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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Dec 02. 2019

이건 90년대생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90년대생이 온다] : 이사님! 책 덮고 대화를 하세요


얼마 전, 과거에 알게 되었던 회사의 임원분께 짧은 메일이 한통 왔다. 첨부파일에 들어있던 것은 ‘90년대생 트렌드 보고서’. 


메일의 요지는 이랬다. 그분께서는 최근 [90년대생이 온다]를 감명 깊게 읽고 관련 보고서를 받으셨는데, ‘너가 진짜 90년대생(?)으로서 이 보고서에 대해 감상평을 적어달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계신 조직에 1020세대가 한 명도 없다 보니 나에게까지 연락을 주신 모양이었다. 평상시 수직적인 걸로 치자면 고려 말기 권문세족을 연상케 하는 악명 높은 분께서 어쩌다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연락을 주셨을까 싶어 무척 신기했다.

보내주신 ‘90년대생 트렌드 보고서’에는 별달리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이미 대유행하고 있는 [90년대생이 온다]의 목차를 바탕으로 네이버 블로그를 한 스푼 끼얹고 키워드만 쏙쏙 뽑아 비벼놓은 자료였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


1. 을지로

을지로 = 힙지로 : 90년대생은 50-60년 된 노포와 간판이 없는 가게가 주는 숨겨진 매력을 좋아한다.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면 #힙지로 관련 게시물이 쏟아진다. 이하 생략

2. 줄임말

별다줄 = 별걸 다 줄이네 : 90년대생은 줄임말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한글을 줄여 써 온 그들은 소비를 주도하는 세대가 된 뒤에도 모든 말을 줄여 쓰고 있다. 기타 등등


보고서는 요런 키워드들을 대략 20개 정도 담고 있었는데, 때마침 을지로에 사는 90년대생이 보기에는 굉-장히 진부했다. (원래 이런 류의 보고서는 만드는 순간, 유통기한이 지난다) 뭐랄까, 아저씨들이 ‘요즘 내 동년배들, 다 이 트렌드 보고서 본다’ 이런 느낌으로 만든 자료랄까.


[90년대생이 온다] 여러 의미로 대단한 책이다


하지만 높으신 분께 ‘이거  빗살무늬토기 같습니다만’이라고 메일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권문세족께서 애써 '요즘 애들'을 이해해보시려는 모습이 새삼 고무적으로 느껴져, 판도라의 상자 바닥에서 희망을 긁어내듯 답변을 썼다. ‘요즘 을지로도 유명하지만, 익선동이나, 망원동 같은 곳도 유명해졌습니다. 제 생각에 90년대생은 어느 한 동네만 좋아한다기보다 이야기가 있는 장소를 찾아내는 것 같습니다.’ ‘90년대생이 줄임말을 많이 쓰는 건 맞지만 시도 때도 없이 쓰지는 않습니다. 친한 사람들끼리, 혹은 인터넷에서만 많이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코멘트를 달아드렸다.

답신을 보낸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임원분께 전화가 왔다. 처음에는 메일을 잘 봤다고 칭찬해주시기에 ‘책 한 권이 만든 세대의 화합. 곽철용 같은 이사님께서 내 말을 들어주시다니’하고 뿌듯하게 생각했다. 여기까지 하고 전화가 끝났다면 정말 좋았으련만, 왜 항상 현실은 다 된 푸라프치노에 캡사이신을 뿌려대는 것인지, 그분은 곧 다음 말을 이어가셨다.


‘책이랑 이런 거 좀 보니까,
요즘 젊은 친구들 무슨 생각하는지
이제는 다 알겠어,

거- 유명하다는 동네랑, 줄임말 같은 거
리스트만 좀 보면 되겠군’


그분은 분명 책과 트렌드 보고서를 읽고 '젊은 친구들, 이제 다- 알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요즘 애들 줄임말 리스트'를 숨겨진 비급처럼 요청하셨다. 그제야 왜 갑자기 부하들과의 대화에는 관심 하나 없었던 분이 '90년대생 공부'에 열을 올리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이분에게 '90년대생이 온다'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도움을 주는 가이드가 아니라, 전략적 요충지에 도달하는 약도이자 '나 이렇게 세련된 사람임'을 보여주는 넥타이 같은 것이었다. 입장 바꿔서 보자면 90년대생 하나가 '콘서트 7080'을 보고 ‘아- 나 이제 부장님들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알겠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Hㅏ..또 왜 저러시는 거야..


어떻게 보면 바로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면 간단한 일을 책까지 사서 공부하는 서툴고 외로운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하지만   , 보고서 하나로 ‘젊은 애들을 이제  알겠다 말씀하는 것을 보며 세대 화합이란  요원한지도 느낄  있었다. 이제 그분 머릿속에서 90년대생이란 무조건 병맛을 좋아하고, 을지로에서 맥주를 마시며, 가성비를 중시하고, 말을 팍팍 줄여 쓰고, 워라밸에 목숨 거는 애들이었다. 나처럼 노잼에 술도 못 마시고, 초딩같이 소비하며, 맞춤법 틀리는 것에 질색하는 빌런은 ‘어이 젊은 친구, 젊은 친구답게 행동해’ 할 만큼 이상한 애였다.

차라리 예전에 함께 일했던 나이 지긋하신 팀장님은 90년대생(나)이 말대꾸하고 사사건건 반문하면 '암튼- 요새 애들은 한마디를 안져요 한마디를- 허헣!' 하시면서 ‘천천히 다시 한번 설명해봐’라고 물어보셨다. 책  권을 보고 요즘 애들  알겠다고 호언하는 것보다 ' 무슨 말하는지 모르겠으니  번만  말해달라' 요청하는  500배는  훌륭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분들은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세대를 이해하는  아니라 사람을 이해하시기 때문이다.

타인의 이해를 위한 책이 현장의 높으신 분에게 전략서로 읽힌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 책은 모든 90년대생들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챡챡 해부한 정답지 같은 것이 아니다. '애네들 이럴 수 있어요'를 얘기하고 같이 말을 섞어보라는 안내서 같은 존재다. 책은 덮고 귀를 열면 10배는 존경받을 행동이 요상하게 흘러간다. 90년대생이 '60년대생 이해(?)하는 90년대생' 공부해서 알아야 하는,  혀가 꼬이는 놀라운 현상이 현실에서는 벌어지고 있다.




사진출처: 길벗 [무작정 따라하기]: 90년대생이 워라밸을 지키려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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