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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광섭 Sep 09. 2018

인피니티 건틀렛은 왜 등장하는가

SF 판타지의 장치로서 바라본 인피니티 건틀렛


바야흐로 어벤져스의 시대다.

최근 개봉했던 '앤트맨과 와스프'까지 생각한다면 어벤져스 시리즈의 우리나라 누적 관객 수가 1억 명(!)을 넘어섰다고 하니 이제는 아이언맨이 콩쥐팥쥐보다 유명한 시대가 온 것이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나 마블 팬이오'라고 자랑스럽게 옷에 써붙이고 다니시는 분들이 꽤 보인다. 이렇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어벤져스 팬심을 큰 소리로 자랑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이 시리즈의 앞날은 이후로도 창창하리라. 어린 시절부터 SF나 판타지 장르에 환장했던 나로서는 참 아름다운 세상임에 틀림없다.


어벤져스 시리즈를 본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무기를 꼽아보라면 그건 바로 인피니티 건틀렛일 것이다. 커다란 주먹 모양의 건틀렛이 왕보석을 5개나 박고선 반짝반짝 빛나고 있으니, 그 외양만으로도 '이걸 쓰는 애가 끝판왕'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마련이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영화관을 나설 때면 관객들은 모두 손가락을 딱딱 튕귀며 잠시나마 타노스가 되는 상상에 잠긴다. 역시 그 파워에 감탄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던 장면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이면 그 많은 무기들 중 인피니티 건틀렛일까? 세상에는 어마 무시한 무구가 차고 넘치는데 손가락 하나만 튕기면 우주의 절반을 먼지로 날려버리는 이 공포의 창작물은 무슨 이유에서 영화에 등장하게 된걸까? 이를 위해서는 SF 판타지 문학의 거장, 어슬라 K 르귄이 말했던 '판타지적 장치에 대한 견해'를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르귄은 SF 판타지 문학의 비현실적 장치가 인간의 현실을 최대한(!)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판타지면 판타지고, SF면 SF인 것을 현실 묘사라고 표현하다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최대치'라는 표현이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다음과 같은 예시를 사용한다.


만일 과학자 철수가 'A는 발암물질이다'는 가설을 검증하고 싶다면 그는 생쥐를 활용한 실험을 설계할 수 있다. 호기심에 가득 찬 철수는 불쌍한 생쥐에게 '아주 높은  복용량'의 A를 꾸준히 투여할 것이다. 며칠 안에 생쥐가 암으로 죽는다면 철수의 가설은 검증된다. 'A는 발암물질이었다'고 말이다.

SF 판타지 작가도 상상 속에서 실험을 한다. 이들은 현실에서 보이는 인간의 욕망이나 사회의 문제를 최대치로 끌어올려 본다.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때때로 엄청난 과학기술이나 말도 안 되는 환상들을 작품 세계에 끌어들인다. 그렇지만 이 장치들은 단순히 이야기에 허무맹랑함만 더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아주 높은 복용량'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SF판타지의 작가는 과학자의 방식을 차용한다


그렇다면 다시 인피니티 건틀렛으로 돌아와 보자. 어벤져스의 작가는 이 육중한 장갑으로 어떤 현실에 대해 묘사하고 싶었던 걸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피니티 건틀렛의 속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강력한 무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진다.


1. 우주 절반을 날려버릴 만큼 강하다.
2. 손가락 하나만 튕기면 될 만큼 쉽다.
3. 희생자가 죽을 때 그냥 스르륵 먼지가 된다.


세계의 현대인은 매일 매 순간 경쟁을 한다. 대학 하나라도 가려 치면  수십만 명과 한정된 정원을 두고 경쟁해야 한다. 이런 경쟁은 취업 전선에 들어와서도 매한가지다. 문제는 비단 이런 경쟁이 인생의 중대사에서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침 출근길에 인파가 가득한 열차에 낑겨 고통을 받아야 하고, 점심에 맛집에라도 가려 하면 기다란 줄을 서야 한다. '절반만 없다면'이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인피니티 건틀렛은 이런 욕망을 '아주 높은 복용량'으로 해소해 준다. 그리곤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네가 원하는 세상을 한번 보여줄게'라고.


그리고 그 과정이 손가락 튕기기만큼 쉽고, 먼지로 사라지는 것처럼 고통스럽지 않다는 점도 중요하다. 아무리 옆에 앉은 저 녀석이 사라졌으면 좋겠다지만 그 과정이 피가 튀는 끔찍한 장면이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원래 그랬다는 듯이 모든 경쟁이 쉽게 끝나길 바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손가락 하나만 딱! 튀기면 소리 소문 없이 세상의 절반을 가루로 만드는 인피니티 건틀렛은 아주 효과적인 '최대 복용량'이라고 할 것이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그저 스스륵 사라지는 사람들


마음속 깊이 열광하는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싶다면 그만큼 깊이 있는 사유가 담긴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피니티 건틀렛의 파워에 벌벌 떨고, 마블의 상상력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이 사람들 내면의 현실을 '아주 높은 복용량'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영화 속에서 나를 열광시켰던 다양한 슈퍼파워들과 과학기술들을 상상해보자. 그것은 정말 '단순히 멋진 것'이었을까? 아니면 우리의 내면에 잠든 무언가의 '최대 복용량'이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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