 과장에게 단 한마디 ‘네’하고 대답하지 못했던 것을 뉘우쳐 본다. 하기야 엘리베이터 문을 닫으며 ‘네-’ 소리를 목구멍까지 내어보았으나 엘리베이터에서 과장의 자리까지는 제법 큰 데시벨을 요구하였고, 공교롭게도 열린 엘리베이터 내부에는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퇴근길 들뜬 표정으로 'ㄴ'까지 외치던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구보는 어금니를 꼭 맞대고 생각한다.

청계천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구보는 튀김우동 아저씨를 본다. 튀김우동 아저씨는 늘 라면 박스로 온몸을 덮고 있어 튀김우동 아저씨인데, 황갈색 박스 외에 그를 다른 노숙자와 분별짓는 특징을 찾는 것이 구보한테는 영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내심 태평한 노숙자에게 사연까지 붙여본 자신이 도리어 이상한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청계천 오른편 계단에 붙어선다. 구보는 청계천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우연히 맡았던 물비린내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질러 간다. 구보는 등산봉에 부딪힐 것 같은 위협을 느끼고 위태롭게 걸음을 돌려세운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구보는 서울 도심 인공 하천에서 등산봉을 들고 다니는 아저씨는 대체 어디서부터 걸어와 이제야 구보를 뒷걸음치게 한 것일까 잠시 그것을 궁금해한다. 그러나 구보는 이내 평정을 되찾고 물고기 밥을 주는 연인들 사이를 수초처럼 헤엄쳐간다. 광교를 지날즈음 되어 구보는 오늘 참 미세먼지 한점 없이 날이 맑구나, 날이 저물도록 날에 대해 생각해본 것이 처음이었구나를 떠올리며 물가 돌부리를 발로 찬다.

제법 큰 피라미 한 마리가 바위틈에서 놀라 뛰쳐나오는 것을 관찰한다. 구보는 중학생 때 처음 가보았던 종로 파고다 2층의 초밥집 물고기를 떠올린다. 그는 초밥보다 가루녹차가 맛있었던 그 집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왜 그 초밥집이 없어졌는지를, 민물고기 초밥은 무슨 맛이 날 것인지를 찬찬히 어림하곤, 내일 점심은 연어덮밥을 먹어야겠다 다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내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구보는 직장인의 점심이 약속으로 차있는 것이 아침 출근을 더욱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젓는다.

청계천에서 올라온 구보는 광화문 신호등을 기다린다. 저 멀리 5칸 남아 있던 초록불은 그보다 열 걸음 앞서 걷던 사내에게까지만 종종걸음을 허락한다. 구보는, 보도블록 가장자리에 서서, 자기는 대체 몇 시에 버스를 탈 것인가를, 대체 그 버스의 뒷문 앞자리에는 오늘도 살찐 아저씨가 앉아있을 것인가를 생각해본다. 그때 구보의 귀 바로 옆에 태극기를 범벅한 노인 한분이 대통령은 자폭하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깜짝 놀란 구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기 주변을 회전의자 위에서 돌듯 휘- 살펴본다.

그제서야 구보는 자기가 시위대 한복판에 둘러싸여 있음을 안다. 광장을 건너던 그는 노란색과 하얀색 물결 한가운데 티눈처럼 돋아있다. 양쪽 물감 어디에도 자신의 하늘색 셔츠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처량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다만 옆자리 노인을 경계하는 경찰관이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생인 것을 알아채며 이제 곧 서른을 바라보는 자신은 군 복무를 하는 당신과는 다르다는 체신머리를 지켜냄과 동시에, 온몸으로 나는 이 시위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껏 뿜어내곤 보도 앞으로 두 걸음 뚜벅뚜벅 내딛는다.


인공위성이 나를 감시하고 있다.
인공위성을 격추해야 한다!


구보는 한 소녀를 본다. 구보와 같이 평범한 옷차림의 또래다. 다만 그 소녀는 선명한 플래카드를 들고 있어 어정쩡한 자세의 구보보다 광화문에 훨씬 자연스러운 차림이다. 소녀는 플래카드에 인공위성에 대해 적었다. 그리고 매일 감시당하는 현실의 참담함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눌러가며 썼다. 꼭 다문 입으로 당찬 주장을 한다. 구보는 어쩐지 태극기들 조차 소녀에게서 두세 걸음 멀어져 있는 모습을 보며 노인, 경찰, 구보 모두가 우주적인 생각을 하는 그녀를 두려워하는구나 느낀다. 다만 자신만은 그녀가 정말 두려운가 하여 고개를 갸웃한다.

소녀의 근처에서 노인은 갑자기 사랑을 외친다. 이번에는 대상이 달라진 모양이다. 노인이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에 구보는 조금 놀란다. 그는 소녀를 바라봄과 동시에 사랑과 자폭을 함께 소리친 노인의 말이 참으로 신비롭다고 생각한다. 사랑, 자폭, 그리고 인공위성. 이 울퉁불퉁한 단어가 한 곳에 있을 수 있는 공간은 지구에서 오직 광화문뿐 아닐까 구보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니 마땅한 단어 하나 없이 공간을 스치는 자신은 역시나 이곳에 있으면 안 되는 무임승객이라며 부끄러워한다.

이크! 초록불이다. 구보는 재빨리 경찰들 사이로 들어선다. 구보가 뒤로 돌자 인공위성 소녀와 눈이 마주친다. 소녀는 구보에게 눈으로 말한다.


인공위성이 너도 감시하고 있어.
바보 같은 인간아.


구보는 어쩌면 저 인공위성 그녀가 자신보다 한참 또렷한 생각을 할 것임을,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사연이 있을지 모름을, 늘 바닥보다 위만 걱정하며 살아왔을 것임을 동시에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자신도 저 소녀를 무서워했구나 인정하며 고개를 재빨리 땅으로 돌리고 진저리 친다.

버스가 온다. 구보는 어기적거리며 버스에 오른다. 멀리 두 물결 사이 인공위성이 보인다. 구보는 이번 퇴근길이 기대 이상으로 다채로웠다 생각하며 지긋이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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