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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Oct 07. 2019

20대 후반, 소개팅 주선자의 삶

그 남자는 집이 멀어서 잘 안됐어


빗맞은 당구공처럼 어물어물 흘러가는 20대에게도 소개팅만큼은 꾸준히 신묘한 주제다. 때문에 비교적 무난히 살아온 청춘남녀는 이 로맨틱 코미디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게 되는데, 나의 경우에는 그 역할의 대부분이 주선자였다. 남주로 나서기엔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지간히 부끄러웠고, 여주를 하자니 타고나길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구경꾼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그것대로 아주 노-잼이었던지라 주선자쯤이 적성에 잘 맞았던 것 같다.

20대 초반, 파릇한 시절이 주선한 소개팅은 다섯에 넷 정도 결실을 맺었다. '남자는 요렇고, 여자는 조렇고, 그러니까 이 둘을 요렇게 조렇게 하면 좋겠다' 맺어주면, 여지없이 다음번에 팔짱 끼고 나타나는 연애 실사화를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이 탄생시킨 커플을 볼 때마다 먼 옛날 하트 화살을 날렸다는 큐피드를 떠올렸다. 그 조그만 신도 분명 누군가의 치밀한 사주를 받아 화살을 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가 심심해서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한 번은 바로 만날 것 같은데 뭉그적대는 커플을 지켜보는 것이 유래 없이 답답하여 유희열의 스케치북 사연을 직접 쓰고 둘을 강제 관람 보낸 적도 있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조선 후기식 오지랖이 그때는 전공 필수와 똑같은 중요도를 가졌다. 이런걸 보면 22살의 내가 참 심심했었구나.. 싶어 가벼운 연민과 한심한 분노가 동시에 치민다. 아마 지금의 20대 후반 남자 사람(나)이 이토록 무색무취인 것은 그때 자신의 오지랖을 모두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재미없는 회사원이 되고 난 뒤에도 주변에서 소개팅을 해달라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요즘이야 '남이사- 연애 사업은 각자 알아서 하세요'하며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불행히도 '이건 된다' 싶게 상서로운 그림을 간혹 발견한다. 그런 순간이면 그들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하는 것이 마치 공항에서 눈앞에 뻔히 보이는 남주를 자기 혼자 애써(?) 어긋난 뒤, 엉엉 울며 비행기를 타는 노답 여주를 보는 것처럼 안타깝게 느껴져 예전 버릇이 그대로 나오고 만다.


주선자는 인연을 이어줘야 하니까..


최근에 주선한 소개팅의 여주는 항공사 지상직으로 일하는 깨발랄 마케터였다. 남주는 디스플레이 회사에 다니는 엄근진 연구원이었고. 때마침 둘이 같은 날 소개팅을 요청했는데 이런 소소한 것도 일종의 운명인가 싶었다. 내 안에 살고 있는 중매쟁이 할아범은 벌써 신이 나서 '이거 된다', '이건 각이다' 따위의 말을 덩실덩실 춤추며 읊어댔다. 무난히 양자의 사진을 교환하고 일정 체크를 한 뒤 '전 바쁘니 알아서 잘 만나시고, 주요 경과 공지하세요' 전달하고는 주선자 역할에서 빠져나왔다.

소개팅 당일 새벽 2시쯤. 남주에게 카톡이 왔다. '야 지금 헤어지고 집에 간다'(???) 당장에 전화를 걸어 대체 첫 만남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남녀가 새벽 2시에 집에 가는 것인지, 난 분명히 샌님 두 명을 붙여 놓았는데 왜 인싸 둘을 붙인 화학반응이 일어난 것인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자 친구는 노래방에서만 3시간을 있었다는 공식 성명을 내놨다. 내막을 알고 보니 이 여자와 남자는 둘 다 소문난 잉글리시 팝 팬이었는데 '간만에 음악 취향 똑같은 사람을 만났더니 끊임없이 노래를 불렀다나' 뭐 그런 사유였다.

중매쟁이 할아범은 뒤에서 짜악-짜악 박수를 치고 있었고 나도 묘하게 뿌듯한 기분이 되어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 일주일만 지나면 고기 사 준다는 말이 전해지겠구나 내심 기대한 채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둘 사이에서 도통 비둘기가 날아오지 않았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건 오랜 격언이지만 적어도 소개팅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다. 보통 서로 감정이 좋으면 주선자는 소식이 짜증 날 정도로 넘친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주 쪽에 '이보시게, 무슨 소식 없습니까?'하며 물었다. 그랬더니 조금 놀라운 답변이 날아왔다.

'그 남자분은 집이 멀어서 좀.. 그렇게 됐어' 세상에 외모도 마음에 들고 첫 만남에 새벽 2시까지 노래방에 가서 신나게 놀만큼 취향이 맞아도 '멀어서 못 만나시겠는 경우'가 있다는 게 놀라워서 왜!?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본인은 롱디를 너무 오래 했어서 가까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이 역시 고개가 끄덕여지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친구 입장을 표현하자면 사랑의 여신이 인생의 꼬인 실타래를 풀어주다가 치킨 배달이 와서 저만치 뛰쳐나간 모양이었던 셈.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자 쪽도 비슷한 이유로 힘들다 했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앞 사례와 비슷한 '이것 때문에 좀..' 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다만 첫 번째 케이스의 이것이 '거리'였다면 두 번째는 '종교', 세 번째는 '흡연'처럼 작다면 작고 크다면 빌딩보다 큰 사유들이 있었다. 서른이 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을 잘 알고, 해왔던 연애를 알고, 그리고 그 어려움을 알아 이제는 미래의 역경까지 현재로 역산해서 반영했다. 20대에는 충분히 만나던 사람들이 서른즈음에는 단칼에 과락을 들이민다. 이것을 보면 세월이, 그리고 그 안에서 자란 경험이 우리를 조금 더 경제적이지만 덜 유연하게 만들었구나 싶다.

20대 후반, 소개팅 주선자의 삶은 예전처럼 막 신선하거나 다이나믹하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두근두근 듀오처럼 과학적이고 통계적인 배역이다. 눈이 높아졌다기보다는 포기가 빨라진 연애,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은 남아서 끝이 쌉싸름한 인연이 많은 시기. '인생 난이도가 대학생 때는 분명히 초록 달팽이 사냥이었는데 직장인이 되니까 흑룡이 튀어나옴'이라고 표현했던 친구의 말이 소개팅의 영역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더욱이 '나도 이제 진짜 어른이 되는건가'하는 생각까지 들어 새삼스러운 가을이다.



표지: 드라마 <멜로가 체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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